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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관하자, 우리는 모두 강한 사람들이니

<소녀 연예인 이보나>_한정현, 민음사

by 피킨무무








처음 책의 제목으로부터 가벼운 이세계물의 향기가 난다 싶어 아묻따 대출했건만 오마갓. 소녀, 연예인, 이보나 라는 세 단어의 조합이 이렇게 무거울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단편소설집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나 작품들의 수많은 등장인물이 연대별로 얽혀있기에 한 덩어리의 연작소설이라 볼 수 있다. 작품은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출발하여 현재에까지 이르는 4세대의 방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그것도 역사적으로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를.


작가가 여성, 예술가, 노동자, 퀴어를 아우르는 국가적 폭력에 희생당하고 성적 억압에 짓눌리는 약자들의 역사적 생존기를 엮어내며 가장 본질적으로 다루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 이상하면서도 아름다운, 때로는 그 무엇보다 강한 사랑이다. 무형의 그것은 국가나 이념, 젠더의 한계를 넘나들며 여러 형태로 변화할 수 있다.


가장 약한 자들의 사랑은 얼마나 강했던가.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강해지라, 더 많이 낙관하라. 슬픈 역사 속의 아름답고 강한 그들이 결국 우리에게 하고픈 말은 그런 것들이 아닐까.


"민며느리였다가, 여공이었다가, 미혼의 임산부가 된 그이는,

그이는?

강한 사람이야.

어째서?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단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고 믿고 주저앉지 않았던 강한 사람."p.265


""사랑 때문에 망하는 게 뭐 어때요?"

탐정소설을 쓰는 남자들은 연애소설을 읽는 여학생들을 무시했지만 경준은 그렇게 말했다. 돈과 권력 때문에 망하는 사내보다 낫지 않나요, 라는 말과 함께."p.273


"수성은 경준의 아이를 자신이 키우겠다고 했다. 아이를 지우기엔 경준의 몸이 위험한 상태였기에 낳을 수 밖에 없었다. 수성은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임을 첫눈에 알아봤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 아이는

경준의 아이였지만 그런 경준을 사랑하는 사람은 안나였기 때문에, 수성에게도 안나는 가족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안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성은 안나의 얼굴을 쓸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아이의 이름을 지어줄게. 그리고 기억할게. 그러니까 우리는,

"낙관하자.""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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