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와 연민, 그리고 희망

<카르마조프 가의 형제들 3>_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민음사

by 피킨무무






""(...) 인간 만사는 모두 습관이야, 국가적 일이나 정치적 일에서도 모든 것이 습관이지. 어디나 습관이 주된 동력이란 거야.""p.38


""(...) 나는 신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하는데, 질서를 위해서... 세계의 질서 같은 것을 위해서요... 만약 신이 없다면, 그것을 고안해 내야 하겠죠.""p.92


무대가 갑자기 바뀌며 콜랴 크라소트킨이라는 소년이 등장한다. 그는 자존심이 무척이나 센 똑똑한 소년으로 알로샤를 추앙한다. 그는 보통 이런 식의 구성이면 사건이 엉뚱하게 흘러가서 의외의 인물이 범인으로 등장하는 법이지만, 왠지 여전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대한 의심을 거둘 수가 없군!


""(...)누구 하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가긴 가야 되니까, 그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가겠어. 내 비록 아버지를 죽이지는 않았지만 나는 가야만 해. 그래, 받아들인다!""p.173


이 부분은 작품에서 계속 반복되어 등장하던 요한복음의 한 구절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드미트리를 희생시키는 것이 작가의 계획인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복음 12:24)


스메르쟈코프와 표도르 간의 신호를 아는 자는 드미트리 이외에 이반이 있다. 그가 진범일까? 그에게 의도적으로 정보를 노출한 스메르쟈코프 역시 온전히 의심을 거둘 수 없는 인물이다. 이러다 표도르의 죽음이 신의 섭리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겠지.



""(...) 인류의 뼛속까지 배어있는 어리석음을 보건대 1000년이 지나도 이러한 세계가 건설되지 못 할 수 있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진리를 의식하고 있는 사람 중 누구든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새로운 원칙에 따라 세계를 건설해도 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이다. 더욱이, 이 시대가 절대로 도래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어쨌거나 신과 불멸이 없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은 인신이 될 수 있으며, 설사 그런 사람이 전 세계를 통틀어 단 한 명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어쨌거나 그는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은 이상 필요하다면 예전의 노예와 같은 인간이 가졌던 온갖 도덕적 장벽을 가뿐한 마음으로 뛰어넘을 수 있다. 신은 법률의 구애를 받지 않으니까! 신이 나타날 곳- 그곳이 곧 신의 자리인 것이다! 내가 나타날 곳, 그곳이 지금 제일가는 자리가 될 것이며... '모든 것이 허용된다.', 이것으로 끝이다!""p.297


이반이 자신의 내면 속 악마를 실체화, 타자화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특히 이 부분은 <죄와 벌>에서 라스콜니코프의 무죄주장의 근거로 쓰였던 비범함의 개념을 가져와 이번에는 반대로 이반의 실체 없는, 스메르쟈코프에게 살인을 종용했다는 유죄판결의 근거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실로 멋있다고 생각했다. 이른바 무신론자에게 있어 양심의 죄의 무게는 어떤 저울로 판단할 수 있을까, 라는 흥미로운 논제.

'모든 것이 허용된다', 가 이렇게 발전할 줄이야.



""다들 아비를 죽여놓고선 놀란 척 연기를 하고 있어.(...) 서로가 서로를 앞에 두고 모르는 척하고 있는 꼬락서니라니. 거짓말쟁이들! 다들 아버지의 죽음을 바라고 있어. 한 마리의 독사가 또 다른 독사를 잡아먹는 거야. 친부 살해 사건이 없었더라면 다들 화를 내며 성질이 난 상태로 각자 집으로 갔겠지... 볼거리를 달라! '빵과 볼거리를 달라! 하긴 나도 만만찮은 놈이지! 당신들한테 혹시 물 좀 없소, 물이나 잔뜩 마시게 해 주시죠, 제발!""p.371


이반이 이야기하는 '양심의 죄'의 논지에 따르면 나 또한 죄인이다. 표도르가 죽을만치 추잡하다고 판단하고 그의 죽음을 흥미롭게 지켜보았으니 그 살인을 방조, 혹은 종용한 것이리라!


검사 측의 논고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이치에 딱딱 맞아 보이니, 그 진실이 어떠하든 미챠는 이 덫을 벗어나기 힘들겠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왜 우리는 꼭 자기가 상상하는 대로, 자기가 상상하고 싶은 대로만 모든 걸 가정하는 겁니까? 실제 현실 속에는 가장 섬세한 소설가가 관찰을 하더라도 놓칠 수 있는 것들이 1000개는 족히 될 겁니다.""p.475


""즉, 자식을 낳았다고 해서 다 아버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 비록 나의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있어 불한당이나 다름없는 악당이라 할지라도 나를 낳아주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어쨌거나 나의 아버지다, 하고 주장하는 측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이미, 말하자면 신비주의적인 것으로서 저로선 이성으로 이해하지도 못하겠거니와 그저 믿음을 통해,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믿으니까 그냥 받아들일 수 있을 따름이니, 이건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지만 종교에 의해 믿도록 강요받는 다른 많은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거죠. 하지만 이럴 경우에 그것은 현실적 삶의 영역 바깥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 우리가 인도주의적이 되길, 결국엔 기독교도가 되길 원한다면, 우리는 오로지 이성과 경험에 의해 정당화되고 분석의 도가니를 거쳐 나온 신념만을 실행에 옮겨야 하고 또 그럴 의무가 있으며, 한마디로 말해서,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사람을 괴롭히거나 파멸시키지 않기 위해서, 꿈을 꾸거나 미망에 빠진 것 같은 광기에 휩쓸려 행동할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바로 그때서야 비로소 이것은 진정으로 기독교적인 일이, 즉 마냥 신비주의적인 것이 아닌, 이성적이면서도 이미 진정으로 박애주의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p.405


이야, 검사의 논고가 매우 논리적이라 생각했는데 변호사의 변론은 정말 철학이나 심리학적 측면에서 허를 찌르는구나. 사실 고백건대, 앞선 1,2권에서 흥미로운 도발적 논제에 비해 너무 연극적이고 궤변적인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 도스토예프스키 나랑 안 맞나, 했는데 모두 3권을 위한 빌드업이었군요,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괜히 대문호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었어, 정말 대단합니다, 넙죽.


""여러분이 명심해야 할 것은, 앞으로의 인생을 위하여 뭔가 훌륭한 추억, 특히 어린 시절 부모님 슬하에 있을 때 갖게 된 추억보다 더 숭고하고 강렬하고 건강하고 유익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의 교육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많이 하지만, 바로 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 온 아름답고 성스러운 추억이야말로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가장 훌륭한 교육이 될 겁니다. 인생에서 그런 추억들을 많이 갖게 된다면 그 사람은 평생토록 구원받은 셈입니다.""p.551


엔딩은 도스토예프스키답게 다소, 아니 많이 교조적이다. <죄와 벌>도 이런 이유로 별로 좋아하지 않았건만(흑흑), 앞서 검사와 변호사의 변론 부분이 너무나 좋았기 때문에 상쇄하도록 한다, 하하핫. 알료사와 일류세치카 에피소드가 이렇게 활용되는구나. 부모와의 어린 시절 추억이 전무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에게 있어 구원은 요원하지만, 알료사에겐 일류세치카라는 훌륭한 교보재가 있었다. 아버지를 사랑하여 분연히 떨치고 일어난 아들, 그런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스네기료프. 서로를 끔찍히 아끼는 그들에게서 희망을 본 알료샤는 그들의 비극을 환희에 찬 희극으로 치환한다. 조시마 장로의 에피소드를 통해 신비주의를 극복하고 미챠의 재판을 통해 현실과 이성의 세계를 거쳐 화합과 희망의 미래로 나아가는 알료샤는 그야말로 카라마조프 가의 희망이 된 셈.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을 꼽자면 이반과 스메르쟈코프다. 신이 없는 세계에서 영리한(비범한)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되었으나 그것으로 양심의 죄까지 없앨 수는 없었다. 작품 속에서 둘은 매우 닮아있는 '영리한' 인간들이다. 둘 다 비참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특히 스메르쟈코프의 경우는 더하다.) 무신론자이면서 양심의 죄로 괴로워하는 것이 그러하다.


하지만 그들의 최후의 뉘앙스는 좀 다르다. 카체리나의 보호와 간호 속에 구원서사의 희망적인 기류가 흐르는 이반의 경우와 달리 스메르쟈코프는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서 구원의 문을 자신의 손으로 굳게 닫았다. 유서에서조차 모호하게 죄를 고백함으로써 남은 자들에게 자신의 목숨을 걸고 악의적으로 복수한다. 이반에게는 그를 사랑해 준 형제와 여인이 있었으나, 스메르쟈코프에게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는 작품 속에서 철저하게 고독한 인물로, 가장 가깝다 느꼈던, 유일한 동류이자 동조자 이반조차 그에게 극심한 혐오만을 느낀다. 부모와 조국을 증오하여 프랑스로 건너가 새인생을 시작하고 싶어했을 그, 구원에서 멀어졌으나 가장 구원을 갈구했을 그의 삶을 돌이켜보면 그의 선택이 이해될 법도 하다. 신의 자비는 왜 늘 이런 이들을 비켜가는 것일까. 실로 그가 먼저 신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이 먼저 그를 버린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잠시나마 이 인물을 가여워해도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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