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떠난 14박 17일 동유럽 여행기
여행에는 언제나 마음을 살려야 하는 순간이 있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일, 예기치 않은 피로, 그리고 뜻밖의 상처들.
하지만 멈춰 서야 할 때를 알아차리는 순간,
여행은 다시 나를 살려내기 시작한다.
자그레브는 그 회복의 시간이 되어주었다.
버스가 낯선 땅으로 깊숙이 접어들수록,
창밖의 풍경은 부다페스트의 웅장함 대신
수수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바뀌어갔다.
내 마음도 그랬다.
잠시 전까지 끓어오르던 억울함과 씁쓸함은
버스의 잔잔한 흔들림 속에 서서히 가라앉아가고 있었다.
완벽한 환대를 기대하거나,
예상된 아름다움만을 좇는 건 얼마나 오만한 일이었던가.
도시가 나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바람 대신,
이제는 내가 도시의 규칙과 불친절함까지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면,
우리가 떠나온 부다페스트는 이제 ‘아름다움’이 아니라
‘경험’으로 기억될 터였다.
차창 밖으로 이름 모를 들판들이 천천히 스쳐갔다.
상처를 품은 채 이동하는 이 고요한 시간이,
어쩌면 여행의 진짜 시작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플릭스버스의 맨 앞 좌석을 택했다.
추가 요금을 내고라도 넓은 시야로 풍경을 온전히 담고 싶었다.
부다페스트에서의 벌금 사건으로 마음이 개운치 않았고,
시차 적응도 되지 않아 이번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잠으로 이 시간을 통과하고 싶었다.
목베개를 고쳐 베고, 창가에 머리를 기대려는 찰나—
내 뒤에서 낯선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파란 눈의 네댓 살쯤 된 아이가
맑은 목소리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곧 울고, 웃고, 다시 졸랐다.
그 옆의 엄마는 잠이 든 듯, 혹은 모른 척한 듯
창밖을 바라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버스는 네 시간 반 동안 흔들렸고,
그 아이의 목소리도 함께 흔들렸다.
잠을 자려던 우리의 계획은 완전히 무산되었다.
사랑스러운 파란 눈의 아이였지만,
그날만큼은 미소로 바라볼 여유가 없었다.
피곤과 답답함, 그리고 딸을 향한 안쓰러움이
묘하게 뒤엉켜 마음 한편을 무겁게 눌렀다.
사실, 그 순간 나는 너무 피곤했다.
하지만 내 피로보다 더 마음에 걸린 건
옆자리의 딸이었다.
부다페스트에서의 일은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아이는 납득하기 어려운 현실 앞에서 여전히 마음이 상해 있었다.
나는 그저 이 버스의 흔들림이,
그 상처를 조금이나마 흔들어 흩어주기를 바랐다.
우리는 약 다섯 시간의 버스 여정을 지나
마침내 자그레브 네플리겟(Népliget)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긴 하루의 여운이 남아 있었지만,
버스 문이 열리자 잔잔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피곤한 얼굴과 조금은 가라앉은 마음을 안고,
우리는 곧바로 숙소로 향했다.
정류장 앞에서 6번 트램을 타기 위해
티샥(Tisak)에서 30 분권 티켓 네 장을 샀다.
한 장에 0.53유로.
작은 계산이었지만,
‘이제 다시 새로운 도시가 시작된다’는 실감이 들었다.
트램은 느린 속도로 선로 위를 미끄러졌다.
창밖으로 스치는 거리의 풍경과 사람들의 표정이
어쩐지 평화로워 보였다.
그제야 어깨 위의 긴장이
조금씩 풀려 나가는 걸 느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우리가 묵게 될 숙소,
Elenas Rooms and Apartment.
소박하지만 정갈한 공간이었다.
햇살이 깊숙이 스며드는 창과 노란 커튼,
손님을 배려한 작은 디테일들이 마음을 편하게 했다.
조용한 계단 끝의 작은 창문 하나까지 단정했다.
잠깐의 휴식 후, 겉옷을 여미고 문을 나섰다.
언제 내렸는지도 모를 빗방울에 도시는 이미 젖어 있었고,
보도 위로 퍼지는 녹음의 향이 어쩐지 마음을 맑게 했다.
푸른 트램이 지나가는 반 옐라치치 광장(Ban Jelačić Square).
자동차들은 트램과 사람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광장은 그들의 발걸음과 바퀴 소리로 운율을 만들어냈다.
그 위로 퍼진 웃음소리와 거리의 음악이
이 도시의 심장처럼 고르게 뛰고 있었다.
‘자그레브는 잠시 머무는 도시’라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막상 마주한 이곳은 달랐다.
광장을 중심으로 펼쳐진 도심은
빠름 대신 여유가, 소음 대신 대화가 있었다.
스타벅스도 없고, 화려한 쇼핑몰도 없었지만
그 대신 사람들의 발걸음과 향긋한 커피 냄새,
조그만 꽃가게의 색깔이 도시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해가 지는 반 옐라치치 광장은
하루의 온기를 천천히 식히는 중이었다.
광장을 벗어나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하루의 빛과 그림자가 섞인 시간들이 길 위에 머물러 있었다.
이곳에서는 ‘보는 여행’보다 ‘머무는 여행’이 더 어울렸다.
걷고, 멈추고, 잠시 벤치에 앉아 하늘을 보는 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충만한 도시였다.
이 도시에는 보여주려 애쓰는 풍경이 없었다.
대신, 오래된 간판과 벽돌 틈의 담쟁이,
커피 향이 섞인 공기 속으로 스며드는 사람들의 일상이 있었다.
분주하지 않지만 살아 있는 도시.
그 잔잔한 리듬 속에서 딸과 나는
사랑스러운 골목을 엿보고,
그 길 위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그 길 끝에서 우리는 Spar,
이 지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마트에 들어섰다.
내일 아침, 그리고 렌터카와 함께할 긴 여정을 위해
우리 모녀의 입을 즐겁게 해 줄
이 도시의 ‘맛도리’를 찾기 시작했다.
차에 맛있는 걸 잔뜩 싣고,
어떤 곳이든 경치 좋은 곳에 내려 피크닉을 해도 좋고,
발길 닿은 곳에서 거하게 상을 차려도 좋겠다는 상상만으로도 벌써 웃음이 났다.
우유 하나를 고를 때도,
시리얼의 맛을 고를 때도 진심이었다.
“이건 맛있을까?”
“저건 우리 입맛에 맞을까?”
“아니, 일단 사자. 여행 중엔 뭐든 맛있게 느껴져.”
“그래도 혹시 몰라. 혹시 이건 너무 건강한 맛일까.”
도박 아닌 도박을 이어가고
둘 다 별 근거 없는 이유로 열심히 토론했다.
결국 우리 바구니엔
시리얼, 바나나 우유, 트러플 감자칩, 크루아상,
그리고 이름도 모를 현지 요구르트까지 가득 담겼다.
마트를 나설 때쯤,
우리는 이미 반쯤 여행자의 얼굴이 아닌,
이 도시의 일상을 사는 사람처럼 보였다.
“왜 마트에만 오면 이렇게 행복할까.”
딸의 웃음이 내게로 번졌다.
다행이다.
아침의 공기가 유난히 맑았다.
커튼 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방 안을 천천히 덮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기에 들른 돌라츠 시장(Dolac Market)에서는
붉은 파라솔 아래, 막 진열을 시작한 체리와 복숭아의
달콤한 향이 우리를 기분 좋게 붙들었다.
덤으로 얻은 살구에
걸음걸이 마저 살랑거렸다.
어제 마트에서 사 온 요구르트와 시리얼,
납작복숭아와 살구, 체리까지 곁들여
화려한 아침상을 차려 놓았다.
그리고 오늘의 계획을 다시 되짚었다.
아무리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해도
처음 해보는 렌트는 여전히 낯설었다.
게다가, 그것이 동유럽의 낯선 도시 자그레브에서라니.
나는 여전히 이런 부분에서는
침착하고 실수 없는 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엄마였다.
하지만 그 긴장 속에는
이제 곧 시작될 새로운 여정에 대한
묘한 설렘이 함께 섞여 있었다.
이제 곧 렌터카를 인수하고,
아드리아해를 따라 크로아티아의 남쪽까지 이어질 여정에
몸속 도파민이 요동치는 게 느껴질 정도 였다.
자그레브에 머물렀던 하루는 화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용히 마음의 속도를 되찾게 해주는 힘이 되어 주었고,
다시 달릴 준비를 시켜 주었다.
우리가 달릴 길의 끝,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까지 여정을 마치는 날,
우리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크로아티아의 시작과 마지막을
자그레브에서 맺으며,
그때 우리는 슬로베니아로 떠날 것이다.
그때 마주하게 될 이곳은,
지금과는 또 다른 얼굴을 하고 있겠지.
<아드리아해를 따라 우리가 만든 1000km의 지도>
드디어 시작된 렌터카 여정!
크로아티아 해안선을 따라 남부까지 이어지는 일주일.
차창 밖으로 쏟아지는 눈부신 풍경과,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를 마주하며
가장 자유롭고, 가장 유쾌했던 모녀의 시간을 담았습니다.
길 위에서 묵묵히 서로를 의지하며,
낯선 풍경 앞에서 진정한 동행이 되어가는 우리.
푸른 바다만큼 깊어진 관계 속에서
진짜 '자유'의 의미를 배워갑니다.
우리의 여정은 크로아티아 해안선을
따라 가장 아름다운 절정을 향해 질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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