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의 시작 (3)
1414년, 독일의 작은 마을 콘스탄츠에 전 세계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공의회를 연다. 세 명의 교황이 난립하던 시기였기에 가장 중요한 의제는 누가 진짜 교황인가를 가리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로마 교황 요하네스 23세의 거취가 주목을 끌었다. 요하네스 23세는 공의회 소집을 계속 반대했으나 결국 승인하고 직접 참석한다.
그의 반대파들에게 이번 공의회는 절호의 기회였다. 공의회가 진행되면서 세 명의 교황을 모두 폐위시키고 새로운 통합 교황을 세우자는 안이 힘을 얻었다. 요하네스 23세는 최선을 다해 반대파에 대항했지만 점점 수세에 몰렸다. 결국 1415년 3월 20일 오후 1시경, 그는 변장을 한 채 말을 타고 달아난다. 하지만 곧 붙잡혀 5월 29일 공식적으로 폐위당하고 감옥에 갇힌다. 이후 풀려난 그는 피렌체로 가서 코시모 데 메디치의 보호 아래 지내다가 1419년에 사망한다.
당시 요하네스 23세의 죄목은 성직 매매, 남색, 고문, 선대 교황 독살 등 여러 가지였다. 그중 가장 큰 죄목은 그가 에피쿠로스 철학을 추종했다는 것이다. 비록 르네상스 초기였지만 고대 철학에 대한 연구가 그렇게 이상한 게 아닌 시기였다. 오히려 교회는 고대 철학을 수용해 교리를 강화했다. 그런데 왜 에피쿠로스 철학은 중대한 죄가 되었을까?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모든 고대 철학이 다 교회의 입맛에 맞았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예수회가 운영하는 학교에는 ‘신학은 토마스 아퀴나스를,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야 한다’는 지침이 있었다.(라티오 스투디오룸, Ratio Studiorum) 반면 에피쿠로스 철학은 거의 이단 취급을 당했다.
사실 에피쿠로스 철학은 14세기까지 확실한 실체가 없었다. 여러 고대 서적에서 인용된 내용을 통해 그 모습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그런데 1417년, 요하네스 23세의 비서이기도 했던 포조 브라촐리니가 남부 독일의 한 수도원에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오래된 필사본을 발견한다. 이 책의 저자는 에피쿠로스의 제자인 루크레티우스(Titus Lucretius Carus, 96?∼55? B.C.)였다. 이 책이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면서 에피쿠로스 철학의 실체가 마침내 드러난다. 그리고 이는 르네상스 촉발의 한 요인이 되었다.
이 책은 베누스에 대한 찬미로 시작한다.
생명을 주시는 베누스시여, 당신은 하늘을 미끄러지는 별들 아래
배들을 나르는 바다와 곡식을 가져오는 땅들을
그득하게 채워주십니다.(중략)
당신께 바다의 수면이 미소 지으며, (중략)
생명을 주는 서풍의 바람결이 풀려나 세어지자 마자, (중략)
모든 것의 가슴에 매혹하는 사랑을 심어 넣어,
종족을 좇아 열심히 자손을 생산하고 만드십니다.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강대진 옮김, 아카넷, 25-26쪽)
우리가 우피치 미술관에서 만나는 보티첼리의 ‘비너스(베누스)의 탄생’은 바로 이 대목을 표현한 것이다. 교회는 이 책의 인쇄와 판매를 금지했지만, 에피쿠로스 철학은 이렇게 암암리에 인문주의자들에게 퍼져 나갔다.
아리스토텔레스 VS 에피쿠로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는 원동자(元動者, the Prime Mover)라는 개념이 있다. 이는 사물을 최초로 움직이게 하고 존재하게 하는 힘을 말하는데 기독교의 창조주와 정확히 일치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과 동물이 다른 존재라고 선을 그었다. 이 역시 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모든 생물을 다스린다는 기독교 교리와 연결되었다.
반면에 에피쿠로스 철학은 그야말로 신성 모독이었다. 에피쿠로스 철학은 쾌락주의 철학이라고도 불린다. 우리는 쾌락이라고 하면 다소 질 낮은 어떤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에피쿠로스가 주장한 쾌락은 현재의 삶 자체에서 행복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실제로 에피쿠로스 학파 공동체는 매우 검소한 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철학의 근간에는 원자론이 있다.
에피쿠로스 철학에서 세상의 모든 것은 쪼개질 수 없는 씨앗, 즉 원자(atom)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물은 원자들의 결합과 해체로 순환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천상의 고귀한 존재라고 했던 태양은 물론이고 인간과 동물 그리고 돌멩이까지도 모두 똑같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동물들과 같다니 교회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에피쿠로스에게 생명의 탄생은 원자의 결합이고, 죽음은 원자의 해체였다. 우리가 죽으면 몸의 원자들은 해체되어 자연 속으로 스며들어 또 다른 형태로 재결합한다. 그래서 사후 세계는 없으며, 신이 인간의 몸으로 내려온다는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이나 부활 역시 성립될 수 없는 것이었다.
에피쿠로스 철학은 여러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성체변화설(빵과 포도주가 축복을 받으면 진짜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교리)을 부정한 갈릴레오의 주장도 원자론에 기반하고 있다. 이는 갈릴레오 종교재판의 진짜 이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조르다노 브루노 역시 무한 우주론을 주장하며 인간만이 유일하다는 교리에 맞섰다. 그는 혹독한 고문을 받고 화형에 처해졌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에피쿠로스의 대립은 시간이 흘러도 이어지고 있다. 데카르트에게 동물은 그저 ‘움직이는 기계(Machina Animata)’였고, 울음소리는 작동 중 발생한 오류일 뿐이었다. 이에 대해 밀란 쿤테라는 이렇게 비판한다.
‘신이 정말로 인간이 다른 피조물 위에 군림하길 바랐는지는 결코 확실하지 않다. 인간이 암소와 말로부터 탈취한 권력을 신성화하기 위해 신을 발명했다고 하는 것이 더 개연성 있다.
(밀란 쿤테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재룡 옮김, 민음사, 472쪽)’
신은 인간에게 관심이 없다
에피쿠로스가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신은 그들끼리 모여 자기들만의 쾌락을 추구할 뿐, 인간 때문에 분노하거나 기뻐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신은 인간에게 관심이 없다. 그래서 신의 노여움을 풀고 사랑을 얻기 위해 행하는 모든 행위와 의식은 불필요한 것이다. 신이 아니라 현재 존재하는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쾌락주의 철학이다. 하지만 교회 입장에서 이것은 무신론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에피쿠로스에게는 ‘고통을 줄이고 쾌락을 높이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교회는 고대인이 남긴 수많은 유무형의 유산을 파괴했다. 그리고 고대의 사상을 부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반대 입장을 취했다. 그래서 쾌락이 아닌 고통을 신성시했다. 이는 예수의 고통을 체험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수도사들은 주기적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송곳으로 찔렀고 서로의 몸을 채찍질했다. 조금이라도 규율을 어기면 스스로 회초리를 준비하고 땅에 꿇어앉았다. 그리고 ‘메아 쿨파(Mea culpa,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며 매질을 당했다. 일반인들에게도 금욕과 경건한 삶을 강요했다. 전 유럽에 말 그대로 ‘고통의 광란’이 만연했다.
하지만, 여전히 고위 성직자들과 귀족들은 산해진미를 즐기는 연회를 이어갔다. 일반인들도 사랑을 나누고 자손을 낳으며 자신들만의 행복을 만들어갔다. 쾌락에 대한 추구는 없앨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인간의 본성이었다.
결론적으로 연옥이 중세 세계관에 틈을 만들었고, 흑사병은 삶과 죽음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가져왔다. 그리고 에피쿠로스 철학은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를 넓혀주었다. 이 세 요소가 순차적 혹은 동시다발적으로 기능하면서 르네상스가 촉발되었다.
특히 신의 피조물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는 인간의 삶을 주장했던 에피쿠로스 철학은 프랑스혁명과 미국 독립선언서 등 근대를 거쳐 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프랑스 소설가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1821-1880)는 에피쿠로스의 시대를 이렇게 표현했다.
“신들이 존재하기를 멈추고 아직 예수가 오지 않았던 바로 그때, 키케로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시대 사이에 인류 역사상 유일한 순간, 인간이 올곧이 홀로 섰던 시절이 있었다.”
(스티븐 그린블랫 <1417년, 근대의 탄생> 이혜원 옮김, 까치, 91쪽)
[참고자료]
스티븐 그린블랫 <1417년, 근대의 탄생> (이혜원 옮김, 까치)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강대진 옮김, 아카넷)
시보사와 타쓰히코 <쾌락주의 철학> (김광림 옮김, 동화출판사)
밀란 쿤테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재룡 옮김, 민음사)
에른스트 블로흐 <서양 중세·르네상스 철학 강의> (박설호 옮김, 열린책들)
마이클 화이트 <갈릴레오> (김명남 옮김, 민음사)
김상근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21세기 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