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인간을 사육하는 법
<사육>_오에 겐자부로
홍수로 인한 산사태로 읍내로 가는 큰 길이 끊긴 고립된 마을에 적의 비행기 한 대가 추락한다. 나를 비롯하여 마을 아이들에게 있어 "전쟁이란, 마을 젊은이들의 부재와 가끔씩 집배원이 가져다주는 전사 통지서에 지나지 않았" p.95 기에 어른들이 생포한 검둥이 군인은 적병이 아닌 "사냥감"p.101과 같은 짐승에 불과한 존재였다. 그러므로 읍내에서의 지시가 있기 전까지 검둥이 군인을 기르게 되었다는 소식에 아이들이 환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축처럼 온순한 검둥이 군인과의 묘하고 평화로운 교류에 온 마을이 익숙해질 무렵 읍내로 포로를 이송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자 나는 자랑스러운 우리의 동물을 잃을까 초조해지고 슬퍼진 나머지 어른들보다 빠르게 그를 찾아가 사실을 알린다. 순간 그는 나를 인질로 삼아 지하 창고로 들어가 어른들과 대치한다. 본디 나의 포로였던 검둥이 군인이 거꾸로 나를 포로로 잡은 것이며 그럼으로써 주인의 우위를 잃고 그와 내가 동일한 사람이라는 것, 심지어 지금은 그가 나를 압도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 나는 수치를 느끼며 절망한다.
검둥이 군인의 나의 목숨을 이용한 시위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은 나를 구하기보다 명령수행완수를 선택한다. 도끼를 든 나의 아버지는 급기야 지하창고의 뚜껑을 부수고 들어와 내 왼손을 끌어올려 자신의 머리를 방어하려 한 검둥이 군인의 머리를 망설임 없이 내려친다. 왼손을 잃고 죽다 살아난 나는 '검둥이 군인과의 전쟁'으로 인해 "전과는 완전히 다른 괴물로 변한"p.144 어른들에게 혐오와 공포를 동시에 느끼며, 본인 역시 그 '전쟁' 전과는 완전히 다른 인물로 성장(?)한다.
"나는 이제 아이가 아니다, 라는 생각이 계시처럼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언청이와의 피 튀기는 주먹질, 달밤의 새 후리기, 썰매 타기, 새끼 들개, 그 모든 것은 아이들을 위한 거다. 그런 세계는 더 이상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세계가 되어 버렸다."p.146
"전쟁, 피투성이로 뒤엉키는 거대하고 긴 싸움, 지금도 그것이 계속되고 있는 거다. 먼 나라의 양 떼나, 잘 다듬어 놓은 목초지를 휩쓸어 가는 홍수처럼, 그것은 우리 마을 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여기까지 와서 나의 손을 짓이겨 놓았다." p.147
어디서 숨을 쉬어야 할지 애매할 만큼의 어마어마한 장문에 비유가 덕지덕지 붙었는데 그 묘사가 매우 생생하고 끈적한 날 것의 느낌이다. 역시 작가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느낀다. 또한 전쟁을 겪으며 변화하는 인간 군상을 적나라하고 파격적으로 보여준다. 짧은 이야기인데 줄거리가 이렇게 튀어나갈 줄 예상치 못했다.
제목의 <사육>은 '나의 검둥이 군인 사육기'이자 동시에 '전쟁의 소년 사육기'로 읽힌다. 일종의 성장 아닌 성장소설이라고 할까. 인간과 전쟁에 대한 상념으로 진한 여운을 남기는 이 작품이 오에 겐자부로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데에 이견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