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양봉양

이제는 지난 이야기 그러나 또 남은 이야기

by 갱구리

점심을 먹고 후식으로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철 이른 노란 참외를 조신하게 깎던 중이었다.

TV에서 요양원 노인학대 관련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요즘 것들은 지들이 모시기 싫으니까 병들고 힘없으면 불쌍한 노인네들 다 요양원에다 갖다 처넣는다"라고

짐짓 나 들으란 듯, 조금 전까지 명랑 온화하시던 그 기품은 어디 가고 아주 고약한 노인네 마냥 입매까지 일그러뜨리시며 힘주어 비아냥대셨다. 나는 요양원에 갈 생각이 추호도 없으니 네가 당연하게 내 노후를 책임지고 맡아야 할 것이다... 굳이 말 안 해도 맴에 새기고 있겠지? 하는 간접표현이신 게다. 그래... 아직 다 끝난 얘기가 아니지... 순간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우리 시부모님은 요양원에 들어가면 금방 죽는다는 생각이 아주 예전부터 확고하셨다. 갓 시집와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잘 보이고 싶은 마음만 한가득인 순진한 며느리에게 나중에 우리가 거동이 불편해지면 당연히 며느리인 네가 우리를 지극정성으로 모셔야 한다를 틈만 나면 주입시키셨었다. 자라며 듣고 배운 인간의 도리와 의무쯤으로 나 자신 역시 당연하게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순진하게도 그 당시의 나는, 세상 그 어떤 며느리보다도 진심과 성심을 다해 잘 모실 수 있을 것이다라고 스스로도 자신 있어했다.


결국 아버님께선 병석에 누우셨다. 결혼한 지 21년이나 지난해였고 나는 더 이상 순진하지 않았다. 더하여 지난 20여 년 동안 시부모님에게 받은 크고 작은 상처와 켜켜이 쌓인 원망으로 세상 그 어떤 며느리보다 진심과 성심을 다해 모시겠단 그때의 그 자신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내가 모실 자신도 마음도 없으니 요양병원으로 가시잔 말은 차마 꺼낼 용기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진심과 다른 의무 가면을 썼다. 우리가 아파 병석에 누웠을 때 네가 돌봐야 한다던 그들의 주입식 효부노릇에 세뇌된 듯 티 안 내고 꾸역꾸역 해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정년퇴임하시고 온 식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으로 시골 한적한 곳에 집을 얻으신 아버님 덕분에 시댁은 그야말로 깊은 산속. 네비에도 위치가 정확히 찍히지 않는 그런 외진 곳에 있다. 더 이상 운전이 불가능해지실 정도로 많이 편찮아지신 아버님을 대신하여 사사건건 우리가 두 분의 손발이 되어드려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거동이 불편해지시고 병원진료와 검사가 잦아지자 시댁에서 모셔오고 병원 스케줄에 함께 동행하고 다시 또 시댁에 모셔다 드리는 과정이 우리의 일상에 더해지자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가 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밤이고 낮이고 두 분이서 수시로 전화를 해대셨다. 평소 사이가 좋지 못한 터에 병간호까지 본격적으로 하시게 되자 시어머님의 짜증은 오롯이 내게 하소연을 더해 쏟아졌고, 여기가 아프다 저기가 아프다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해야 한다... 어쩐다... 한참 자는 새벽에도 아버님 역시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해대셨다. 결국 그냥 모셔오자 우리 집에서 내가 아버님 병시중을 들 테니 병원도 그냥 가까이서 모시고 다니자... 이렇게 힘들게 왔다 갔다 하며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해 대시는 시부모님을 상대하는 것보다 그 편이 오히려 낫겠다 여겨졌다. 당연히 힘들 것임을 해보지 않아도 알았지만 처해진 모든 상황과 사람들이 내게 무언의 압박을 주고 있었다.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모시고 올라오던 날,

차 뒷좌석에 베개와 이불을 마련해 편하게 누워 오시게 했다. 그리고 온갖 종류의 약과 아버님의 옷가지들을 한가득 챙겨 트렁크에 짐을 실었다.

어쩌면 나의 후회는 힘들게 차에 오르시던 아버님을 배웅하며 가서 며느리 말 잘 듣고 있으라며 홀가분하다는 듯 배웅하시던 어머님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이미 시작되었던 것 같다. 모셔오는 차 안. 밀폐된 그 공간에서 어쩔 수 없이 맡아지던 아버님의 역한 숨결과 장거리 오는 동안 뒷 자석 소변통에 떨어지던 아버님의 소변줄기소리와 그 냄새를 애써 외면해야만 했을 때, 집에 도착해 물 한잔 마시겠다 하셔 드렸던 보리차를 산 지 얼마 되지 않아 애지중지하던 거실 카펫에 그대로 다 흘리셨을 때, 그날 늦은 밤 소변과 대변이 뭍은 아버님의 이불을 욕조에서 애벌로 빨면서 후회는 점점 짙어져 갔다.


모시는 자체로 부담이고 전에 없이 힘이 드는데 아버님은 우리가 보기에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시며 우리를 더 난감 지경으로 몰아넣으셨다. 병원에서는 소변줄을 끼시라 권하는데 굳이 허접한 비닐봉지를 천 테이프로 고정해 쓰시겠다 황당한 고집을 부리셨다. 덕분에 하루사이 벌써 이불을 두 개, 내복바지며 윗도리까지 다 적셔놓으셔서 연신 빨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리 부부가 쓰던 안방은 단 이틀 만에 아버님의 소변냄새와 체취로 가득 차버렸다.

어느 날은 일회용 주사기를 한번 쓰고 버리기 아깝다며 놔두고 계속 쓰신다 고집해 퇴근한 아들과 언성을 높이며 싸우기까지 하셨다. 이불에 옷에 실수를 했으니 좀 씻으시자 해도 추워서 싫다고 또 고집을 피우셨다. 시골집이 아닌 우리 집에 모셨지만 낮이고 밤이고 한참 잠들어 있는 새벽에도 "애비야~~ 애미야~~" 수시로 호출을 해대시는 건 어쩌면 더 빈번하고 쉬운 일이었다.


소화가 안 된다 씹지도 못하시겠다 하여 드시는 모든 걸 갈갈갈~ 갈아서 죽처럼 해서 드렸는데 내가 해드린 죽은 맛이 없으신지 꼭 매번 남기셨다. 이것저것 정성을 쏟아 만든 죽이 끼니때마다 외면을 당하자 잘해서 드리고 싶은 의욕이 자꾸만 꺾였지만 약을 저렇게 많이 드시는데 못 잡수셔서 어떡하나 걱정은 되었다. 그래서 혹시나 전문 죽집에서 파는 죽은 입에 맞으실까 싶어 종류별로 사다가 새삼 다시 곱게 갈아서 데워 드렸더니 거짓말처럼 그릇을 싹 비우셨다. 일종의 허탈함이 스쳤고 그 뒤론 어떻게 만들어야 맛있게 드실까 힘들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냥 죽집에 가서 잘 만들어진 죽을 종류별로 사서 갈갈갈~ 갈아 데우고 끼니때마다 다른 죽을 번갈아 가며 드시게 했다. 그 와중 드시고 싶단 건 또 많으셨는데 원하시는 것을 해다 드리면 또 이내 못 먹겠다고 변덕을 부리셨다. 하루 종일 아버님 옆 붙박이로 삼시 세끼를 챙기고 중간중간 간식을 챙기고 약을 챙기고 원하시는 게 있을 때마다 "애미야~~~" 그 호출에 부응하기 위해 나는 안방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어야 했다. 모셔온지 단 일주일이 지났건만 7년 같은 시간이 흐르는 듯했다. 그리고 매 순간 후회가 되었다. 언제까지라고 기약도 없는 이 시간을 나는 과연 견딜 수 있을까... 무슨 자신감으로 모셔오자는 소리를 내 입으로 꺼내고 말았을까... 수시로 우울해졌다. 아버님과의 긴 하루를 겨우겨우 버티며 남편이 퇴근하고 들어오는 순간만 하루 종일 기다렸다.


나이 들고 병들어 자리에 누우신 그 맘이야 오죽할까... 잘해드려야지 생각하다가도 욕조 안에 빨랫감을 넣고 역한 소변냄새 가득한 애벌빨래를 하다 보면 순식간에 감정이 변했다. 기저귀만 입으신 앙상한 맨다리를 며느리 눈은 안중에도 없이 거만하게 꼬고 드러누우셔 선 손가락으로 이래라저래라 틱틱 배려 없는 말투로 뭔가 요구하실 때는 내가 이러고 수발들고 있는 게 당신은 그렇게 당연하십니까. 하나도 고마울 일이 아닌 것인지요. 뭐가 그리 당당하고 당연하시냐... 조금의 미안함도 민망함도 없는 것입니까... 꼬고 있는 그 다리를 탁 쳐내고 살벌하게 한번 노려보고 싶은 욕구까지 치밀어 오를 때도 있었다.

결혼하고 얼마 안 있어 시작되었던 남편 병간호와 아이 둘 독박육아. 달에 한 번 숨 쉬러 오신다며 단 한 달도 안 거르시고 일주일에서 열흘쯤 우리 집으로 올라와 계시던 시어머니, 중간중간 일이 있을 때마다 시누이들도 시고모도 걸핏하면 우리 집으로 다 모여드는 통에 나는 이미 그런 시집살이에 진력이 나 있던 터였다. 하다 하다 이제는... 시아버지 병간호를, 시어머니가 버젓이 건강하게 살아계신데도 불구하고 며느리인 내가 하고 있는 이 현실이 서글프고 짜증스러웠다. 사이가 나빠도 아픈 남편 나에게 맡겨놓고 걱정은 되셨는지 아침저녁으로 전화해 이거 살펴라 저거 살펴라 전화로 훈수질하는 시어머니도 밉고 역시 전화로 이런저런 훈수질 2를 시전 하던 형님들도 다 미웠다.

가슴 저 아래 켜켜이 쌓여 있던 시댁식구들에겐 당연하고 나에게는 지지리도 힘들었던 지나간 모든 시간들과 사건들이 일순간에 다 부유물처럼 떠올랐다. 왜 항상 내가 전하는 선한 마음과 배려들은 그들에게 당연하게 가 닿는가... 인정받지 못한 마음들이 돌처럼 굳어 다시 무겁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버겁고...

귀찮고...

성가시고...

힘들고...

짜증 나고...

더럽고....

비위상하고...

나는 이 짓을 왜 자처하고 있는가.....

모든 게 당연한 시부모보다

옆에서 방관하며 훈수 두는 시누이들보다

내게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어주지 못하는 무력한 남편보다

희생을 자처하는 내 자신이 제일 미웠다. 안쓰러웠다.




"크허~헉 크허~헉... 컥!!"

곧 어찌 될 것만 같은 시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 그냥 저대로 편안히 숨을 거두신다면 모두가 편할 것 같단 생각이 잠시 들었다 나가기까지 했다. 다음 날 새벽 한참 자고 있는데 "애미야~~애비야~~" 아버님이 또 호출을 하셨다. 당장 시골로 데려가달라셨다. 이곳은 너무 답답하시다며 탁 트인 시골집이 더 편할 것 같다셨다. 그 새벽에 달게 자고 있던 아들, 며느리를 깨워 또 황소고집을 부리셨다. 전날 낮에 잠깐 했던 망령된 내 생각을 들킨 것인가 괜히 가슴이 쪼그라들었다. 무엇이 불편하신지 왜 그러시는지... 시골에 다시 가 계시면 병원 오가기 불편하시다 우리가 너무 힘이 든다... 만류해도 기어코 시골에 데려다 달라고 하셨다. 그 새벽에 또 아들과 언성을 높이며 싸우셨다.


아버님을 집에 모시게 된 즈음 남편의 직장 업무도 완전히 바뀌어 새로 배우고 익혀나가느라 머리가 아픈 중이었기에 스트레스가 안팎으로 쌓일 대로 쌓였있었다. 수시로 맞닥뜨리는 아버님의 고집에 남편 역시 부드럽게 대처할 여유가 남아있지 않았다. 다시 또 모셔오고 모셔가고 하는 수고를 하더라도 시골집에 데려다 달라는 아버님의 고집을 슬기롭게 꺾지 못했다.


그렇게 아버님은 우리 집에서 고작 21일을 계셨다. 아버님이 머무시다 떠난 안 방을 나는 곧 멸균실로 만들 것처럼 박박 쓸고 닦고 환기를 시키며 소독하고 청소를 했다. 며칠 뒤 또 병원외래가 잡혀있어 다시 안 오실 것도 아닌데 머무시기 이전으로 되돌리려 안간힘을 썼다. 다시 또 아버님의 체취와 소변냄새가 진동을 할지라도 당장은...




다시 시골집으로 모셔가자 어머님은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하셨다. 그리고 내가 모시는 동안 서운했던 것들을 아버님께 들으셨는지 이다음에 당신도 그런 대접(?)을 받을 것 같으셨는지 노기를 띠고 질책하셨다.

죽을 매번 사다 드시게 했느냐. 어찌 방문을 안 열어놓고 닫아만 놨느냐. 애들이 한 번도 할아버지 방에 들여다보지를 않았다... 큰 애가 와서 다리 주물러줬던 것이 그렇게 좋으셨단다. 너도 좀 아부지 다리를 주물러 드리고 마사지도 해드리고 하지 그랬냐.....................................................................................................


내가 해드린 죽은 매번 남기셨잖아요. 그래서 사다 드린 죽은 한 번도 예외 없이 맛있게 다 드시길래요. 그리고 방문을 열어놓으면 춥다춥다하시니 닫아드렸지요. 애들이 학교 간다, 다녀왔다고 할아버지 방 열 때마다 주무시고 계셨잖아요. 애들이 고3, 고1 뭐 그렇게 한가롭게 아픈 할아버지랑 눈 맞추고 이야기 나눌 여유도 없었고 솔직히 냄새나고 덥다고 들어가기 싫어라는 했어요. 퇴근하고 들어오면 아버님 방에 가서 좀 이야기도 하고 시간을 보내라고 해도 아드님마저도 아버님 고집과 맞서기 짜증 난다고 손사래 쳤더랬어요.

큰 형님요? 하루 오셔서 다리 주물러드리고 살갑게 했던 거요? 형님은 아버님 대소변 뭍은 이불빨래를 하루가 멀다 하고 하지 않으셨잖아요. 삼시세끼 책임지지 않아도 됐잖아요. 딸이니 기저귀 찬 아버지 모습 별 상관없이 살갑게 다리 주무르고 할 수 있으셨겠죠. 낮이고 밤이고 항상 대기, 집 안에 붙박이 안 해도 되시잖아요.


노기 띈 시어머님의 질책에 차마 맞서지 못하고 속으로만 저 말들을 삼켰다. 바보병신같이...!!!

살며 늘 그랬듯 나의 최선은 시부모님의 마음에 만족스럽게 가닿지 않았다. 이번에도 쉽지 않은 결심을 하고 나름의 최선을 다했지만 역시나 성에 차지 않은 유감을 어김없이 또 여과 없이 표현하셨고 그동안 내가 필사적으로 보낸 시간들을 별 의미 없는 시간쯤으로 치부해 버리셨다.




그 뒤로 두어 달 동안 병원외래로 몇 차례 더 힘들게 병원을 모시고 다녔고 치료가 길어지면 입원도 하셨다가 퇴원을 하셨다. 그러는 동안 아버님은 섬망증세까지 보이셨고 급기야 죽 한 숟갈도 넘기지 못하시게 되었는데 이내 어느 새벽 갑자기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르고 아버님의 유품을 정리하는 동안 허무하고 슬프고 애달팠다. 때때로 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단 사실이 현실로 와닿지도 않았다. 나중 우리의 끝도 이렇겠구나... 삶에 회의마저 들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어머님도 나도 남편도 갑자기 한없이 가벼워져 버렸다는 것을...!!! 마치 어깨에 둘러맸던 언제 벗을지 모를 크고 무겁고 버겁던 짐을 일순간 벗어 내던진 기분이었다. 집안에 드리웠던 우울하고 검은 구름이 어느새 싹~ 걷히고 밝고 환한 하늘이 온통 벽을 두른 듯도 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올 해로 4주기가 되었다.

어머님은 여전히 예전 아버님과 불화했던 기억들을 가끔씩 소환하셔서 이제는 돌아가시고 옆에 안 계신 아버님 흉을 아버님이 살아계실 때처럼 노골적이고도 신랄하게 해대시고

"죽으면 고만이지.

죽은 사람만 불쌍하지.

살아있을 때 잘해야지 뭐... 죽고 난 다음에야 무슨 소용이야..."

... 흉을 보시는 건지 그리움을 표현하시는 건지 알 수 없는 말씀들을 이어하시기도 하신다.


병석에 누우시면 며느리인 내가 시중을 들것을 당연하게 요구하시는 어머님은 올 해로 86세가 되셨다. 다행히 아직 정정하시다. 지역 게이트볼 최고령 선수이시고 가끔 동네 어르신들끼리의 경기에는 심판도 보신다. 제주도로 남해로 열리는 게이트볼 대회마다 참가하시는 전국구 회원이 시기도 하다.

마을 어르신들이

"아이~ 형님은... 100살이 뭐야 200살까지도 너끈히 사시겠어~"

한다며 자랑이시다. 나는 좋다. 100살이시든 200살이시든 건강만 하시다면야 감사할 따름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내 신세를 위해서도 어머님은 반드시 건강하게 사셔야 한다고 오늘도 나는 이기적인 기도를 한다. 가끔은 정말 어머님이 200살까지도 사실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는데... 가만가만 그렇게 되면 내 나이가 어떻게 되지? 헤아려보다... 내가 먼저 죽겠는데??... 그런 생각까지도 한다. 그렇다 해도 여하튼 건강하시기만 하면, 그리고 이 며느리의 봉양을 당연하게 요구하지 말아주신다면 좋겠다. 당연하게 여기시니 맘이 상하는거다. 고생한다 수고한다 고맙다 표현해 주시고 내 수고를, 마음을 알아만 주신다면야 착한 이 며느리는 또 기꺼운 봉양을 드릴 수 있음인데...

정작 시어머님 앞에서는 말도 못 꺼내고 여기 브런치에다 긴 하소연 중이다. 대놓고 말씀드릴 그날을, 용기를.... 구해본다.



쓰다보니 그때 그 감정들에 새삼 매몰되어 심장이 빨리 뛰기도 했다. 지난 이야기이지만 앞으로 남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남은 이야기는 따뜻하게 쓸 수 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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