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누가 나의 파스타를 빼앗았는가
작가와 식食은 가깝다. 혹은 멀다. 어쨌든 먹어야 무언가를 쓴다는 점에서는 매일매일 가깝고, 그럼에도 굶는 일이 일쑤라는 점에서는 멀고도 멀다. 오늘은 금식에 나선 선승만큼 끼니와 먼 날이었다. 아침은 커피 한 잔, 점심은 뚜레주르 바게트 두 조각, 저녁은 아직. 정신없이 바빠서 배고픈 줄도 몰랐다가 하루가 다 가 버렸다. 그날그날 교정을 봐야 하는 원고가 밀릴라치면 밥 먹을 시간은 자체 반납이나 다름없다.
이럴 때는 시간에 따라 선택지도 달라진다. 모니터의 시계는 8시 13분. 열두 시가 넘어서 허기가 지면 모를까, 정신이 들었을(?) 때가 비교적 이른 시각이라면 갈 만한 곳은 많다. 근처에는 순대국밥집도 있고 백반집도 있다. 만두집, 퓨전 볶음밥집, 중식당에 혼자 먹을 수 있는 1인 파스타 가게도 문을 닫지 않았을 시간이다. 뭘 먹지, 뭘 먹을까? 휴대폰을 켜고 고민하다가 문득 바탕화면의 앱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결정했다.
아, 오늘은 브런치다.
꼭 브런치 연재 첫 메뉴라서 브런치로 정한 건 아니고.
브런치의 사전적 의미는 아침을 겸하여 먹는 점심 식사다. 지금 시간은 애프터 눈을 아득히 지났지만 그게 대수겠나. 대한민국의 카페 및 다이닝펍에서는 24시간 브런치 주문이 가능하다. 그러고 보면, 내가 처음 먹어 본 브런치도 점심을 한참 지났을 때였다. 나보다 두 살 연상이었던 그녀는 한강진역 근처에서 약속을 잡았다. 벌써 4년이 지났지만 메뉴도 정확히 기억난다. 나는 소시지 두 개와 스크램블 에그, 치즈와 버섯과 아스파라거스, 그녀는 피시 앤 칩스에 카프레제 샐러드. 이걸 기억하는 이유는 내가 처음 먹어 본 브런치라서일까, 그 때 그 사람과 이제는 만날 수 없게 되어서일까.
대충 옷을 주워 입고 집을 나가서, 쭉 걸어올라가면 역삼역이 나온다. 정확히는 국기원사거리 방향. 이 근처에는 언제나 괜찮은 카페가 있었고, 사라졌고, 다시 생겼다가 또 사라지곤 한다. 오늘 가려고 하는 브런치 카페도 그 중 하나다. 이름은 413프로젝트, 발코니로 스며드는 빛과 희미하게 부유하는 햇살 덩어리를 바라보면서 커피와 브런치를 즐기기에 딱 좋은 카페다. 가격은 일반 카페에서 판매하는 브런치보다 2,000원~3,000원 가량 비싼 정도. 대신 전문성, 플레이팅, 맛 모두 그만한 값어치는 한다. 예전에 한창 자주 올 때는 아보카도 스테이크 버거와 루꼴라 샐러드가 가장 맛있었다. 그리고 도착 직후, 나는 치명적인 난관에 봉착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오늘은 재고 소진으로 조기 마감이라서요."
원래는 몇 시에 마감이에요? 묻자 여덟 시까지가 라스트 오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방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슬금슬금 뭘 먹을까,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는 얘기다. 더 억울한 것은 날 제외하고 홀에 있는 모든 손님들이 식사 중이었다는 점이다. 올라가는 동안 테이블들을 훔쳐보자 조만간 재방문해야 할 이유가 눈과 귀와 코로 스며들었다. 나의 루꼴라, 파스타, 버섯, 그 외 기타 등등아, 일찍 오지 못해서 미안해.
내부의 분위기는 꼭 중세 성과 벽돌집을 합쳐 놓은 느낌이다. 벽은 전부 벽돌이고, 거친 질감의 시멘트 노출벽과 예쁘게 쌓인 벽돌들이 패턴을 형성한다. 얼핏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분위기는 건물 내외관을 가리지 않고 인테리어된 화분의 풀, 피어난 꽃, 따뜻한 주황빛 조명과 거꾸로 매달린 드라이플라워가 환기한다.
브런치의 꿈이 무산됐으니 시킬 건 음료뿐이다. 고심 끝에 주문한 생자몽 주스는 목이 긴 컵에 꽉 차도록 나온다. 내가 생과일주스에서 점수를 주는 기준은 딱 두 가지다. 첫째는 과육이 얼마나 많이 들어갔나, 둘째는 들어간 과육이 신선한가. 오늘 나온 생과일주스는 10점 만점에 8.5점 정도. 길거리의 테이크아웃 카페들을 보면 정말 주스로 사회환원을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사장님들도 계신데 이곳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물론 만족도를 느낄 만큼은 충분. 컵의 6~70%를 채운 과육은 신선하고, 씹는 맛도 제법 충실하다.
40분쯤, 카페를 구경하며 주스 한 잔을 다 마신 다음 일어섰다. 돌아오는 길에 어디라도 들어가서 저녁식사를 할까 했지만 기각. 저 주스 하나가 뭐라고 배고픔이 다 가셨다. 먹고 싶었던 음식 대신 다른 요리로 배를 채우는 건 혼밥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대신 조만간 종주할 플레이트 로드에는 꼭 제 2, 제 3의 예비 코스를 만들기로 했다. 평일 낮에 혼자 출격해서 이태원을 터뜨려 버릴 것이다. 특히 우X밥상, X카밥상, 우카X상 등등...
(이래 놓고 그날 새벽에 라면을 끓여 먹었다. 소설가는 언행불일치의 족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