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밀하게 말하자면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으로 이어지는 연작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는 2002년에서 2005년까지 세 작품을 따로 썼다 밝히고 있다. 하지만 작품을 각기 따로 보기보다는 인물과 시간선이 모두 이어지기에 3년에 걸쳐 하나의 이야기를 쓴 것 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기본적으로 이 이야기는 폭력에 대한 것이다. 처음에는 가부장적 제도와 사회적 이데올로기 아래 순응하며 살아가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말하지만 이야기의 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생명 그 자체의 폭력성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린다.
첫 번째 파트 <채식주의자>의 영혜는 철저하게 남편의 시선으로 기술되는 무색무취의 여성이다. 개성이나 자아표출 같은 단어와 가장 거리가 먼 것으로 묘사되는 그녀는 돌연 꿈으로 인해 육식 중단을 선언하나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가부장적 아버지가 그녀의 입에 강제로 고기를 쑤셔 넣는 장면이나 그로 인해 자해를 시도하는 연달은 씬은 폭력의 최고정점을 보여준다. 남편은 육식을 거부하는 그녀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육식을 위해 희생되는 동물과 가부장제를 위해 희생되는 여성을 연장선에 놓고 보면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되지만, 마지막 씬에서 영혜는 동박새를 물어뜯는다. 내내 피식자로 이해되던 영혜 역시 더 약한 존재에게 포식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생명 그 자체가 내포하는 폭력성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두 번째 파트 <몽고반점>은 영혜의 또 다른 주변 남성인 형부의 이야기다. 그는 영혜의 남편과 정반대의 시선으로 영혜와, 그녀의 언니이자 부인인 인혜를 해석한다. 그는 새처럼 자유를 꿈꾸던 예술가로 영혜의 특별함을 발견하고 매료되며 그녀와의 정사를 꿈꾸고, 실현한다. 그 과정에서 영혜는 피해자로 묘사되기 보다는 어느 정도 욕망에 충실한 능동적인 자세를 보여주는데, 이것은 도의와 윤리에 대한 배반과 더불어 언니에게 최악의 폭력을 안겨주면서 <채식주의자>의 마지막 장면의 포식자로서의 영혜와 이어진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세 번째 파트 <나무 불꽃>은 남겨진 자, 인혜의 이야기다. 그녀는 상기의 사건 이후 남편과 이혼하고 어린 아들과 정신병원에 갇힌 영혜를 돌보며 살아가고 있다. 이제 영혜는 채식을 뛰어넘어 비식을 지향하고 있다. 그녀가 가진 본질적 폭력성(동박새를 물어뜯은 사건과 형부와의 정사는 그녀가 모두 비폭력을 지향하여 채식을 할 때 일어났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을 거부하기 위해 폭력의 화살을 자신에게 돌렸다고 할 수 있겠다.
인혜는 남편과 동생의 일로 목을 메어 죽기 위해 산을 찾았으나, 영혜가 꿈꾸던 비폭력의 상징인 나무조차 인혜에게는 폭력적이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나무와 풀, 꽃들도 살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경쟁하는가. 인간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또 다른 생명을 잡아먹어야 하지만, 나무는 햇볕과 물만 있으면 평화롭다 읊조리던 영혜의 말과는 달리 가지와 뿌리를 뻗어 햇볕과 물을 독차지하기 위해 주변의 작은 나무를 말려 죽이는 것 또한 식물의 속성이다. 그렇기에 인혜는 나무들을 짐승 같다고 느낀다.
"그녀는 알 수 없다. 그것들의 물결이 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그 새벽 좁다란 산길 끝에서 그녀가 보았던, 박명 속에서 일제히 푸른 불길처럼 일어서던 나무들은 또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그것은 결코 따뜻한 말이 아니었다. 위안을 주며 그녀를 일으키는 말도 아니었다. 오히려 무자비한, 무서울 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이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받아줄 나무를 찾을 수 없었다. 어떤 나무도 그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마치 살아있는 거대한 짐승들처럼, 완강하고 삼엄하게 온몸을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p.206
이 책에서 제일 흥미로웠던 것은 책의 어디에도 채식주의자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혜는 폭력성을 배제하기 위해 식물 그 자체가 되고 싶어한 사람 아니겠는가. be채주의자? 크크. 하지만 그녀가 식물성을 지향하며 외부에 저항하자 인혜와 그녀의 아들 지우에게 씻을 수 없는 폭력적인 상처를 남기게 되었고 이제 남은 것은 내부(생명)에 저항하는 것, 바로 죽음이다. 그러므로 채식주의자라는 납작한 단어로 영혜를 이해하는 것은 작품 속 그녀의 가족들이 그러했듯, 작품 밖 독자들이 그녀에게 행하는 또 다른 폭력이 될 것이다.
하아, 살려면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없고 죽으려면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을 수 없다. 어쩌란 말이냐. 이처럼 생명은 본디 그 자체로 폭력적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매 순간 살기 위해 혹은 죽기 위해 투쟁하지 않을 수 없겠으나 그 이상, 그 너머를 한 번쯤은 생각해 볼 수 있지 않겠나.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거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