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도 병이라 하시면, 기꺼이 병자가 되겠어요.
<밝은 밤>_최은영
다정도 병이라 하시면,
기꺼이 병자가 되겠어요.
<밝은 밤>_최은영
지연은 이혼 후 희령으로 도피하듯 이사한다. 그녀의 이혼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엄마와 거의 연을 끊다시피 한 할머니가 사는 동네이기에 엄마로부터 도망치기에 그보다 좋은 장소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극적이면서도 동시에 필연적으로 그 좁은 동네에서 열 살 이후로 본 적이 없었던 할머니와 마주치게 된다. 그녀의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는 증조모를 지연이 빼닮았다는 이유로 할머니와 지연은 자연스럽게 증조모의 이야기를 나누게 되며 정을 쌓아간다.
작품은 이 '할머니가 손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방식을 통해 증조모에서 조모, 엄마 그리고 나 지연에게까지, 4세대에 이르는 "흘러가는 강물"p.173 같은 시간을 살아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네들에게 결코 친절하지 않았던 시대 속에서 상처받고 체념하기도 하지만, 결코 시들지 않는 다정함을 품고 살았던 여인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이미 지나간 과거로만 해석되지 않는다. 지연이 할머니를 통해 듣는 이야기 속에서 그들은 천진한 아이로, 사춘기 소녀로, 아이 엄마로 생생하게 되살아나 동 시대성을 획득한다. 동시에 지연의 현재사와 함께 교차 병치되어 서술되는 식으로 현재의 지연의 문제와 과거의 그들의 문제가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얽혀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누구에게 거짓말을 했나.
나에게, 내 인생에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알고 싶지 않아서. 느끼고 싶지 않아서.
어둠은 거기에 있었다." p.299
시간을 거슬러 올라 찾은 자신의 기원에서 지연은 현재의 자신의 문제를 파악하고 마주하며 (원래 삶이 그렇듯 해결까진 아니지만) 인정할 힘을 찾아낸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다정함, 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여성 특유의 다정함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새비 아저씨는 얼마나 다정한 남자였던가.) 사랑이라 부르기엔 다소 온건한,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과 버스에서 졸고 있는 다른 이에게 기꺼이 어깨를 내어줄 수 있는 연민과 연대 그 어디쯤의 마음을 정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의 초반, "이 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p.82냐며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던 지연은 마지막 장면에서 증조모, 할머니, 죽은 언니와 함께 찍은 사진(사진은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다.)을 보며 웃는다. 그 마음 역시 다정이리라.
다정한 사람이 되어야겠다. 우선 영원한 우주의 시간 속에 "찰나에 불과한 삶"을 살다 떠나는, "별의 먼지로 만들어진"p.130 나에게 다정해지자. 어찌 된 일인지 지금 내 옆에 서 있는 그들에게도 다정해지자. 그리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게 다정해지고 싶다. 다정도 병이라면 기꺼이 병자가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