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가 회복되었음에도 그는 은근히 일을 하기 싫어했다.(...) 쾌활함이 그에게 되돌아왔고, 평소의 입심이 오랜 빈둥거림 속에서 한층 날카로워졌다. 그는 살아있다는 기쁨과 함께 팔다리를 내던지고 힘줄을 달콤한 잠에 빠뜨린 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즐거움을 새롭게 깨달았다. 그것은 회복기를 틈타서 그의 살 속으로 파고들어 애무로써 그를 집어삼키는 게으름의 완만한 정복과도 같았다. 그는 인생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면서, 왜 아름다운 인생이 언제까지나 지속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쓴 웃음과 함께 원기 왕성하게 집으로 돌아왔다."p.177
"당연히 파티와 일은 양립되지 않았다.(...) 함석장이는 일을 팽개쳤고, 그때부터 며칠이고 몇 주일이고 술집순례를 계속했다. 아! 그것은 정말 엄청난 순례요, 동네의 모든 술집에 대한 일제 점검이요, 아침에 마신 술이 정오에 깨면 다시 저녁에 대취하는 향연이요, 축제의 초롱인 양 마지막 촛불이 마지막 술잔과 함께 꺼질 때까지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끝없이 계속되는 잔의 순회였다."p.367
어릴 적 껌을 사면 껌종이에 부록으로 미니 수수께끼 같은 것이 인쇄되어 있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만난 작가가 바로 에밀 졸라다. 작가 중에 가장 패륜적인 이름으로 한국에서 유명하다고 할까. 아, 잊을래야 잊을 수 없었던 그의 이름. <목로 주점>은 그의 이름만큼이나 파격적인 작품이다.
19세기 프랑스문학 하면 날고 기는 많은 대문호들이 떠오르는데 우선 읽어본 작품 중에서 최고는 아무래도 발자크였다. 이번에 <목로주점>을 읽고 최애작가 인벤토리를 늘려본다. 둘 다 호흡이 매우 길고 수다스런 만연체 문장을 주로 쓰는데 발자크의 현학적인 매력에 반해 졸라의 대담 발칙하고 적나라한 매력이란! 이 넘치는 생생함이라니, 아주 극적인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달까.
왜인지 mbti 유형 중 '쌉T' 일 것 같은 졸라의 묘사 테크닉은 작품의 이러한 다큐력에 큰 영향을 미친다. 작품 초반의 파리 북부의 시커멓고 칙칙한 회색 동네에서 묘사되는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들의 출근 행렬은 마치 sf소설 속 그것을 보는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뿐만이랴, 세탁장에서의 개싸움(그야말로 날것의 개싸움이다!)과 결혼식 행렬의 루브르 박물관 관광 장면은 4d관에서 영화를 본 것 마냥 충만한 감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이처럼 주인공 제르베즈의 근면과 정직으로 쌓아 올리는 전반부의 성공과, 방종과 나태로 무너져내리는 후반부의 몰락을 극렬하게 대비시키며 한 여성의 인생을 그린 이 작품은 (긍정적인 의미로) 변태적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세밀하면서 농도가 짙은 작가의 테크닉을 보여준다. 가난묘사는 에밀 졸라가 우주최강이다, 라는 주장에 이견 있는 사람?
어떤 이는 그의 작품이 너무나 지독한 현실만을 그릴 뿐, 현실 너머의 다른 무엇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비판한다. 이른바 리얼리즘, 혹은 자연주의의 한계라는 것인데 개인적으로는 작가가 명시적으로 이상향을 보여줘야 하는가, 에 대해 의문이 든다. 실제로 있음 직한 세계를 만들어 보이는 것이 작가의 미덕이고 그 너머를 생각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졸라의 작품은 잘 짜여진 예술문학이면서 동시에 시대의 슬로건이 되고자 자청하는 실험문학이기도 하다. 유전적 형질과 사회적 환경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이 사조에 온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배척하지도 않는다. 결과론에 불과하겠지만 인간은 그러한 요소에 나약한 것이 사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 알콜중독자 아버지와 다른 길을 가는 '구제'같은 이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치 운명론과 자유의지론의 창과 방패의 싸움 같은 것이나 논쟁 그 자체가 유익하다고 본다. 인간은 나약하면서 위대하고, 천박하면서 동시에 고귀한 존재이니.
만일 평생 동안 책을 단 한 권만 읽어야 한다면 이 작품을 추천하지는 않을 것이다. 꿈도 희망도 없는 이 올레드 티비마냥 생생한 세계는 나약한 인간에게 악몽이 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한 번쯤은 졸라의 목로주점 세계관에 들어가 보길 권한다.(특히 본인이 주정뱅이라면 더욱!) 그곳에서 짐승으로 전락하여(주인공은 종국에 개집에서 죽는다.) 죽지 않을 길을 우리는 (닥터 스트레인지의 1400만 번의 경우의 수 계산처럼) 최후에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은 지옥에서 희망을 보는 아이러니한 짐승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