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방인으로, 인간에서 신으로
<이방인>_ 알베르 까뮈
“오늘 엄마가 죽었다.” 는 유명하고도 충격적인 문장으로 소설의 시작을 선언하는 <이방인>. 개인적으로는 작가 알베르 까뮈가 29살에 집필한 작품이라는 게 더 충격적이다! 하지만 동시에 어떻게 그렇게 문장 하나하나가 힘이 있었는지, 역시 젊은 피 때문이었구나, 하는 수긍도.
1부는 알제리의 밝은 해변과 육체적인 감각이 강조되어 마치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온도와 습도, 채도를 떠올리게 한다. 그만큼 젊음과 생의 감각이 생생하고 아름답다. 반면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소리와 같(p.97)”은 불운한 살인 이후 2부로 넘어가면 삶과 대비되는 죽음, 그것도 사형이라는 인위적인 죽음에 대한 주인공의 사유가 대단히 흥미롭다. 할 말이 아주 많지만(!) 그중 인상적인 몇 가지 장면만 발췌하여 인용해 본다.
“당신은 그럼 아무 희망도 없는 건가요? 죽으면 완전히 죽어 없어진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는 건가요?” 나는 “네.”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를 불쌍히 여긴다고 그는 말했다. 그건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저 그가 귀찮아지기 시작한다는 느낌밖에 없었다.(p.170)“
인간이 과학을 신봉해 온 이래로도 종교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인간에게 죽음의 영역을 미지의 세계로 남겨두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오래된 세포의 붕괴’에 다름 아니다는 것을 알지만 인간은 누구나 그 이상의 의미를 삶 속에서 찾고 싶어 한다. 그 본능을 거부하는 뫼르소와 그를 불쌍히 여기는 사제, 누가 더 불쌍한 걸까?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전 생애 동안, 내 미래의 저 깊숙한 곳으로부터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 오지 않은 세월을 거슬러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었어.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 난달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야.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p.175)”
인간은 필멸의 운명, 혹은 생의 유한성으로 인해 일상의 작은 행복들을 기꺼이 여기고 인연의 짧은 만남을 아쉬워한다. 하지만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런 사사롭고 사소한 것들은 무의미하다는 주인공의 시선은 마치 신의 그것과도 같다. 필멸의 운명이 아닌 자에게는 생에 있어 감동도 감흥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흐르는 시간, 그것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기에 이 문장들이 가지는 역설의 힘을 느낄 수밖에.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아서 마침내 그토록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도록, 내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p.177)”
삶과 죽음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사랑과 증오는 무엇이 다를까? 죽음으로 비로소 완성되는 인간의 삶이기에 죽음을 앞두고 있다 하여 불행할 이유는 없으며, 끝을 알기에 그만큼 더 현재를 살아야 한다는 뫼르소의 역설은 동양철학의 성불자, 신이 된 자와 닮아있다.
신의 입장에서 30년의 생이든, 100년의 생이든 한낱 짧은 인간의 생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으며 그 찰나의 순간에 느끼는 감정이 행복이든 불행이든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끝내, 자신의 삶에서 빠져나온 이방인 뫼르소의 행복은 과연 보통 인간의 행복과 같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필시 신의 행복은 인간의 행복과는 다른 정의를 가지고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