[금제록 (禁祭錄)] - 58화

변수

by 돌부처

서화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눈앞에, 수백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윤서화 한 개인의 기억이 아니었다. 그녀의 피에 흐르는, 대대로 이어져 온 파수꾼들의 기억이었다. 핏줄을 타고 흐르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이자 숭고한 멍에.


최초의 파수꾼.

폭군이 하늘의 신물을 탐하여 나라의 근간을 뒤흔들려 할 때, 목숨을 걸고 국새(國璽)를 빼돌렸던 이름 모를 궁녀의 마지막 밤이 떠올랐다. 금군들의 횃불이 궁궐을 밝히고, 추격자들의 발소리가 가까워져 오는 절체절명의 순간. 그녀는 어린 딸의 품에, 용의 기운이 담긴 국새를 안겨주며 속삭였다. ‘이것이 이 땅의 숨결이다. 결코 빼앗겨서는 아니 된다.’ 그녀는 결국 붙잡혀 죽었지만, 그녀의 딸이 그 뜻을 이었다. 그리고 그 딸의 딸이.


수백 년간, 그들은 세상의 그림자 속에서 묵묵히 싸워왔다. 때로는 존경받는 국무(國巫)로서 왕의 곁에서 길을 밝혔고, 때로는 역병이 창궐한 마을에서 미친 여자 취급을 받으며 홀로 결계를 쳤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자신의 삶을 포기해야만 했다. 오직, 이 세상의 균형을 지킨다는 단 하나의 숙명을 위해. 그 끝없는 희생의 연쇄가, 바로 파수꾼의 역사였다.


서화의 눈앞에, 자신의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병상에 누워, 죽어가면서도 웃고 있었다. 어머니의 병은 단순한 노환이 아니었다. 십 년 전, 서울의 지맥을 끊으려던 화천회의 의식을 막다가 얻은, 영혼의 상처였다. 생명력이 서서히 말라가는 끔찍한 저주.


‘서화야… 이제… 너 혼자구나.’

‘어머니….’

‘기억하거라… 우리는 저주받은 것이 아니라… 선택받은 것이란다. 이 세상의 밤을… 지키는… 마지막 등불…. 그러니, 결코 너 자신을 원망해서는 아니 된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파수꾼의 모든 지식과 함께, 그 지독한 고독까지 물려주고 떠났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그 무거운 숙명을 홀로 짊어져야만 했다. 친구도, 사랑도, 평범한 삶도. 그녀는 그 모든 것을 포기했다. 아니, 포기해야만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한지운을 만나기 전까지.


처음이었다. 자신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끈질기게 파고드는 남자. 이 지긋지긋한 숙명에서 벗어나, 평범한 여자 윤서화로 살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하지만 그 꿈은, 잔인한 현실 앞에서 산산조각 났다. 그는 이제, 그녀가 막아야 할 가장 위험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녀의 가장 소중한 희망이, 가장 끔찍한 절망이 된 것이다.


“나는….”


서화의 입술이, 갈라진 틈으로 힘겹게 열렸다.


“나는… 당신을 만난 것을….”


그녀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후회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후회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 그 모든 감정이 뒤섞여, 하나의 투명한 결정이 되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파수꾼의 눈물이 아니었다. 한 남자를 사랑했던, 한 여자의 눈물이었다. 눈물이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 맑고 푸른 연기가 되어 스크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사랑이라.”


뱃사공의 목소리가 울렸다.


“가장 달콤하면서도, 가장 쓴 독이지. 아주 훌륭한 뱃삯이다.”


철컥.


세 번째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 육중한 강철문은, 이제 단 하나의 빗장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손님.”


뱃사공의 목소리가, 홀로 남은 박종윤을 향했다.


“너의 기억은, 무엇이지?”


박종윤은 떨리는 손으로 키보드를 더듬었다. 그는 자신의 기억을 순순히 내어줄 수 없었다. 다른 이들의 기억이 감정적인 상처라면, 자신의 기억은 이 싸움을 이어나갈 유일한 무기였다. 그것은 그가 구축한 모든 시스템의 암호키이자, 알고리즘의 근원이었다. 자신의 기억이 사라지면, 한지운을 구할 유일한 열쇠마저 사라지는 것이다. 그는 필사적으로, 다른 방법을 찾아 헤맸다. 이 부당한 거래를 뒤집을 수 있는, 단 하나의 버그. 단 하나의 허점. 거래에는 계약이 따르고, 계약에는 반드시 허점이 있기 마련이다.


“잠깐.”


그가 외쳤다.


“거래의 조건을 다시 확인해야겠군.”


그는 스크린을 향해 소리쳤다.


“넌 우리에게 ‘가장 귀한 기억 하나씩’을 요구했어. 우린 그 조건에 따라 세 명의 기억을 줬지. 하지만 넌, 세 개의 문을 열었을 뿐이야. 마지막 문은 아직 닫혀있지. 네놈의 법칙에 따르면, 대가는 치러졌으니 문은 열려야 하는 것 아닌가?”


“호오?”


뱃사공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흥미가 섞였다.


“재미있는 논리군, 필멸자. 하지만 너희는 넷. 아직 마지막 한 명의 삯이 지불되지 않았다.”

“아니.”


박종윤이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셋이다. 저 형사는 우리와 같은 배를 탄 동료가 아니야. 그는 우리를 쫓는 ‘외부인’이지. 네놈의 법칙에 따라, 강을 건너려는 ‘손님’은 우리 셋뿐이라는 거다. 그런데 왜 넷의 몫을 요구하는가. 이것이야말로 네놈의 규칙에 어긋나는 것 아닌가?”

“……한심하게 짝이 없는 말장난이군...”


뱃사공의 목소리가 잠시 끊겼다. 박종윤의 교묘한 논리가, 수천 년간 이어져 온 그의 규칙에 미세한 균열을 낸 것이다.


“새로운 거래를 제안하지.”


박종윤의 눈이, 승부사의 그것처럼 번뜩였다.


“내 기억을 거는 대신, 너와 내기를 하고 싶다. 내가 이기면, 마지막 문을 열고 우릴 보내줘. 네가 이기면….”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내 모든 기억을 너에게 주지. 내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이 시대의 모든 기술과 지식. 네가 그토록 원하는, 새로운 ‘이야기’가 되어주겠다. 수천 년 묵은 네놈의 이야기들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이야기로.”

“재미있군.”


뱃사공이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강물이 흐르는 소리 같기도, 수많은 영혼이 동시에 속삭이는 소리 같기도 했다.


“좋다. 필멸자가 감히 신에게 거는 내기라. 수천 년 만에 처음이로군. 내기의 내용은, 뭐지?”


박종윤은 스크린에, 하나의 프로그램을 띄웠다. 그것은 그가 평생을 바쳐 개발한, 궁극의 인공지능. ‘크로노스(Chronos)’였다. 화면에는, 수십억 개의 데이터 포인트가 별처럼 빛나는 거대한 구체(球體)가 나타났다. 살아있는 은하수였다.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데이터를 기반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프로그램이다. 신의 예언이 아닌, 데이터가 보여주는 가장 논리적인 확률이지.”


그가 말했다.


“내가 지금부터, ‘한지운’이라는 변수를 입력하겠다. 그의 모든 기록, 그의 유전자 정보, 그를 둘러싼 모든 사건들. 크로노스는 그 모든 것을 분석해, 그의 미래를 예측할 거야.... 내기는 간단해.”


박종윤의 목소리가, 기지 전체에 울려 퍼졌다.


“나의 과학이 계산한 확률과, 네놈이 알고 있는 운명. 과연, 어느 쪽이 맞을 것인가.”


박종윤의 선언은, 오만했다. 그것은 한낱 필멸자가, 수천 년간 인간의 운명을 관장해 온 존재에게 던지는 정면 도전이었다. 서화와 장서린, 최민준은 숨을 죽였다. 그들은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기이한 도박을 목격하고 있었다. 한 남자의 과학이, 신의 예언과 맞서는 순간.


“크흐흐… 크하하하하!”


뱃사공이 웃었다. 처음으로 감정이 실린, 순수한 즐거움이 담긴 웃음소리였다.


“가상하구나, 필멸자여! 좋다! 그 오만한 내기, 받아주마! 너의 그 쇠와 전기로 만든 장난감이, 과연 이 몸이 엮어온 운명의 실타래를 끊을 수 있을지, 어디 한번 구경해보자꾸나!”


박종윤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그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마지막 명령을 입력했다.


[변수 ‘한지운’ 입력 완료]

[모든 데이터 링크 동기화 시작]

[미래 예측 시뮬레이션 ‘크로노스’… 기동]


화면 속, 거대한 데이터의 은하수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수십억 개의 별들이 빛을 발하며,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한지운이라는 한 남자의 삶이었다. 그의 탄생, 그의 유전자 정보, 그가 읽었던 모든 책, 그가 만났던 모든 사람들. 그리고 그를 둘러싼 모든 초자연적인 사건들. 그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연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시뮬레이션… 시작합니다.”


화면 속, 데이터의 강이 미래를 향해 흘러가기 시작했다. 수만, 수억 개의 가능성. 그 모든 미래가, 하나의 거대한 나무처럼 가지를 뻗어 나갔다. 어떤 미래에서는, 한지운이 왕에게 완전히 잠식당해 세상을 파괴하는 폭군이 되었다. 또 다른 미래에서는, 그가 싸움의 끝에 스스로를 희생하여 모든 것을 끝내는 영웅이 되었다. 수많은 전쟁, 수많은 죽음, 수많은 이별. 그 모든 가능성이, 눈앞에서 명멸했다.


“보아라, 필멸자여.”


뱃사공의 목소리가, 그들의 뇌리에 울렸다.


“저것이 바로 운명이다. 수억 개의 갈림길이 있다 한들, 결국 모든 강이 바다로 흐르듯, 모든 것은 정해진 결말로 향하는 법. 저 사내의 끝은, 파멸이다. 스스로를 태워 세상을 구하든, 세상과 함께 불타 없어지든.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재뿐이야.”


뱃사공의 말대로였다. 크로노스가 보여주는 수억 개의 미래 중, 99.9%의 미래가 끔찍한 비극으로 끝나고 있었다. 한지운이 살아남는 미래는, 단 하나도 없었다.


“아니….”


박종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그의 과학이, 그의 희망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아직이야.”


장서린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봐, 저기.”


그녀가 가리키는 곳. 수억 개의 비극적인 미래의 강줄기 속에서, 유일하게 다른 색을 띤, 아주 가느다란 실 하나가 보였다. 다른 모든 미래가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빛나고 있다면, 그 실은 희미한 황금빛을 띠고 있었다. 0.00001%의 확률. 통계적으로는 ‘오류’로 분류되어 무시될, 기적에 가까운 가능성이었다.


“저건….”

“살아남는 미래….”


“불가능하다.”


뱃사공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울렸다.


“저것은 존재할 수 없는 미래. 신의 변덕이 만들어낸, 한낱 신기루일 뿐이다.”

“아니!”


박종윤이 외쳤다. 그는 크로노스에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저 미래를 확대해! 저 미래에 도달하기 위한, 모든 변수를 분석해!”


데이터의 은하수가, 그 가느다란 황금빛 실을 향해 집중되기 시작했다. 화면이 수백만 개의 텍스트와 그래프로 뒤덮였다. 그리고 마침내. 크로노스는, 그 기적의 미래에 도달하기 위한 단 하나의 ‘키워드’를 찾아냈다. 그것은 ‘힘’도, ‘희생’도, ‘사랑’도 아니었다. 화면 중앙에 떠오른, 단 한 단어.


[기록말살(記錄抹殺)]


“기록… 말살…?”


서화가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


처음으로, 뱃사공의 목소리에서 당혹감이 느껴졌다.


“알았다….”


박종윤의 눈이, 미친 사람처럼 번뜩였다.


“알았어! 젠장, 난 바보였어!”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리는 계속 틀리고 있었어!”


그가 외쳤다.


“우리는 계속해서 ‘기록’을 찾고, ‘기록’을 해석하고, ‘기록’으로 싸우려고 했지.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 화천회도, 저 뱃사공도, 심지어 왕까지도! 모두 ‘기록’에 얽매여 있어! 과거에 얽매여 있다고!”

“하지만 지운이는… 지운이는 달라!”


그는 황금빛 미래의 실을 가리켰다.


“저 미래는, 한지운이 모든 기록을 파괴하고, 왕도, 화천회도, 심지어 파수꾼의 역사마저도 전부 지워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백지 위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미래야! 과거를 버리는 자만이, 미래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라고!”

“그럼….”


최민준이 물었다.


“우리가 이겼군.”


“아니.”


박종윤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게 아니야….”


그는 화면 구석, 아주 작은 글씨로 적힌 한 줄의 문장을 가리켰다. 그것은, 크로노스가 계산한 ‘기록말살’의 부작용. 그 기적의 대가였다.


[기록말살 시, 시전자 ‘한지운’의 존재 역시… 모든 차원에서 소멸될 확률, 100%.]


정적. 그것은 구원이 아니었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가장 완벽한 자살이었다.


“크흐흐….”


뱃사공이 다시 웃기 시작했다.


“결국, 네놈의 과학도 알고 있지 않느냐. 저 사내의 끝은, ‘무(無)’라는 것을. 자, 내기는 끝났다, 필멸자. 너의 패배다.”

“아직이야.”


박종윤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는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변수를 입력했다. 그것은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지운이라는 한 인간을 이루고 있던, 가장 본질적인 데이터. 그의 친구, 박종윤. 그를 지키려는 파수꾼, 윤서화. 그를 쫓는 형사, 최민준. 그리고 그와 악연으로 얽힌 과학자, 장서린.


“우리”라는 변수... 시뮬레이션… 재시작.”


데이터의 은하수가, 다시 한번 격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시뮬레이션… 재시작합니다..”


박종윤의 마지막 선언은, 비명에 가까웠다. 그것은 과학자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이자, 친구를 향한 필사적인 절규였다. ‘우리’라는 변수. 논리와 데이터로만 움직이던 크로노스의 연산에, 처음으로 ‘관계’와 ‘유대’라는 비과학적인 요소가 입력되었다. 데이터의 은하수가, 이전보다 몇 배는 더 격렬하게, 미친 듯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수억 개의 미래가 태어나고, 소멸했다. 크로노스는 폭주하고 있었다. 예측 불가능한 변수의 등장에, 시스템 전체가 과부하에 걸린 것이다. 연구소의 냉각팬이 굉음을 내며 돌았고, 전력이 불안정하게 깜빡였다.


“어리석구나, 필멸자.”


뱃사공의 목소리가, 그 혼돈을 비웃었다.


“한낱 인간들의 하찮은 감정 따위가, 거대한 운명의 흐름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 믿느냐. 그것은 그저, 바다에 던져진 돌멩이 하나에 불과하다. 잠시의 파문을 일으킬 뿐, 바다 자체를 바꾸지는 못하는 법이지.”


그의 말대로였다. ‘우리’라는 변수가 추가되었음에도, 크로노스가 보여주는 미래는 변하지 않았다. 99.9%의 파멸. 그리고, ‘기록말살’을 통한 100%의 소멸. 오히려, 황금빛 미래의 실은 이전보다 더 가늘고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마치, 그들의 발버둥이 오히려 기적의 가능성을 갉아먹고 있는 것처럼.


“안 돼….”


박종윤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힘없이 멈췄다. 그의 모든 것이, 부정당했다. 그의 과학, 그의 희망, 그리고… 그의 우정마저도.


정적.


패배의 침묵이, 지하 기지를 짓눌렀다. 최민준은 씁쓸하게 고개를 숙였고, 장서린은 차마 스크린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서화는 떨리는 손으로, 품 안에서 작은 옥구슬 하나를 꺼내 들었다. 만약의 경우, 이 기지 전체를 희생시켜 뱃사공의 영역을 파괴하기 위한, 그녀의 마지막 수였다.


“자, 이제 뱃삯을 받을 시간이군.”


뱃사공의 목소리가, 승자의 선언처럼 울려 퍼졌다.


“너의 그 모든 기억. 약속대로, 이 몸에게 바쳐라.”


화면 속, 검은 강물에서 거대한 손 하나가 솟아 나와, 스크린을 뚫고 박종윤을 향해 뻗어 나왔다. 그것은 물리적인 손이 아니었다. 그의 영혼을, 그의 기억을 직접 끄집어내기 위한, 거부할 수 없는 구속이었다. 박종윤은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 그때였다.


“아직이야.”


나지막한 목소리. 서화였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스크린 앞으로 다가섰다.


“당신은… 중요한 것을 잊고 있어요, 뱃사공.”


그녀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맑고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무엇을 말하는가, 파수꾼의 후예.”

“당신은 ‘기억’을 원했죠. 하지만 박종윤 씨의 기억은, 그 사람 혼자만의 것이 아니에요.”


그녀는 박종윤의 등을 가리켰다.


“그의 기억 속에는, ‘한지운’이라는 또 다른 존재가 살아 숨 쉬고 있어요. 그들의 우정, 그들의 약속. 그것은 두 사람의 영혼이 엮여 만들어낸, 공동의 ‘기록’입니다.”

“그것이, 뭐지?”

“당신은 한 사람의 뱃삯을 요구했지만, 여기에는 두 사람의 영혼이 엮여 있다는 겁니다.”


서화가 말했다.


“당신의 법칙에 따르면, 이건 ‘두 배’의 뱃삯이야. 이건 불공평한 거래라고요!”

“궤변이구나.”


뱃사공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아니요, 법칙입니다.”


서화는 물러서지 않았다.


“당신이 인간의 감정을 하찮게 여기는 바로 그 오만함이, 당신의 법칙에 구멍을 만든 겁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검게 변한 팔을 박종윤의 어깨에 얹었다. 왕의 독이, 그녀의 몸을 타고 박종윤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여기… 세 사람의 영혼이 더 있어요. 당신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왕의 영혼까지도!”

“……!”


뱃사공이 처음으로, 침묵했다.


“봐!”


장서린이 소리쳤다. 그녀의 손가락이, 스크린을 가리키고 있었다. 크로노스의 화면. 서화의 말이 시작된 순간부터, 기적처럼 멈춰 있던 데이터의 은하수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늘게 떨리던 0.00001%의 황금빛 실. 그 실 옆으로, 아주 가늘지만 선명한 또 다른 빛의 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서화의 푸른빛, 최민준의 남색 빛, 장서린의 흰빛, 그리고 박종윤의 녹색 빛이 한데 얽혀 만들어진, 무지갯빛 실이었다.


[새로운 변수 감지]

[시뮬레이션… 재계산]


황금빛 실과 무지갯빛 실이, 서로를 향해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헤어졌던 연인이, 서로를 알아보듯. 두 개의 실이 마침내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


화아아악-!


화면이 눈부신 빛으로 뒤덮였다. 모든 데이터가 사라지고, 단 하나의 결과만이 화면 중앙에 떠올랐다.


[기록말살 시, 시전자 ‘한지운’의 존재 소멸 확률… 99.99998%]

[생존 확률… 0.00002%]


그것은 여전히, 기적에 가까운 확률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0이 아니었다. 불가능이, 가능성으로 바뀐 순간이었다.


“이럴… 리가….”


뱃사공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경악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운명의 실이… 필멸자들의 의지에 의해… 뒤틀렸단 말인가….”

“내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뱃사공.”


박종윤이 말했다. 그의 눈에는, 다시 희망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제, 이 0.00002%의 확률에, 내 모든 것을 걸겠다.”


철컥.


그 순간, 마지막 네 번째 빗장이 풀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뱃사공의 내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크로노스가 보여준 기적의 가능성에, 그 강고했던 지하 기지의 시스템 스스로가 문을 연 것이다.


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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