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향한 최소이자 최대의 저항

<필경사 바틀비>_허먼 멜빌

by 피킨무무





그야말로 위대한 작품, <모비딕>의 작가 허먼 멜빌의 단편이다. <모비딕>이 1851년, <필경사 바틀비>는 1856년 작으로 집필시기가 아주 오래 차이 나는 것도 아닌데 문체나 분위기가 같은 작가의 것이라 보기 힘들 정도로 완연히 다르다는 것이 무척이나 흥미롭다. 넓디 너른 바다를 무대로 시종일관 호쾌하고 유쾌하며 장엄하기까지 한 <모비딕>과 달리 변호사 사무실의 네모지고 고립된 공간을 벗어나지 않는, 폐쇄적이고 병적이며 음울한 세계를 그리는 <필경사 바틀비>, 두 작품의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당시의 독자들이나 비평계는 멜빌의 작품세계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다. 특히 <주홍글씨>의 너새니얼 호손에게 인정받고자 노력하며 집필했던 <모비딕>의 실패는 그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으리라. 그것이 그를 좁디좁은 사무실의 한 켠에 고립시키지 않았을까?


의도치 않게 인생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절망, 혼돈에 인간은 어떤 식으로 저항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오히려 내가 읽었던 작품 중에서는 카프카의 <소송>과 분위기나 결이 비슷하다고 느껴진다. 느닷없는 고소를 당하고 얼토당토 않은 판결을 받으며 어이없게 처형당하는 요제프, 그가 공권력으로 대표되는, 개인에 대한 세상의 횡포에 대항하는 최대의 저항은 죽기 직전에 내뱉는 "개같군!"이라는 욕지거리, 그것뿐이다.


바틀비의 반복되는 대사 "하고 싶지 않습니다. (I would prefer not to.)" 역시 그가 세상에 대항하는 최소이자 최대의 저항이다. 세상이 선사하는 광폭한 절망 속에서 연약하디 연약한 저항으로 죽음까지 불사한다는 아이러니. 광기처럼 보여지기도 하는 이 소극적인 저항은 바틀비의 주변인 뿐만 아니라 독자들까지 잠식시켜나가는 마력이 있다. 절망에 빠져 죽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 선택으로 죽는 바틀비의 모습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 사면 편지를 받았어야 할 사람은 절망에 빠져 죽었고, 희망적인 편지를 받았어야 할 사람은 희망을 품지 못하고 죽었으며, 희소식이 담긴 편지를 받았어야 할 사람은 구제받지 못한 불행에 짓눌려 질식당해 죽었다. 생명의 임무를 받아 나섰건만 편지들은 죽음으로 질주한다.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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