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 다음으로 제일 유명한 서간체 소설이 아닐까. 지금에 와서 다시 읽어보니 완벽한 로맨스소설로 읽힌다. 신데렐라 스토리의 원형에 말괄량이 삐삐와 빨강머리 앤을 합쳐놓은 것 같은 귀엽고 똑똑한 여주인공과 우직한 질투쟁이 츤데레(편지에 지미가 등장하면 직접 주디를 찾아가거나 선물을 안긴다던지, 자신의 지원을 주디가 거부하는데 두려움을 느낀다던지)이나 구혼에 실패하자 홀로여행에서 병을 얻어온 귀욤미가 있는 부유한 남주인공의 조합이라니.
이야기 주요 줄기가 주디가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내용이기에 여성의 사회, 정치 참여 등 페미니즘의 요소가 자연스레 녹아있다. 고아원 출신으로 초반에 주눅 들어 있던 주디가 점차 성장하며 내세우는 반짝거리는 인생론도 힐링요소. 일방적인 주디의 편지 세례 형식이라 상상할 여지가 많은 것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키워서 잡아먹는(?) 장르의 개인적 불호요소와 14살의 나이 차 때문에 지미 맥브라이드를 응원했건만, 주디가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흑흑.
더불어 비슷한 시기의 프랜시스 호즈슨 버넷의 <소공녀>도 비교해서 읽어봤다. 두 작품 모두 어릴 적 좋아하던 작품이기 때문인데, 어른 되어 읽으니 사뭇 감상이 다른 게 흥미롭다.
<키다리 아저씨>가 그야말로 자유와 평등을 좇는 아메리칸 드림의 긍정적 요소(올바른 마음으로 성실하게 공부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단다.)가 가득한 미국스러운 소설이라면 <소공녀>는 인도라는 식민지에 대한 환상(주인공의 시련을 이겨내게 하는 풍부한 상상력과 배려심은 사실 부유함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 그리고 그 부유함의 원천은 식민지이며그녀가 보여주는 배려는 없는 자를 향한 시혜에 가깝다.)과 특유의 계급주의(사라와 함께 하녀생활을 한 베키는 내내 그녀에게 존칭을 쓰고 마지막까지 하녀로 사라를 따라나선다.)가 진하게 배어있는 그야말로 영국스러운 소설이더라.
""가난한 자들을 이 땅에 만드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자비로운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가난한 사람들은 일종의 쓸모 있는 가축이라는 거잖아요. 제가 이렇게 나무랄 데 없는 숙녀로 자랐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예배가 끝나는 대로 강단으로 뛰어놀라가 주교님께 제 생각을 똑똑히 말했을 거에요."p.54
"아마 봄이 오고 두꺼비가 나오기 시작하니까 다시 그 시절의 장난을 치고 싶은 본능이 꿈틀거리나 봐요. 하지만 이제 두꺼비를 잡지 않아요. 이유는 단 하나, 그걸 못하게 하는 규칙이 없기 때문이지요."p.88
"인생에서 인격이 필요한 건 큰 문제가 생겼을 때가 아니에요. 큰 위기가 닥쳤을 때 용기를 가지고 일어서서 비극에 맞서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일상의 사소한 짜증거리들을 웃음으로 넘겨야 할 때, 바로 그런 때 정신력이 필요한 거죠. 전 앞으로 바로 그런 정신력을 키울 겁니다. 인생을 '최대한 능수능란하고 정정당당하게 승부해야 하는 게임'정도로 여기려고 해요. 그래서 져도 어깨 한 번 으쓱하고는 웃어넘길 거에요. 이길 때도 마찬가지고요."p.93
"엄청나게 커다란 기쁨만 중요한 게 아녜요. 작은 것에서부터 큰 기쁨을 끌어내는 것, 그게 바로 행복의 참된 비결이고, 그러려면 바로 현재를 살아야해요! (...) 저는 집약농법처럼, 매 순간을 즐기며 살아갈 거에요. 또 매 순간을 즐기는 내 자신을 지각할 거에요. 사람들은 대부분 살아가는 게 아니라, 경주를 해요. 오직 저 멀리 지평선에 놓여있는 결승점에 도달하려고 안간힘으로 달리는 거에요. 그렇게 한참 달리다 보면 숨이 턱까지 차서 헐떡거리게 되고, 그러면 아름답고 평화로운 전원 속을 지나오면서도 그 풍경을 다 놓치고 말아요. 결승점에 이르러서야 깨닫죠. 자신들은 늙고 지쳐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결승점에 도달하느냐 마냐는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을요. 저는 길가에 앉아 소소한 행복을 많이 쌓기로 했어요."p.244
"그렇지 않다는 걸 분명히 알면서도 하늘을 향해 눈알만 굴리면서 "이게 다 신의 뜻이야"하고 중얼거리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치밀어요. 겸손이든 체념이든 뭐라고 부르든, 그건 그저 무기력한 타성에 불과해요. 저는 좀 더 투쟁적인 종교가 좋아요!"p.278
"제가 왜 그렇게 우중충한 인생관을 피력했을까요. 제가 젊고 행복하고 생기가 넘친다고 서둘러 바로잡습니다. 아저씨도 그러시리라 믿어요. 젊음은 나이가 아니라, 정신이 얼마나 생동감 넘치는지에 달려 있잖아요. 그러니 아저씨가 백발이라도 여전히 소년이실 수 있어요."p.279
"목사님은 감정을 희생하면서까지 지성을 개발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지만, 제 생각에는 빈약하고 무미건조한 설교가 아닐 수 없도다.(피프스의 말투가 또 나오네요.) 미국의 어느 지역 출신이든, 캐나다에서 왔든 무슨 종파 든 간에 목사님들의 설교는 하나같이 다 천편일률적이에요. 왜 목사님들은 남학교로 가서 남학생들에게 '지나치게 머리를 쓰느라 남성적인 본성을 망가뜨리지 말라'라고 당부하진 않는거죠?"p.285
"갓 대학에 왔을 때는 남들은 다 누린 평범한 유년시절을 저 혼자만 강탈당한 것 같아 몹시 분했어요. 하지만 이제 아니에요.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고아원 생활을 했기에 한 걸음 물러나 인생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제게는 풍족하게 자란 사람들에겐 부족한, 세상을 보는 안목이 생겼어요.
제 주위엔 자신이 행복한지도 모르는 친구들(예를 들면 줄리아)이 많이 있어요. 행복에 젖어 있다 보니, 행복을 느끼는 감정이 둔해진 거에요. 하지만 저는, 제 인생 매 순간순간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어요. 아무리 힘든 일이 닥쳐도 계속해서 행복하다고 생각할 작정이에요. 힘든 일 따위는(그게 충치라 할지라도) 흥미로운 경험으로 여기고 어떤 느낌이 드는지 기꺼이 받아들일 거에요. '내 머리 위 하늘이 어떤 모습이더라도, 나는 운명을 받아들일 용기가 있다.'"p.2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