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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 Feb 10. 2020

떠나지 않는 얼굴

보고싶은 사람

할머니가 곁을 떠난 지도 어느 덧 세 달이 되었다. 오래 아파하고 떠났기 때문일까 시간이 흘러도 그 영상은 흐려지지 않고 오히려 전보다 더 또렷해졌다.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얼굴을 또렷이 기억한다는 게 막상 좋지만은 않았다.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가 남긴 공기는 무서울만큼 무겁고 단단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각자의 삶이 있었고, 친절한 타인들은 우리의 슬픔과 여운을 돌봐 줄 여력이 없었다. 이따금씩 나는 꿈을 꾸었다. 푸르기보단 퍼런 색에 가까운 바다 한 가운데에서 머리만 내놓인 채, 실눈을 뜨고 보아야만 앞이 미세하게 보일 정도로 갈라진 어느 짙은 안개 더미에서 나는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단단한 정체모를 물체는 내 시야에 들어오고 나는 그것을 온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잡는다. 잡힌 그 물체는 이내 투명해지다가 사라진다. 그러면 나는 또 가라앉음을 느끼며 살려달라고 외친다. 이토록 반복적인 꿈을 계속 꾸었다. 꿈에서 깨어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지옥이 있다면 그 곳에 발을 담그고 질겁한 표정으로 재빠르게 도망쳐 나온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4주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는 더 이상 그 꿈을 꾸지 않았다. 잠자리가 편해지고 안정적인 새벽을 보냈다. 나의 시간은 빠르게 돌았고, 생활은 숨이 차게 분주했다. 바삐 살아온 탓에 머리만 대었다 싶으면 잠이 들었고 우습게도 나는 그것이 잠자리가 편해진 것이라 여겼다. 적어도 마음 한 켠에 보고싶은 얼굴 하나 정도는 떠올릴 공간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쩌면 원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악몽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고 제발 그 꿈을 꾸지 않게 해달라고. 나는 그것을 간절히 바랐고 그 간절함이 나의 손을 들어준 결과가 이 생활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여느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잠이 쏟아지는 오후의 한 자락에 나는 그날의 긴 하루를 책임질 정신력을 얻기 위해 커피머신 앞에서 커피를 한 잔 내리고 있었다. 전화기가 울렸다. 발신자는 '울엄마'였다. 엄마와는 평소에도 전화하는 것에 시간 제한을 두지 않는 편이라 큰 의심없이 바로 받았다. 곧장 하던 일을 미루고 병원으로 갔다. '301호...301호...301 301...' 잊지 않기 위해 속으로 계속 숫자를 되뇌이면서 병실을 찾았다. 엄마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전화였다. 교통사고라는 단어만 들어도 아찔했다. 이전에 두어 차례 엄마의 교통사고를 목격했던 적이 있다. 보험 처리와 차 수리는 둘째 치고 엄마의 심장과 호흡이 걱정이었다. 겪어 본 사고를 또 겪는 순간, 그 때의 트라우마가 번져 기억을 재생시키고 생각을 정지시킨다. 동시에 심장과 호흡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지게 된다. 나는 그 무엇보다 엄마의 심장과 호흡이 걱정이었다. 공포감과 놀람으로 인해 떨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 후로 나는 매일 병원에 출석 도장을 찍었다. 병실에는 다양한 연령의 다양한 증상의 사람들이 있었다. 왼쪽 팔이 부러진 60대 할머니(딸이 있고, 손자가 있다고 했으므로 할머니다), 독감에 걸려 심한 가래와 기침을 보이는 50대 아주머니, 갈비뼈에 금이 가 몸통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50대 아주머니가 그 안에 속했다. 병원을 매일같이 다니며 알게 된 것은 병원이란 곳은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이 담긴 하나의 작은 공동체라는 것이다. 요즘처럼 처음 보는 사람을 경계하고 쉬이 정을 주지 않는 사회에서, 이웃과 가벼운 목례만 할 뿐 말을 필요이상 섞지 않으며 옆집의 가족 구성원 수도 모르는 무관심을 넘나드는 사회에서 더욱이 볼 수 없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최소 50년 인생에 처음 보는 사이, 길 가운데에서 마주쳤다면 그냥 지나쳤을 사이, 잠깐 스쳤다 헤어지면 다시 볼 일 없는 사이. 그런 사이인데도 이상하게 병원에서 만나면 하루도 아닌 반나절 만에 친해진다. 친구를 사귀는 게 이렇게 쉽고 빨랐나 싶을 정도의 속도와 친화력이다. 그러고 나면 서로의 음식을 1/n등분을 해서 나눈다. 이사와도 옆집에 떡 하나 안돌리는 이 시대에 반나절 같은 공간 썼다고 그 사람에게는 빵 하나라도 1/n등분헤서 나눠준다니. 참 웃기는 상황이 아닌가.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내심 재밌는 상황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갔고, 심지어 나는 병실에 입원한 사람이 아닌데도 그들과 어느새 친해져있었다. 들어오면 '안녕하세요. 저 왔어요'라는 말부터 시작해 '적적하시면 TV 좀 틀어드릴까요?', '이 트로트 프로그램 요즘 재밌어요. 볼륨 높여드려요?','밥 시간이에요','저 이만 가볼게요'까지 내뱉는 말도 자연스러워지고, 그들과의 호흡도 어느 정도 잘 맞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 명씩 퇴원을 하기 시작했고, 병실은 새로운 사람들로 다시 채워졌다.


그 날도 어김없이 병문안을 왔다. 새로운 할머니 두분이 와 계셨다. 한분은 70대, 한분은 80대 할머니였다. 70대 할머니는 정정하신 편에 속했고, 걷거나 돌아다니는 데 어려움은 없어 보였다. 허리도 곧고 손발의 움직임이 빨랐다. 하지만 그 옆에 계신 80대 할머니는 달랐다. 지지대가 있어야 그나마 이동이 가능했고, 보호자가 필요해 보였다. 손발의 움직임이 자유롭긴 했지만 몹시 느렸고, 말씨도 느렸다. 순간 잊고 있던 그 영상이 떠올랐다. 이제는 희미했다. 그 사이 그 얼굴이 까마득해졌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믿을 수 없었지만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기억해내려 아무리 눈을 찌푸려보아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희미해서 떠오르지 않았다.


절대 못 잊을 거라고, 어떻게 사람이 마음 속에서 잊히냐고 그럴 수 없다고 자신하고 단정지었다. 내 오만이었다. 시간에 이끌려 나는 잊고 살았고, 하필 그 순간에 불현듯 그 존재가 떠오른 것이었다. 힘 없이 축 늘어진 팔 , 앙상하게 가늘던 다리, 살아 계셨더라면 비슷했을 나이, 느린 말씨. 이런 것들이 겹쳐보인 것이었다. 이런 순간이 오게 되면 나는 무척이나 담담할 거라고, 시간이 지나 어느 날 문득 그 얼굴을 마주하고 싶다 생각들면 언제든지 또렷하게 그 영상을 기억해낼 수 있을 거라고, 적어도 내 마음 속에선 잊혀질 일이 없을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지난 내가 미칠듯 미웠다.


마음에 사색의 공간을 비워둘 자리 하나쯤은 마련해 두었어야 했다. 오늘 밤 나는 다시 그 기나긴 어둠의 밤으로, 그토록 도망치고 싶던 그 꿈속으로 가 그 속의 겁에 질린 나와 마주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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