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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군 Nov 27. 2020

1947년 3월 1일, 4.3의 시작

제주 관덕정

코로나로 인해 많은 이들이 제주도로 휴가를 떠난다. 그런데 제주도를 여행하다 보면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4.3 사건의 흔적을 스쳐 지나게 된다. 그중에는 과거 제주목 관아의 부속건물인 관덕정이라는 곳이 있다. 이 일대는 4.3 사건에서 매우 중요한 장소이기도 하다.


제주 4.3 특별법에는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한 사건’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해서 4.3 사건이라 부르는데 그 시작을 1년 전 3월 1일로 잡고 있다. 그 이유는 해방 전후 제주에 쌓였던 갈등이 폭발한 지점이 바로 1947년 3월 1일 관덕정이었기 때문이다.

제주 관덕정.  과거 제주목 관아의 부속건물로 세종 30년(1448년)에 지어졌다.

1947 3.1 운동 기념행사


이 날 오전 11시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제28주년 3.1 기념 제주도 대회’ 열렸다. 이 행사는 3.1절 바로 직전인 2월 23일에 결성된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이 주도했다. 이 민전의 공동 의장이자 3.1절 기념행사 준비위원장을 맡았던 안세훈은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위원장이기도 했다.


이때 모인 인원이 최대 3만 명에 달했다. 당시 제주도 총인구가 27~30만 명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숫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승만 학당 교수이기도 한 김용삼(2017)은 제주도에 공산세력이 만연했다고 말한다. 민중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선전과 선동에 넘어갔다는 것이다. 심지어 제주도를 ‘좌익의 온상’이라고까지 표현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좌익 세력이 주최한 행사에 이렇게 많은 인원이 모일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같은 책에서 조선공산당이 해방 직후 공산혁명 달성을 위해 ‘급진적인 파업과 극렬 투쟁’으로 일관하여 민심을 잃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남한 내에 공산주의 혐오가 광범위하게 퍼졌는데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민심을 잃었는데 제주도가 선전 선동에 넘어갔다고 하니 앞뒤가 충돌하고 있다. 그리고 3.1절 행사 준비위원회에는 제주 감찰청 부청장이었던 김차봉 경감 등을 비롯해 검경 관계자와 우익인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3.1절 행사에 대규모 인원이 참가한 것은 오히려 미군정이 민중들에게 민심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할 수 있다.


실제로 미군정은 연이은 실정으로 민중들의 반발심과 분노를 키웠다. 대표적인 실정이 식량 정책이었다. 혼란스러운 시기 미군정은 아무런 통제나 조정 장치 없이 식량에 대해 자유거래를 허용했다. 이 때문에 매점매석과 독점이 심해졌고 물가는 미친 듯이 뛰었다.


1945년 9월 한 말에 9.4원이던 쌀값이 다음 해 9월에는 2,800원까지 뛴다. 이렇게 시장이 망가지자 미군정은 급히 자유 거래를 중단하고 미곡 수집령과 배급제를 실시한다. 그런데 이 미곡 수집령은 일제 시대 공출보다도 더 가혹했다. 게다가 일반 시세의 4분의 1도 안 되는 수매가를 책정해 농민들의 반발을 샀다. 배급받은 곡식에도 석탄 가루와 모래 등이 섞여 있어 탈을 일으키기도 했다.


결국 김용삼의 논리 구조를 그대로 적용하면 미군정에 대한 민중들의 반발은 그들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그리고 좌익세력은 그 대척점에서 민중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이런 민중들이 3.1절 기념행사에 운집하게 된 것이다.


내 말은 남로당이나 공산주의자들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도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하였다고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당시 제주의 상황을 미군정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제쳐두고 좌익세력들이 주민들을 선전, 선동한 결과로만 단순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947년 3월 1일 오후 2시 45관덕정의 총소리


3.1절 기념식이 끝난 이후 사람들은 가두 행진을 시작했다. 참가자들은 ‘자주 통일 민주국가 수립’과 ‘미군정 등 외세 척결’을 외쳤다. 행렬은 읍내 중심인 관덕정을 향했다. 지금은 옛 제주목 관아가 복원되어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제주 경찰서가 있었다.


행렬이 관덕정을 지나던 2시 45분쯤, 사건이 터진다. 기마경찰 중 임영관 경위로 알려진 경찰관이 한 소녀를 치게 된다. 그런데 이 경찰은 다친 소녀를 보지 못했는지 그냥 지나가려 했다. 당연히 주변 사람들은 항의했고 그 경찰관은 군중을 피해 말을 몰아 경찰서 쪽으로 피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 근처 망루에서 시위대를 지켜보던 경찰이 총을 발사한다.


이 총격으로 총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었다. 사건이 터지자 경찰은 제대로 된 진상조사는 제쳐두고 바로 강경진압으로 돌입했다. 사건 당일 오후 7시부터 이튿날 오전 6시까지 통행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사건 다음 날인 3월 2일 하루 동안에만 학생 25명을 잡아들였다.


그리고 3월 14일 당시 경무부장이었던 조병옥이 제주로 온다. 그리고 3월 19일에 담화문을 발표한다. 그 주요 내용은 3월 1일 관덕정에서 발생한 경찰의 발포는 경찰서를 습격하려고 한 시위대에 대한 ‘정당방위’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경찰의 이러한 발표는 사실일까?

제주목 관아.  일제 강점기 때 철거되어 제주도청과 경찰서 등이 자리했다. 이후 2002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준비된 조준’ 사격


당시 관덕정에서 총에 맞아 사망한 사람 중에는 21살의 박재옥이라는 여성이 있었는데 젖먹이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국민학교 6학년이었던 허두용(15세)도 포함되어 있었다. 거기다 사상자들 대부분은 광장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 길 위에서 총을 맞았다. 당시 초대 제주 도지사였던 박경훈도 총에 맞은 사람들은 시위대가 아니고 주변에서 구경하던 이들이었다고 발표한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사망한 6명 중 5명이 등 쪽에 총을 맞았다는 것이다. 경찰서를 습격하려고 달려드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는 경찰의 주장과 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등 돌린 사람들을 쐈다는 건 시위대 진정이나 해산을 위한 ‘공포 사격’이 아닌 ‘조준 사격’이라는 증거였다.


이런 상황이 되자 민심이 폭발하는 것은 당연했다. 3월 10일 일부 공무원까지 참여한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다. 파업의 요구사항은 3.1 총격 사건의 진상 규명과 발표 책임자 처벌이었다. 경찰과 미군정은 500명이 넘는 이들을 연행하는 강경진압으로 대응했다. 파업은 10일 정도 지속된 이후에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민중의 분노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총파업 이후 초대 제주 도지사였던 박경훈은 물러났다. 그리고 4월에 신임 제주도지사로 유해진이 부임했다. 그는 한독당 농림부장 출신으로 극우 성향이 강했다. 그는 제주도로 오면서 자신의 호위대 7명을 데리고 왔는데 이들이 모두 그 유명한 서북청년회 단원이었다. 서북청년단의 공식적인 최초 입도였고 좌우익 사이에서 제주도민들이 겪어야 할 고난의 시작이었다.


피눈물 어린 관덕정과 제주


아래에서부터 들끓던 민심은 결국 1년 뒤 1948년 4월 3일 폭발한다. 이날 새벽 제주 곳곳에 봉화가 오르며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관덕정은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의 시신 전시 등 4.3 사건의 시작이자 중심 중 하나였다.


관덕정은 여전히 그 넓은 지붕으로 넉넉한 그림자를 드리워 무더운 여름날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다. 그리고 그 넉넉함 만큼이나 수많은 피눈물을 품고 있기도 하다. 관덕정뿐 아니라 우리가 제주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해변과 풍광, 오름, 그리고 한발 한발 내딛는 올레길 구석구석에도 4.3의 피가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다. 

무장대 2대 사령관 이덕구(제주 4.3 평화기념관). 1949년 6월 7일 관덕정 광장에 십자가 형틀에 매달려 전시됐다. 이후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 상태에 놓인다.


[참고자료]

허영선,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서해문집

김용옥, <우린 너무 몰랐다 – 해방, 제주 4.3과 여순민중항쟁>, 통나무

주철희,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 – 1948, 여순항쟁의 역사>, 흐름

김용삼, <대구 10월 폭동/제주 4.3사건/여순 반란사건 - 축복으로 끝난 비극>, 백년동안

지만원, <제주 4.3반란 사건-지워지지 않는 오욕의 붉은 역사>, 도서출판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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