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했던 썰 푼다, 의 최고봉을 달리는 대표작으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있다. 정신 의학자였던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 에세이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극한의 상황에 몰리지만 유머와 의지를 잃지 않는 인간의 숭고함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원제가 의미를 찾는 인간이며 한국판 부제가 '죽음조차 희망으로 승화시킨 인간 존엄성의 승리'이니, 어떤 뉘앙스의 글인지 알아챌 수 있다.
반면 동일하게 홀로코스트 문학 카테고리에 들어갈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은 상기 언급한 작품과는 결이 매우 다르다. 굳이 비슷한 결을 찾자면 지난번에 읽었던 밀란 쿤데라의 <농담>에 더 근접하다. 역사적 비극에 휘말린 개인의 삶에서 극한적 상황 하에서의 인간성의 의미라던가, 존엄성을 찾고자 하는 불굴의 의지 같은 것은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저 추락하고 망가뜨려지는 개인이 있을 뿐이며 이것은 회복불가능하다.
<운명>의 주인공 쾨베시 죄르시는 16살에 유대인수용소에 끌려가 독일군의 패망으로 1년 만에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는 초객관적으로(분명 1인칭 시점이지만 그의 진술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죽음 외에 탈출방법이 없었던 수용소의 현실을 그래도 살만한 곳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그가 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생존법이었다.) 자신의 상황을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덤덤하게 기술하며 모든 사람의 예상과는 달리 독일군을 증오하지도, 유대인으로서의 비극적 운명을 탓하지도 않는다. 그는 살아남았고 지금의 삶이 수용소의 그것과 극적으로 다른 것도 아니며 수용소의 삶에서도 행복이 있었다고 말한다. 주인공의 초월한 듯한 독특한 시선을 잘 보여주는 장면을 살펴보자.
"이들이 우글거리는 것과 이들의 식욕과 욕심과 탐욕, 순수한 행복을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이런 모습을 어디에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런저런 것들을 고려해 볼 때 어느 정도는 이들을 이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도 자연의 질서일진대 어찌하겠는가. 나는 얼른 종이 붕대를 다시 덮어버리고 그 후로 이들에게 싸움을 걸거나 이들을 괴롭히지 않았다." p.198
주인공은 수술 후 상처에 이들이 우글거리며 제 살을 뜯어먹는 것을 발견하고도 그대로 내버려 둔다. 자신의 삶을 갉아먹는 운명에 맞서려 투쟁하지도, 서글퍼하지도 않는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그가 걸어가는 삶의 일부일 뿐이며 이 모든 것이 딱히 독일군의 잘못도 아니다. 따지자면 온 인류의 잘못일 뿐이다.
급기야 매사에 순응적이고 온순한 이 캐릭터는 결말에 이르러 파격적인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이 시간대는 수용소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한 특별한 시간이었다. 지금 여기에서도 그 느낌이 전해졌다. 뭔가 섬세하고 고통스럽고 허무한 느낌이 찾아왔는데 그것은 바로 향수였다." p.283
수용소를 향한 애수와 향수라! 어딘가 나사 하나, 아니 열댓 개 빠진 것 같은 이 소년의 선언은 역사적 운명 같은 것은 없다고, 나는 온당한 이유 하나 없이, 해명도 없이 그저 철저하게 망가졌노라, 하는 울부짐으로, 아니 힘없는 속삭임으로 들려와 여운이 진하게 남는다. 수많은 홀로코스트 문학 작품들 중에 이처럼 독특한 시선으로 역사적 참극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있었던가. 역사가 한 개인의 정신세계에 얼마나 깊고 아물지 않는 상흔을 남길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그의 두서없는 이야기를 그저 들어주는 것 외에 우리는 감히 소년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