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엔진, 나의 딸
오전 11시 30분, 두브로브니크 공항 렌터카 부스.
직원에게 차 키를 건네는 순간,
손끝이 묘하게 허전했다.
지난 며칠간 나의 손은 핸들을 꽉 쥐고 있었고,
나의 발은 낯선 도로의 리듬을 읽어내느라 긴장해 있었다.
차 키를 반납한다는 것은 단순히 이동 수단을 돌려주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낯선 땅에서 우리를 지켜주었던 작은 보호막을 걷어내고,
이제 다시 온전히 두 다리로 서야 한다는 신호였다.
1,000km를 달리는 동안 나의 어깨를 짓누르던 책임감은 사라졌지만,
동시에 든든한 전우를 떠나보내는 듯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우리는 공항 로비에 앉아 서로를 마주 보며 안도했다.
긴장으로 굳어있던 몸의 근육들이 비로소 무장 해제되는 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운전석과 조수석,
우리는 같은 곳을 향해 달렸지만 서로 다른 풍경을 보고 있었다.
나는 앞만 보며 달렸지만,
딸은 그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1,000km를 달리는 동안,
운전석의 나는 길을 보았지만,
조수석의 너는 나를 보았다.
내가 긴장해서 입술을 깨물 때마다 물병을 건네주던 그 손길이,
실은 나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준 진짜 엔진이었다."
딸의 차분한 목소리는 내비게이션보다 정확했고,
그 존재는 가드레일보다 든든했다.
내가 딸을 세상 밖으로 데리고 나온 줄 알았는데,
실은 딸이 나를 이 넓은 세상 속으로 안전하게 안내하고 있었다.
자그레브행 비행기가 활주로를 박차고 올랐다.
창가에 이마를 대고 멀어지는 크로아티아의 해안선을 내려다보았다.
자그레브의 회색빛에서 시작해 플리트비체의 초록빛을 지나,
아드리아해의 쪽빛을 거쳐 두브로브니크의 붉은 지붕까지.
우리가 지나온 길이 하나의 선명한 궤적으로 이어져 있었다.
우리가 구글 맵 위에 그렸던 것은 단순한 경로가 아니었다.
"지도는 길을 찾기 위해 보는 것이었지만,
여행이 끝난 지금의 지도는
우리가 얼마나 용감했는지를 증명하는 성적표가 되었다."
아찔한 절벽 길에서의 비명도,
길을 잃고 헤매던 당혹감도,
그리고 마침내 마주한 벅찬 감동도.
그 모든 것이 합쳐져 세상에 단 하나뿐인 지도가 완성되었다.
이 지도는 접어서 서랍 속에 넣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날들 속에 영원히 펼쳐져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밀린 빨래가 기다리고,
해결해야 할 업무들이 책상 위에 쌓여 있는 현실로 복귀하게 된다.
하지만 공항을 빠져나오는 우리의 발걸음은 출발할 때와는 달랐다.
우리는 변했다.
"트렁크에 짐을 싣고 떠나던 우리는,
이제 마음에 '용기'라는 짐을 하나 더 싣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 짐은 무겁지 않다.
오히려 우리를 날아오르게 할 것이다."
일상에서 거친 파도가 몰아칠 때면
슐리치 해변의 고요함을 꺼내어 마음을 다독일 것이다.
삶의 무게가 버거울 때면
스르지 산에서 내려다보던 그 탁 트인 시야를 기억해 낼 것이다.
우리의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내 안에는 이미 크로아티아의 태양과 바람,
그리고 딸과 함께 쓴 단단한 이야기가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여행을 장착한 여자가 되어 다시 삶을 여행한다.
To. 나의 영원한 여행 메이트, 딸에게.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여전히 그날의 빗속, 자그레브에 머물러 있었을 거야."
나의 길, 나의 엔진, 고맙고 사랑한다."
사실, 이 한줄을 쓰기위해 이 연재가 시작되었습니다
And. 이 모든 시작과 끝을 만들어 준 나의 다윗에게.
"당신의 지지와 사랑이 있었기에 우리는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사랑합니다."
"우리가 그린 지도, 당신에게도 이정표가 되기를."
여행 기간: 2025년 5월 18일 ~ 6월 2일 (14박 17일)동유럽 여행중
자동차여행: 5월 21일 ~ 5월 27일 (6박 7일)
여행 루트: 자그레브(IN) 플리트비체 > 자다르 > 쉐베닉 > 트로기르 > 스플리트 > 오미스 > 마카르스카 > 플리체>스톤 > 두브로브니크(OUT)
이동 수단: 렌트카 (총 이동 거리 약 1,000km)
동행: 겁 많은 운전자 엄마 & 인간 내비게이션 딸
Day 1-2: 자그레브 (Zagreb)
Highlight: 반 옐라치치 광장, 성 마르카 교회
Memory: 비 오는 자그레브에서 처음 핸들을 잡았던 날. 두려움이 시작되었지만, 설렘도 함께 시동이 걸렸다.
Day 3: 플리트비체 (Plitvice)
Highlight: 국립공원 트레킹 (H코스 추천)
Memory: 초록빛 호수 위를 걸으며, 운전 긴장으로 굳은 어깨를 자연에게 맡겼던 시간.
Day 4-5: 자다르 & 스플리트 (Split)
Highlight: 바다 오르간(자다르),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스플리트)
Driving Tip: 해안도로는 절경이지만 커브가 많다. 뒤따르는 차가 있다면 잠시 갓길에 세워주며 여유를 가질 것.
Memory: 오른쪽 창문으로 끝없이 펼쳐지던 코발트블루. "엄마, 저기 좀 봐!" 딸의 감탄사가 배경음악처럼 흘렀다.
Day 6-7: 펠레샤츠 대교 & 스톤 (Ston)그리고 두브로브니크
Highlight: 펠레샤츠 대교 드라이브, 스톤 성벽 걷기
Memory: 돌아가지 않고 바다를 가로질러 직진했던 다리 위에서의 해방감. 그리고 소금을 지키던 성벽 아래서 만난 고양이들.
Highlight: 스르지 산 일몰(직접 운전), 구시가지 골목 산책, 슐리치 해변
Memory: 붉게 타오르던 노을을 백미러에 담고 내려오던 길. 상처 입은 도시가 보여준 회복의 힘.
조수석의 역할: 내비게이션보다 중요한 건 옆 사람의 '격려'다. 길을 잘못 들어도 "괜찮아, 돌아가면 돼"라고 말해주는 여유가 필요하다.
주차장 확인: 구시가지들은 대부분 '차 없는 거리'다. 숙소 예약 시 무료 주차 가능 여부와 주차장 위치를 반드시 확인할 것. (두브로브니크는 주차비가 비싸다!)
무리하지 않는 일정: 1,000km는 길다. 하루 이동 시간을 3~4시간 이내로 잡고, 중간중간 작은 마을에서 쉬어가는 것이 렌트 여행의 진짜 묘미.
마트 장보기: 매끼 외식보다는 현지 마트(Konzum 등)에서 장을 봐서 해 먹는 한식이 여행의 피로를 풀어준다. (된장, 컵라면 필수!)
"우리의 지도는 여기서 접히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지도는 이제 막 펼쳐지기를 응원합니다."
"여행을 장착한 그녀, 다시 길 위에 서다."
차 키는 반납했지만, 세상에 대한 호기심은 반납하지 않았습니다.
여행의 용기를 품고 일상과 도시를 여행하는 <도시를 걷는 여자>
그녀의 또 다른 발걸음이 곧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