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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킨무무 Jun 13. 2024

제국주의라는 이름의 원죄

<야만인을 기다리며>_J.M. 쿳시, 문학동네






"고통은 진실이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의심해야 한다."p.14


"그들은 오직 육체 속에서 육체로서 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내게 보여주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온전하고 정상적인 상태에 있을 때에만 정의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머리를 쥐어잡히고 파이프가 목구멍 속으로 쑤셔 넣어지고, 그 속으로 소금물이 부어져 기침을 하고 구역질을 하고 몸부림을 치고 토하는 상황이 되면, 언제 그랬느냐 싶을 정도로 빠르게 정의에 관한 생각들을 깡그리 잊어버리는 육체로서 말이다."p.190


책의 주인공은 어느 제국의 변방기지에서 근무하는 늙은 치안판사로 그는 '자신만의 제국' 속에서 평화롭고 안온한 삶을 살아간다. 어느 날 제국에서 파견된 졸 대령은 기지 외부의 유목민들을 제국을 공격할 군대 조직을 갖춘 야만인, 즉 적으로 규정하고 봄이 되면 그들을 모두 토벌하겠다 선언한다. 야만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치안판사는 무고한 사람들이 고문받고 야만인으로 조작되는 사실에 분노하지만 그렇다고 졸 대령에게 대놓고 항명할 정도는 아니다. 그는 졸 대령이 벌여놓은 일을 뒷수습하며 애매한 위치에서 애매한 태도로 정의와 품위를 이야기한다.


그가 고문으로 장애를 얻은 소녀를 동정하고 구하는 것, 그녀를 가족에게 데려다 주기 위한 고된 여정, 기지로 돌아와 적과의 내통죄로 고문을 받고 자신 또한 야만인 취급을 받는 것은 제국주의자로서의 일종의 속죄의식이다. 그는 제국주의의 피해자와의 완벽한 화해를 원하지만("나는 네가 나와 함께 도시로 돌아가길 바란다. 스스로 선택해서 말이야."p.119) 확언컨데, 피해자와 가해자가 화해할 길은 없다.("싫어요, 저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p.119)


그는 반제국주의를 외치지만 결국엔 제국에 속한 자이다. 또한 잔혹하고 무자비한 졸 대령을 비난하면서도 '자신만의 제국'의 평화는 "아무리 비싼 대가를 치르더라도"p.28 지키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평화를 위한 대가는 야만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점에서 그는 모순적인 인물이다. '정의와 양심을 논하는' 제국주의자라니, 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란 말인가. 그는 이제 버려진 그의 제국에서, 지치고 무력한 상태로 야만인을 기다리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에게 희망이 있다면 야만인들에게 있을 것이며 절망이 있다면 그 또한 야만인들에 의해서일 것이다. 이처럼 제국주의의 원죄는 씻어낼 수 없는 것이며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 죄책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문명과 야만에 대한 정의도 생각해 볼만한 문제다. 작품에 의하면 "문명은 야만인이 가진 미덕들을 타락시키고 그들을 종속적인 존재로 만든"p.66다. 그렇다면 문명인과 야만인들 중 무엇이 더 옳은 존재인가. 느닷없이 야만인들의 평화를 깨고 쳐들어와 자신이 이 땅의 주인이라 선언한 문명인, 생김새만으로 차별과 경멸을 숨기지 않는 문명인, 자신들의 기지를 지키기 위해 온갖 모략과 유언비어, 고문을 서슴치 않는 문명인. 인간의 품위가 문명인과 야만인을 가르는 기준이라면 더 품위 있는 자는 어느 쪽인가?


(+) 초현실주의적인 환상과 꿈을 묘사하는 글빨에 무릎을 꿇고, 작가님의 셀피에 머리를 조아립니다. 쿳시 업고 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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