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RD 현장에서 벌어지는 위험한 오류
HRDer는 논쟁하고 토론해야 합니다. 아무리 권위 있는 누군가가 한 얘기라도 톺아봐야 합니다.
HRD 담당자마저 논쟁과 토론을 하지 않는다면, 조직 전체에 그것이 없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울러 제 경험을 바탕으로 쓴 내용에 대해서도 반론은 언제든지 격하게 환영합니다.
우선 DISC 유형에 대한 아래 질문에 답해보자.
1) 상담가들은 어떤 유형이 가장 많을까?
2) 기업의 임원들은 어떤 유형이 가장 많을까?
3) 대학 교수들은 어떤 유형이 가장 많을까?
4) 범죄자들은 어떤 유형이 가장 많을까?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질문에 정답이 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위 집단에 속한 모든 사람에 대한 전수 조사를 하지 않는 이상 정답은 없다. 하지만 어떤 유형이 가장 많을지 예측은 가능하다. 1번부터 4번까지 모두 안정형(S)이 제일 많을 확률이 가장 높다.
왜 그럴까? 사실 별 거 아니다. 왜냐하면 전 세계 인류는 그냥 안정형이 가장 많기 때문이다. 핀란드에 본사를 두고 있는 Extended DISC의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의 32.2%가 우호형이다. 모수가 특정 임계치를 넘어서게 되면 평균으로 회귀하는 성향이 있다. 그래서 어떤 직업군이라도 많은 수를 조사하면 결국 전체 평균과 비슷해질 것이다.
특정 직업군이나 직무에 적합한 유형이 있다는 말은 그럴 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특정 집단에 특정 유형이 많다는 말이다. 상담가, 교수, 임원 등은 상담가 집단, 교수 집단, 회사원 집단 등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집단에 적합한 유형이 있다니 세상에 이렇게 위험한 말이 있는가? 그럼 대한민국 고등학생이라는 집단에는 어떤 유형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는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4번 질문에 '범죄자에 어떤 유형이 가장 많은가'라는 질문을 추가했다. 상담가에 적합한 특정 유형이 있다는 것은 범죄자에도 적합한 특정 유형이 있다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를 다르게 생각하면 특정 유형은 범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특정 유형은 동성애자가 된다는 것과 같이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특정 집단에 적합한 유형이라니....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한 성향 진단 도구가 낙인과 배척의 도구가 되어 버린다.
'어떤 성향이 그 직무에 적합한 것'이 아니라 '특정 상황에 잘 적응하기 위해 특정 성향이 필요한 것'
예를 들어 당신이 누군가의 고민에 대해 상담해줘야 하는 상황이라고 가정해보자. 상담은 내 얘기보다 타인의 얘기를 많이 들어주는 것이 우선이다. 그래서 주도형보다는 따뜻하게 상대방에게 공감해줄 수 있는 안정형이 필요하다. 사람은 누구나 모든 형태의 성향을 내면에 가지고 있다. 그래서 특정 상황에서 필요한 성향을 끄집어낼 수 있다. 주도형인 사람도 상담 상황에서는 자신이 말하고 싶은 욕구를 누르고 상대의 말을 경청할 수 있다. 이처럼 상담이라는 특정 상황에서 '발휘하면 좋을 성향'이 안정형인 것이지, 안정형인 사람이 무조건 상담가에 적합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적절한 훈련을 받고 전문성을 갖춰야 좋은 상담가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예전 어떤 전문가라는 분이 강의에서 '대기업의 임원들은 주도형(D)이 많다'라고 하는 걸 실제로 본 적이 있다. 진짜 그럴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일정 수 이상이 되면 평균과 비슷해지기 때문에 임원들도 결국은 우호형(S)이 가장 많을 것이라 장담한다. 하지만 임원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내면에 있는 주도형을 의식적으로 끌어올려서 빠르고 정확한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주도형의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DISC와 같은 진단은 정확하게 말하면 성격 유형이 아니라 행동 유형을 진단하는 것이다. 즉, 그 사람이 처한 환경에 적응해서 보이는 행동을 진단하는 것이다. 나의 원래 본성은 잘 변하지 않지만 환경이 변하면 거기에 적응하기 위해 행동 유형을 바꾼다. 이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진단 결과가 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 나의 본성과 환경에 적응된 행동 두 가지를 모두 알아볼 수 DISC 진단도구도 있다.
진짜 전문가라면 전문가 수준에 맞는 근거를 제시해야
혹자는 '특정 직무에 적합한 유형'과 '특정 상황에 잘 적응하기 위해 필요한 유형'이 큰 차이가 없지 않냐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우리 같은 비전문가 수준에서 하는 얘기라면 그럴 수 있겠다 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앞에 서서 강의하는 소위 전문가들은 그러면 안된다. 오히려 전문가이기 때문이 이런 작지만 큰 차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해 더 철저하게 경고하고 알려줘야 한다.
일부 강사들은 DISC나 MBTI에 대해 며칠 동안 진행되는 강사 양성과정을 이수한 게 고작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전문가라면서 프로필과 제안서를 제출한다. 그리고 운 좋게 채택이 되면 많게는 일반 직장인의 한 달 급여 이상의 강사료를 받아간다. 많은 강의 경험을 전문성의 근거로 들기도 한다. 물론 일부 인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잘못된 내용으로 그 수많은 강의를 했다면 그 사람은 전문가가 아니다.
강의 만족도를 위해서건 다른 이유에서건, 그렇게 특정 직업이나 직무에 적합한 유형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면 그 근거와 유의미한 데이터를 제시해야 한다. 그냥 본인의 경험이나 뇌피셜로 유형과 직무를 연결시켜 버리면 이것은 혈액형이나 별자리로 알아보는 성격 검사와 차이가 없다. 이는 칼 융을 비롯해 오랜 세월 동안 이 분야에 헌신했던 수많은 연구자들에 대한 모독이다.
그래서 전문가라면 특정 유형과 직무/직업을 직접적으로 연결시켜서 강의하면 안 된다. 나는 이것도 일종의 사기라고 생각한다. 사기가 별건가가? 어설픈 지식으로 비전문가 교육생들을 현혹시켜 경제적 이익(강사료, 컨설팅 비용 등)을 취한다면 그게 바로 사기다. 물론 이는 일부 가짜 전문가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대부분은 진단도구의 위험성을 잘 인지하고 조심스럽게 사용한다.
나 역시 이 분야에 대해 전문가는 아니다. 하지만 비전문가가 보기에도 너무 위험한 내용이 일부 가짜 전문가에 의해 아무 여과장치 없이 교육생들에게 흘러 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일부가 HRD 현장에 미치는 폐해는 생각보다 너무 크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