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장착한 여자
여행마다 시작과 끝을 잇는 한 도시가 있다.
이번 여정에서 그 도시는 부다페스트였다.
우리의 14박 17일 동유럽 여정의 시작이자 끝이 될 도시.
비행기표의 ‘IN’과 ‘OUT’ 칸에 같은 이름을 적는 순간,
이 여정이 나를 조금은 바꿔놓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하지만 선명한 예감이 일었다.
그 기대감은 공항의 긴 대기 속에서도,
비행기 창문 너머로 번지는 새벽빛 속에서도
조용히 이어졌다.
그러나 여행의 시작은 언제나 계획과 다르게 찾아왔다.
홍콩에서의 레이오버는 말 그대로 모험이었다.
길을 잃고, 뛰고, 후회하고, 다시 살아나는 시간.
몇 시간의 질주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완전히 소진시켰다.
완전히 산화되어 공중으로 흩어질 듯한 몸을
가까스로 추스르며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제 막 시작된 여정인데,
벌써부터 ‘끝’에 도달한 사람처럼 지쳐 있었다.
그럼에도 모험을 멈출 수 없었던 이유는 분명했다.
짧은 시간이라도 경유지인 홍콩의 모든 것을 보고 싶었다.
이 긴 동유럽 여정의 시작이 완벽하길 바라는, 어쩌면 지나친 기대.
그 간절함이 우리를 잠시도 쉬지 못하게 했다.
결국 그 욕심은 피로가 되어 고스란히 부다페스트행 비행기에 실렸다.
비행기 좌석에 몸을 묻으며 나는 간절히 바랐다.
부다페스트가 우리를 조금은 따뜻하게 맞아주기를.
하지만 여행은 언제나 예상 밖에서 시작된다.
이른 아침, 공항 셔틀에서 내린 순간
부다페스트는 너무 추웠고, 회색빛 하늘과 스산한 비로 우리를 맞았다.
차가운 공기가 밤새 고단했던 몸을 그대로 파고들었다.
머릿속에서 캐리어 구석구석을 훑었다.
‘혹시 두꺼운 옷을 하나 더 넣지 않았던가?’
완벽히 짜놓은 계획 속엔, 이 냉기를 막아줄 옷 한 벌조차 없었다.
개인적인 낭패감은 잠시였다.
얇은 겉옷을 여미는 딸의 어깨에 시선이 닿자
마음이 먼저 저려왔다.
며칠 전, 날씨 예보를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파고들 때
누구에게도 항변할 수 없는 억울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현실은 늘 예보보다 더 냉정했고,
그 사실이 괜스레 서글펐다.
각자의 방식으로 그 순간을 견뎠다.
딸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캐리어 손잡이를 잡았고,
나도 묵묵히 그 옆을 걸었다.
지치고 추운 낯선 도시에서
각자도생(各自圖生)은 당연한 생존의 방식이었다.
그때 알았다.
이 낯선 공기 속에서
나만 동동거리고 있었음을.
이미 모든 것을 수용하고 있는 동행 앞에서
나는 여전히 미완의 여행자였다.
그렇게 우리는 부다페스트에 들어섰다.
몸은 피로했고, 마음은 불안했지만,
도시는 이미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입국의 부다페스트는, 단단한 각오보다
부드러운 수용으로 시작되었다.
그날의 차가운 공기와 젖은 거리 위에서
나는 알았다.
여행의 ‘IN’이란, 세상으로 들어가는 일이 아니라
내 안으로 스며드는 일이라는 것을.
숙소를 다뉴브 강 근처로 정해두길 참 잘했다.
부다 지역을 둘러보다가도 잠시 들러 쉬고, 다시 나올 수 있어 움직임이 훨씬 여유로웠다
몸도 한결 가벼워졌고, 아직 바람은 쌀쌀했지만 흐리던 하늘은 어느새 맑게 갰다.
다뉴브 강변을 따라 도착한 그레이트 마켓 홀은 외관부터 웅장했지만,
내부에 들어선 순간 그 규모와 활기에 다시 한번 놀랐다.
천장까지 높이 뻗은 철골 구조 아래,
시장 전체가 색과 냄새와 사람들로 들썩이고 있었다.
각국의 관광객과 현지인들이 뒤섞여
손짓, 말소리, 포장지의 바스락임까지도 이 시장의 리듬처럼 느껴졌다.
2층 기념품 코너에는 사고 싶은 것들이 한가득이었지만,
고르다 고르다 결국 “나중에 다시 오자.”
자석 하나, 엽서 한 장, 자수 앞치마 한 벌…
고르지 못한 것들이 괜히 마음에 오래 남았다.
일몰과 야경을 보기 위해 숙소에서 약 세 시간쯤 푹 쉰 뒤, 다시 밖으로 나섰다.
늦은 오후를 향해 가는 시간임에도 햇살은 눈부셨고,
우리는 오늘의 마지막 일정을 위해 세체니 다리(Széchenyi lánchíd)를 건넜다.
세체니 다리는 단순히 부다와 페스트를 잇는 교량이 아니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상징이자, 부다페스트의 얼굴처럼 느껴졌다.
그 위를 걷는 사람들, 사진을 찍는 여행자들 모두가
이 다리 하나만을 위해 이곳에 모여든 듯 보였다.
나에게도 이 다리는 부다페스트를 기억하게 만드는 가장 강렬한 장면 중 하나였다.
나는 세체니 다리 위를 한 걸음 한 걸음,
곱씹듯 천천히 걸었다.
세체니 다리를 건너 부다성을 오르기 위한 길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푸니쿨라 대신 닫혀버린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잠깐 후회도 했지만,
이미 지친 다리를 이끌고 묵묵히 계단을 올라 부다성 위로 향했다.
부다성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성 그 자체보다도
그곳에서 내려다본 다뉴브 강 너머 페스트 지역의 해지는 풍경이었다.
하늘은 노을로 물들고, 도시의 실루엣은 점점 흐려지는데
그 장면들은 우리를 쉽게 떠나지 못하게 했다.
어부의 요새로 향하는 길목의 골목들은 오래되고 단정하면서도 따뜻했다.
돌바닥은 오목하게 파였고, 창틀마다 다소곳하게 걸린 꽃 화분까지
모든 것이 여전히 살아 있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길을 잃는 것도, 목적지를 늦추는 것도
그저 이 도시를 천천히 알아가는 또 하나의 방법 같았다.
언젠가 다시 부다페스트에 오게 된다면,
꼭 부다 지역에 숙소를 정하고
조금 더 느리고, 정성 들여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조용히 스쳐 갔다.
마침내 도착한 어부의 요새.
해가 완전히 지고 도시 위로 어둠이 내려앉았다.
하나둘 켜지기 시작한 불빛들 사이로,
다뉴브 강 너머 페스트 지역의 야경이 서서히 드러났다.
‘이렇게까지 빛나는 도시였구나.’
‘이 어둠을 기다리길 정말 잘했구나.’
그 순간, 마음속에서 조용한 감탄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마음속으로 이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겠다고 다짐했다.
하루를 온전히 바깥에서 보냈다.
예상보다 추웠던 부다페스트의 공기에
가벼운 옷차림은 조금 부족했지만,
찬바람과 맞닿으며 성도, 언덕도, 강도, 골목도 쉼 없이 걸었다.
밤이 깊어 숙소로 돌아와 딸과 마주 앉아 잔을 기울였다.
서로 말을 아끼며 건넨 잔 속엔,
이 도시에서 보낸 첫날의 피로와 기쁨, 그리고 감사함이 조용히 스며 있었다.
다음날 아침,
부다페스트의 밤은 유난히 짧았다.
몸은 피곤했지만 깊은 잠은 오지 않았고,
나는 결국 새벽 산책을 택했다.
생각이 가라앉지 않던 새벽,
차가운 공기를 마주하며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발길이 닿은 곳은 리버티 다리였다.
이 다리는, 그 이름처럼 한 시대를 건너온
자유와 해방의 상징이다.
그리고 지금, 그 다리 위를 걷는 나의 발걸음에도
왠지 조금은 가벼운 자유의 감각이 스며드는 듯했다.
크로아티아로 향하기 전 마지막 부다페스트의 아침은
이 도시 특유의 조용한 아름다움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곧 우리 모녀에게 닥칠 그야말로 혼란의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건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호텔로 돌아와 조식을 즐기고 체크아웃을 마쳤다.
짐은 프런트에 맡기고, 오후 버스 출발 전 마지막 시간을 채우기 위해
국회의사당과 ‘유대인의 신발’ 기념비를 보기 위해 다시 나섰다.
24시간 교통권 종료 시각에 맞춰 9시 30분에 숙소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전철에서 내리는 순간, 검표원이 우리를 따라 내렸다.
"내리는 시각까지가 유효 시간이며,
당신들은 9시 32분에 내려 벌금 대상이다."
고작 2분 차이.
그 2분 때문에 1인당 1,200 포린트(약 46,000원)의 벌금을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믿을 수 없었다.
‘하차 시각 기준’이라는 규정은 어디에도 없었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런 사례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수십 년 전부터 반복되어 왔다고 했다.
검표원에게 애써 사정을 해보았지만
듣는 둥 마는 둥, 흥정하듯 “한 명 분만받을 테니 지금 내라.”
카드든 현금이든 꺼내라는 식이었다.
시간만 있었더라면 대사관이나 경찰서에 가고 싶었지만
현실은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는 것,
그게 더 답답하고 씁쓸했다.
결국 현금으로 갖고 있던 1,200 포린트를 건네고
억울한 마음을 꾹 눌러 담은 채 호텔로 돌아왔다.
짐을 찾아 무거운 발걸음으로 네플리겟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마음 한쪽이 너덜너덜해지는 듯했다.
관광세라면 기꺼이 내겠다.
하지만 시간을 맞추기 위해 시계를 수없이 확인하고,
실수하지 않으려 애썼던 그 공만큼이나
딸아이는 억울해했고, 나는 그런 딸을 달래 보려 애썼다.
그럼에도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아름다운 도시의 뒤편에 숨겨진 불친절함이
낯선 손님에게 이렇게 냉정할 수 있구나 싶어
묘한 서운함이 밀려왔다.
우리는 마치 환대받지 못한 이방인처럼,
부다페스트의 그 쓰라린 진실을 끌어안은 채
자그레브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날의 벌금은 단순한 손해가 아니었다.
낯선 세상의 차가운 규율 앞에서
‘미완의 여행자’가 지불해야 했던 값비싼 등록금이었고,
완벽을 내려놓으라는 첫 번째 배움이었다.
부다페스트 —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벌금과 배움을 함께 냈다.
〈자그레브에서 마음 살리기〉
부다페스트의 쓰라린 상처를 품은 채 도착한 도시, 자그레브.
화려함과 웅장함 대신, 이곳은 오래된 친구의 집처럼 수수하고 단정했다.
낯선 곳에서 상처를 덮어줄 ‘익숙한 온도’를 찾는 시간.
3화에서는 예측할 수 없던 여정의 격정적인 흐름을 잠시 멈추고,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서 마주한 일상의 소중함과 고요한 관찰의 순간을 이야기합니다.
화려한 관광지를 좇는 대신,
도시가 가진 본연의 리듬과 느린 호흡 속에서
‘여행자로서의 시선’이 조금씩 성숙해지는 과정을 담았습니다.
우리의 여정은 자그레브에서
숨을 고르는 시간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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