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절제 무책임의 사회

무료 FREE가 뇌에게 주는 오해

절제란 무엇인가?


덜하다 라는 의미로 알고 있고, 대충 지키지 않으면 내가 큰코 다치기에, 모두가 자신을 위해서라도 지키는 일종의 원칙이다.


우리는 절제가 요구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어렸을 적에 이런 생각을 했다. “어른이 되면 더이상 절제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래서 얼른 시간이 지나면 좋겠다는 바램이 있었던 것 같다. 그치만 어른이 된 우리는 절제하지 않은 결과를 맞이한다. 고스란히 뼈와 살로 돌아오는 법칙속에 살고있다.


성인이 되어도 누구나 꿈은 꾼다.

누군가에게는 이루고 싶은 꿈이 있을 수도 있다. 방학때 토익 공부하기가 될수도있다 , 유튜브 영상을 찍고 싶은 생각도 .. 든다 많은 꿈과 환상을 가지고 있기에 또 젊음과 연애의 유혹에 쉽게 빠지기 쉬운 고등학생 시절을 보내기도 한다.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아니하리라.
잠언 20장 23절


꿈을 모두가 꾼다. 이루지 못하고.

고등학생때는 그게 그렇게 멋졌다. 고등학생때 유튜버로서 활동. 옆 고등학교까지 소문난 예쁜 인간들. 지금은 취업해 직장인이겠지.


왜 그때는 그런게 갈망이 되었을까?

왜 나는 그런 것에 시간을 낭비했을까?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미국의 건국 아버지이자 계몽주의 사상가)은 '당신은 인생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왜냐하면 시간은 인생을 구성한 재료니까.'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근면과 절약을 통해 자본주의 정신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시간 낭비를 곧 돈과 기회를 잃는 '죄악'으로 보았기 때문에, 무절제한 허송세월을 경계하라고 말을 한다.

한때의 꿈은 여전히 꿈속에서 늘 등장한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때 당시 친구들은 지금으로서 전혀 부럽지 않은 친구들이었다. 한때에 불과했다. 성적과 학원 수능 점수 등. 다 한때였다. 그렇게 젊었을때 나의 시간을 이상한 것에 비교하며, 첫 연애에도 열심히 투자했었다. 나의 과거이다.


왜 나에게는 이루어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일까? 문제의 근원은 무절제에 있지 않나 싶다. 무절제- 절제되지 않은 시간 절제하지 못해 허송세월 지나가버린 시간들 때문인 것이다.


II. 承 (전개) 중독의 근원과 '조금만 더'의 유혹

나는 과연 시간이 없었는가? 시간이 없어서 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을 늘 하고 있을수도 있다. 시간의 문제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나의 말을 들으면 아마 보통 대부분 사람은 시간 없어서 죽는다, 지금 내가 이 과제를 끝내기 위해서는 밤을 새서라도 부족한데 대체 무슨 자기개발 같은 소리란 말인가? 라고 할것이다. 그래서 나의 꿈을 항상 미룬다. 방학 혹은 대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로 결정을 한다.


사실 평상시에 보내는 시간이 전혀 뒤죽박죽한 무절제의 삶임에도,

항상 여유가 있을때만을 고대하고, 핑계한다.


그 증거는 방학을 맞이하면 알 것이다. 시간이 있어도 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내 시간이 어디갔지? 라는 의문이 들다가도, 유튜브를 10시간 이상 보고 있다보면 그 많은 시간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의 출처를 알게 된다.


절제는 왜 그렇게 어렵고, 그토록 이루었으면 좋았을법한 꿈을 일시적인 욕구 해소와 소리도 없이 샤샥 바꿔치기를 하는 것일까? 마음 속에 꿈꾸는 것과 시간이 그저 한낱 꿈과 같이 흘러 사라지는 것이 아닌 실제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


상황을 제시하겠다.

다음으로 제시되는 두가지 상황은 절제하여 스스로 끊어내기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긴박한 이유가 아니라면.

1 밥을 먹으면서 영화를 보는데 재미있다. 영화가 끝나지 않은 상황. 하지만 할일도 딱히 없으며 주말이다.

2 친구들과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있다. 중요한 일은 없지만 생각했던 귀가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극단적 동기, 누가 내 목에 칼을 대지 않는다면 지금 눈 앞에 보이는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은 선뜻 할수 없는 것 같다.

조금만 더 보고 싶다는 생각과 마음으로 인해서이다. 조금만 더 보면 뭔가 중요한 내용이 나올 것 같고, 조금만 더 보면 뒤에 놓쳐서는 안될 것만 같은 중요한 것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러한 조금만 더 라는 마음이 좋게 작용하는 때는 거의 없다고 본다.

하지만 수많은 결혼식 초청권, 방학만 되면 남는 돈과 시간, 그리고 여행의 기회. 내 눈앞에 있으면 볼때마다 덥석 덥석 물기 쉬운 것이 사람이다. 사람의 본능이 원래 그렇다.


급할때 제동 능력

이 작은 욕구들을 거절하고 이길수 있는 절제의 능력은 많은 경우 위기의 순간에만 작동한다. 시험 전날과 같이 많은 시간이 필요할때, 그리고 특히 평소에 게으르게 시간을 보내느라 전혀 지금 내가 밤을 새면서 열심히 하지 않으면 양심이 내게 인간이 아니라고 할 상황일때.

하지만 이런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평소와는 다른 절제 능력을 행할수 있지만, 시험이 끝난뒤에는 자신이 시험이 끝나고 정말 하고 싶었던 자기개발을 위한 투자가 늘 무너지는 이유 절제의 문제라고 볼수 있다. 미리 미리 경작을 해두었으면 훨씬 좋았겠지만, 원래 인간은 자신이 불편하지 않는 이상,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이상은 아예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기 쉽다.


잠언 - 일하고 싶지 않은자는 먹으려고도 하지 마라. 이런 중독의 행동과 양상이 삶에 깊이 물들어져 있는 사람 누구나 스스로 절제를 조금은 해야되지 않을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있을 것이다. 절제의 반대 개념인 무절제, 중독의 근원은 이 작은 유혹에 있다 . ’앞으로 뭔가 조금 더 나를 재밌게 해줄수 있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필수적인 절제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중독과 관련이 있다. 자신의 시간과 속성에 대해서 제3자로서 관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에 그저 냅다 의지하고 싶은 마음말이다.


“다 던져버리고 싶은 심리“

솔직히 잔소리나 내 자신도 그만 직면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중독을 발생시키는 원인

첫번째, 사람에게는 무언가를 탐구하여 끝을 알아내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

진행 중인 상황이 아닌 완료된 형태를 선호한다. 빨리 끝내버리기를 원하는 것이고, 그날이 얼른 다가오기를 원하는 것이다. 시험이 끝나버리기를 기다리며, 대학을 졸업해버리기를 기다리며, 얼른 결혼해버리기를 기다린다. 이 본능은 어렸을때부터 관찰될수 있다. 우리로 모두로 걸음마를 때게 한 본능이다.

집에서 부모님이 비어있을 경우에 나는 주로 콘솔로 게임을 하거나, 티비 예능을 보거나 둘중 한가지를 하였다. 그렇게 열심히 티비를 보다가 현관문의 소리가 나며 부모님이 들어오게 될때, 나는 티비를 성급히 끄고 책상 앞으로 달려가 앉는다. 후다닥. 책을 휘릭 아무데나 피고 자리에 앉았다. 엄마는 들어오자마자 티비 뒷면을 만져서 뜨거우면 뭐라고 하셨다. 가끔은 TV를 킨지 30초가 안되서 들어오셨을때 그 아쉬움과 한탄을 이루말할수 없다. 공부하고 이제 막보려고 했는데 ... 항상 다 보지 못해 아쉬운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며 느끼는 마음은 뻔할 것이다. ‘아 다 보지 못해서 아쉽다.’

인간은 무언가를 할때 마음이 충족되는 것은 아니지만, 끝을 보게 될때 그때 내 마음에 missing 퍼즐 조각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본능적으로 한다. 그래서 집중하게 된다. 예능을 보면 대부분 뒤에서 다음화에 대한 광고를 정성스레 한다. 나만 개인적으로 느낀 점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항상 기분이 더러웠다. 뭐 .. 이번화는 별로였다는거야? 항상 다음화를 광고를 하면, 기대하는 마음으로 다음화를 보지만, 예능에서 대단해 보이는 미션 하나하나를 성취해나가는 것을 보면 과연 결말에는 뭐가 있을까?에 대해서 궁금하기 때문에, 지금 장면이 재미없더라도 인내하며 버티게 된다.

게임의 원리도 비슷하다. 늘 가차와 같이 다음에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랜덤성에 나의 판단력이 저하된다. 게임을 하게 되는 두뇌의 전두엽은 실제로도 성능이 줄어든다고 한다. 전두엽은 의사결정, 성격을 좌우한다. 그런즉 자신의 자아,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하는지 그저 잊은채 쥐와 같은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무절제한 중독 행위가 우리의 뇌를 파괴한다는 연구 근거도 있다. 정신건강의학과 최정석은 기능적 MRI 검사를 통해 인터넷 게임 중독자들의 전두엽과 두정엽 부위 뇌 활성이 오히려 증가한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중독된 뇌가 충동을 자제해야 할 전두엽을 비효율적으로 과활성화시키고, 결과적으로 뇌 구조 간 정보 처리의 불균형을 초래하여 인지 기능과 감정 조절 능력을 실질적으로 저하시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게임 중독은 단순히 개인의 의지 문제가 아니라, 뇌 기능의 변화로 인해 충동을 조절하기 어렵게 만드는 실제 뇌 질환인 것이다. (도박을 의지로 중단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 있다. 뇌를 변화시킨다)


TV 프로그램에 중독된 상태는 어쩌면 이런 상태가 아닐까 의심해보아야만 한다. 인내의 끝에 대단한 결말이 있기에, 나의 모든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기대와 마음 때문에 더더욱 빠져나오기 쉽지가 않다. 대단한 결말은 다음화의 예고편이다.

내가 보았을때 모든 예능이 지금까지 오게 된 이유는 바로 다음 편에 대해 예고하기 때문이다. 영상 편집을 통해서 재미없는 부분들은 없애고 빠르게 진행이 되게 된다. 예능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재미없었던 부분을 컷하는게 시청자의 눈에도 보인다.

마치 예능의 예고편, 지하철에 수많은 대형 스크린에 광고의 목적은 한결 같다. 대단한 상금을 마침내 얻어내게 될때 세상에 기쁜 소식이 펼쳐질 것만 같다. 폭죽과 금을 사용하여 시선을 끌고 기대하게 만든다. 꼭 가야 될 것 같이 홍보를 하고, 실제로 먹히기에 광고를 거액을 들여서라도 한다. 마치 오징어 게임의 430억처럼 말이다. 예능은 상금을 향해서 늘 달려간다. 그 상금을 얻는 것은 어떨결하게 함께 박수치면서 <이 상금은 재단에 기부가 되었습니다> 라는 멘트가 뜬다(만약 그 일상 예능의 금액을 연예인이 얻어간다면 이미지가 웃겼을 것 같다). 그리고 바로 이후! 뜨는 것은 예고편. 다음주! 두둥. 역대최고의 게스트들이 온다. 이번주에 사실 예능을 보게 된 이유는 그 역대 최고의 놓치면 안되는 것을 보기 위해 왔다. 하지만 또 다시 데자뷰가 펼쳐지는 것이다. 응~ 이번편은 사실 별거 아니었어. 그치 아쉽지? 근데 그거 알아?? 다음화에는 진짜 초초초대박 게스트가 등장해!!!

얼마나 봐야 아쉽지 않을까? 아쉬움은 완벽히 채워질수 있을까? 에 대한 답은 지금까지 살아온 수많은 기대와 경험들에 따라 추론해 보았을때 아마 그럴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이번은 다를거야 라는 불확실한 유혹에 믿음으로 다시 한번더 도전한다. 또 아직 겪어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 대단한 욕구와 자긍심과 기대를 넘어선 집착까지 생겨나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질문해야 할것이다. 과연 만족이란 존재하는 것인가? 진정한 Content라는 것을 존재하는가? 행복이란 다음화의 예고편과 같다. 행복은 항상 내일을 기약할 뿐이다. 오늘의 행복이 아닌, 내일의 행복을 만을 언급한다. 과연 그 내일은 언제 올까?


이런 중독과 욕구는 우리를 멀리 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지는 못한다. 의지라기보다 본능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내일의 이루고 싶은 꿈을 위해 오늘을 투자하여 살아가는 것보다는, 이루어질지 모르는 불확실함이 두려워, 즉시 소비될수 있는 미디어와 같은 쉬운 것들에 시간을 쏟게 된다. 무언가를 투자할수 있는 자유의 시간이 주어졌을때 그 자유의 시간은 즉각적으로 소비되어 버리기가 쉽다. 즉각적으로 소비되는 컨텐츠는 기대감만 부풀리는 중독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욕구에 충실하다보면 고등학교를 자연스레 졸업은 하겠지만, 틈나는 시간마다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위해 돈과 시간을 받친다. 대학을 가기 전의 자유의 3개월은 날아가버린다. 나의 자유와 발전의 시간을 유튜브와 넷플릭스에 뭐 금액으로 따지면 50만원, 시간과 가치로 따지면 말할수 없는 시간을 증발시키게 된다. 무서운 것은 이것이 한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공부와 진로를 위해 했던 휴학은 해외 미디어 플랫폼을 시청하며, 수많은 유튜브 영상의 조회수만 높이는데 사용되고 어느새 개강이 다가올 뿐이다. 이러한 현상은 결코 멀리있는 현상이 아니다. 매우 가까운 일이고, 오늘 내가 만나게 된 대학생이 증언한 바이다.


'에잇 그냥 흐르는데로 살아! 뭐하러 참아 힘들게!'

세상은 엔트로피의 법칙을 따른다. 그 엔트로피의 법칙을 거스르고 싶지 않아 그 흐름을 그냥 냅다 타고 내려가버리는 경우가 있다. 소모적이고, 더 자극적인 곳을 말이다. 그러한 현상에 대해 문학작품 <파리 대왕>은 상세히 다룬다.


《파리 대왕》은 무인도에 표류되게 된 소년들이 서로 만들게 되어가는 질서를 소재로 하는 1954년 소설이다. 질서가 사라진 상황에서 결국 인간 본성이 공동체를 어떻게 무너뜨리는지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무질서와 성장이라는 요소에 사로잡혀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1. 무질서와 미성숙한 본능의 추구

10명이 넘는 10대 아이들이 무인도에 표류했을 때, 그들의 행동 양상은 ‘계획 없는 즉흥성'과 ‘새로운 짜릿함 추구'라는 양상으로 치우치게 된다.

즉흥적인 쾌감 추구: 무언가를 처음 배우기 시작할때 단기적으로 그런 배움의 즐거움이 좋아서 시작했을수도 있겠지만, 나중에 가서도 여전히 계획이 없이 즉흥적으로 진행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이들은 문명의 규칙 대신 사냥과 놀이에서 오는 짜릿함에 사로잡힌다.

처음 새로운 것을 해결할때, 첫 사냥이나 밤에 음식을 먹는 등, 짜릿함을 해결하게 되었을때 주어지는 쾌감을 위해 달려가는 것일수도 있다.

그렇게 계속 달리다보면 어느 순간 내가 목적(구조)을 쫓아가는 것보다, 새로운 무언가를 해결하거나 성취하게 되었을때의 짜릿함(사냥의 성공)을 쫓아갈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결과 아이들은 살인까지 저지른다. 자신의 편에 서지 않은 아이들과 갈등 상황이 부추기기 때문이다.

그 소설의 행동과 양상은 지난 공포적인 전쟁을 일으킨 독재자를 연상하기도 한다.


무책임과 파국: 통제되지 않은 쾌감 추구는 무책임의 상태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랠프라는 꼬마아이가 상징하는 질서와 계획은 잭이 상징하는 원초적인 본능과 즉흥적인 만족감에 의해 무시됩니다. 결국 불을 지키는 책임(구조될 희망)은 버려지고, 본능과 유희만을 쫓는 결과는 작품에서 파국으로 이어집니다. 그들은 안경을 부수고, 밤마다 도둑질을 행사합니다.


2. 안식 대신 절박함에 쫓기는 삶

《파리 대왕》이라는 문학작품에서는, 아이들이 현재 내가 하는 일들이 행복하게 잘 성취되어 간다는 안식 속에 거하는 것보다, 일들이 해결되지 않아 얼른 해결되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절박함에 쫓기고 될 것을 보여줍니다.

어른의 세계에서도 목적 없이 순간적인 쾌감과 성취에만 중독되어, 장기적인 행복이나 평화를 잃어버리고 늘 급박함에 쫓기게 되는 인간의 미성숙한 본성을 반영한다.

이와 같이 본성을 따르는 삶에 대해서 경고를 한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악을 행하는 길로 자신을 절제하지 않을때 악으로 인한 재앙이 자신에게 찾아오게 될 것임을 말한다. 자신이 심는데로 거두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이 글 뒤에서 그것에 대해 구술하겠다.


두번째, 행복은 끊임없이 더 큰 자극을 요구한다.

중독의 두번째 종류다. 한번 느꼈었던 강력한 자극을 잊지 못해 더 원하고 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짜릿함을 느끼는 것은 단순한 취향보다는 인간의 욕구와 관련이 되어있는 것 같다. 인간은 여러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전제를 하였다 (게임) 중독이 쉽게 되는 이유는 사실 플랫폼의 기술 발전으로 인해서 이전에 가질수 없고 볼수 없었던 감각들을 자극시키는 것도 문제의 원리가 되기도 할것이다. 순간적인 잔인함의 순간에서 벗어나야겠다는 강한 본능과 함께 나오는 아드레날린, 이성과 단둘의 공간에서 사랑을 나누려고 할때 나오는 짜릿한 호르몬, 성취하고 성장하는데 기쁨을 느끼게 하는 호르몬 등으로 이런 중요한 일생에서 몇번 만나지 못할 호르몬들이 다량으로 나와서 중독되게 만드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사실 이런 욕구에 대해서, 그러한 욕구를 생각없이 소비하는 행위에 대해 그것을 자유이자 멋이라고 생각하는 나의 육(나의 생각)이 주는 거짓말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애석하게도 우리의 몸은 거짓 신호를 끊임없이 보낸다. 그리고 그러한 훈련된 사고와 경향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나의 몸과 마음 그리고 해마는 반복적인 학습을 통해서 뇌속에 이미 박혀있다. 같은 중독의 현상, 술이나 담배 자위 등등이 반복되고, 반복될때마다 패턴이 있다보니 스스로 뇌가 학습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와 같은 공간이나 장소등에 왔다고 인식하게 되면 뇌는 그 짜릿함을 곧바로 꺼내 마치 화장실로 가까이 갈수록 급해지는 것 처럼 자위하고 싶다는 욕구도 불타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중독은 정말 끊어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마음에 계속해서 내가 그것을 얻어내지 못하면 안되겠다는 불안감으로 찾아온다고 한다.


III. 轉 (전환) - 책임 부재의 사회와 중독의 결과

중독과 순수한 열정의 차이는 바로 계획에서 온다. 중독과 중독이 아닌 것의 차이는 계획과 목적 그리고 방향의 유무에 있다고 볼수 있다. 단순히 게임이나 중독스러운 것만이 중독을 유발하는 것은 아니다. 컴퓨터로 업무를 하는 것에도 중독이 일어날수 있다. 컴퓨터로 업무를 얼른 끝내고 싶고, 끝내면 너무 좋겠다는 생각에 시간이 넘어가는데도 조금만 더 하면 task를 성공시킬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계속해서 시간을 끌게 된다. 단순히 그렇게 해서 성과가 있었는가 없었는가를 중독의 여부로 생각하면 안된다.

무계획적인 감정

무언가를 처음 배우기 시작할때 단기적으로 그런 배움의 즐거움이 좋아서 시작했을수도 있겠지만, 나중에 가서도 여전히 계획이 없이 즉흥적으로 진행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처음 새로운 것을 배웠을때의 짜릿함과 해결하게 되었을때 주어지는 쾌감을 위해서 달려가는 것일수도 있다. 그렇게 계속 달리다보면 어느 순간 내가 목적을 쫓아가는 것보다, 새로운 무언가를 해결하거나 성취하게 되었을때의 짜릿함을 쫓아갈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무책임의 상태에 다다를 수 있다. 파리대왕이라는 문학작품에서는, 현재 내가 하는 일들이 행복하게 잘 성취되어 간다는 안식 속에 거하는 것보다, 일들이 해결되지 않아 얼른 해결되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절박함의 쫓기고 될것이다. 중독으로 인해 마땅히 누려야할 안식과 행복을 놓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중독이 아니었다면, 절제 하지 못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중독을 발생시키는 원인에 대해서 크게 두가지로 보아 말해보겠다. 중독이 되고, 어떤 것을 끝없이 실천하는 것은 그런즉 일과는 거리가 멀다고 볼수 있다. 일은 연단이자 스스로를 낮추지 자신의 기분을 위한 무책임이 아니다.

책임 부재와 무책임의 사회

최근 게임이 재미없어진 이유는 바로 무책임에 있다.

엥? 그게 무슨 소리냐 갑자기.

내 주장은 이러하다. 무책임과 근본이 없는 소비는 자신과 문화를 망가뜨리고 있다.

나는 특정한 부류 계층을 비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것은 모든 사람 포함이다. 하지만 그래도 가장 쉬운 예로 설명을 해보겠다.

사회적인 운동 wake와 같은 운동에 영향을 받은 기존과는 다른 형태와 부류의 자신을 꾸미는 부류가 존재한다. 그들은 겉모습과 말투를 자신의 인격과 자유라고 칭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남에게도 주장하는 것을 자신의 인권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그러한 문화의 변화에서 나오게 된 콘텐츠는 대부분, 그리고 PC를 지지하는 사람에게마저 외면을 당했다. (디즈니 인어공주 실사화 등)

외면을 받는 근본적 이유는 이런 운동이나 특정 계층을 혐오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그 내용 자체가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심지 않은 기적을 기대하는 것, 일상 속에서 갑자기 노력하지도 않은 사람이 영웅이 되는 플롯, 그런 것은 사실로부터 멀기 때문이다.

여성을 앞세우는 것은 좋다. 하지만 그들의 특징과 장점을 남자보다 연습을 덜했는데, 어느순간 공짜로 기적 천재가 된다라는 것이 전하는 메세지이다. 헌신과 책임은 사라지고, 자신의 감정 표현만 난무하니, 진짜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는게 가장 큰 문제다. 미디어에 대해 다루는 이유는 곧 이러한 미디어에서 홍보한 태도가 나의 삶에 반영된다면, 그것은 더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버워치 캐릭터, 게임 캐릭터, 또 인어 공주와 같이 최근의 미디어는 가면 갈수록 재미없어지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진실성의 부재이다. 진실된 이야기를 전하는 것을 더이상은 포기하고, 너의 모습 그대로 괜찮으니 그냥 자신을 꾸미라고 이야기를 한다. 게임의 컨셉상 군인이어도, 자유롭게 입게 허락하니 질서는 사라진다. 노력하고 자신이 경작하지 않은 삶에서 과연 배울수 있는 것은 무엇이겠냐말이다. 그래서 총게임 하나를 보더라도, 10년전(2010)까지만 해도 그 세계관의 전제등은 분명했지만, (사실 기반, 훈련 기반) 하지만 가면 갈수록 훈련이라는 진부한 것은 내던져버리고, 그냥 기적을 바라는 그런 깊이감이 없는 캐릭터들과 세계관이 생겨나다보니 진실성은 없다는 것이다.


만일 짱구는 못말려의 짱구 아빠, 신형만이, 더이상 직장을 가지 않고, 집에서 노는 백수가 되며 자녀를 책임지지 않는다면 과연 멋있는 것일까?

아니면 짱구 엄마는? 짱구를 구하는게 위험하니, '우리 각자의 생명을 보존하자' 라고 말했다면 과연 이러한 쇼를 과연 보기나 했을까?



자유를 갈망하는 이들, 또 중독이나 적당한 마약이 괜찮다고 하는 이들의 근본적 모순은 책임과 헌신이 없다. 바로 자신마저 누군가의 책임과 헌신이 없었다면 살아있지 않을 것이다. 어릴때 갓난아기 시절을 돌볼사람이 없었다면 말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미국 제16대 대통령)은 결심이라는 것을 통해서 남북 통일과 노예해방이라는 업적을 이루게 된 인물이다.

'늘 명심하라. 성공하겠다는 너 자신의 결심이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을.'이라고 강조했다. 평생을 어려운 환경에서 자수성가하여 노예 해방이라는 시대적 책임을 완수한 링컨은 '성공'의 필수 요소를 외부에 의존하는 '운'이 아닌, 스스로 세운 '결심'과 '헌신'에서 찾았기에, 책임 부재와 무절제와 반대되는 삶을 추구한 인물이다.


책임이 없는 서로에 대한 헌신과 희생이 없는 사회를 자유의 사회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누군가를 위해 땀흘려 일하지 않는 것에 의의를 느끼는 것 또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 무책임적 자유가 자신에게 독이 될 것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책임지지 않는 것이 멋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책임져준 부모를 거역하고, 그들이 지금까지 준 돈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누군가의 값과 희생에 대해 부인을 하다보니, 그것은 곧 자신이 지금까지 자랄수 있었던 근본의 싹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무책임의 사회. 표현의 자유와 익명의 사회 속, 자신이 진짜 표현할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 부재한다. 정말 세상에 영향을 주기 원한다면, 즉각적인 반응과 무질서의 삶을 살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서라면 지식을 길렀을 것이다. 자신이 치우치지 않기 위해서 전문가의 이야기를 듣는데 전문성 혹은 사람에게 배우는데 힘을 썼겠지만, 사회는 게으름 속에서 핸드폰이나 만지작 거리는게 전부이다. 그러면서 익명 아래에 댓글을 다는게 바로 민중의 소리이자 영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자유라고 착각한다. 책임지지 못할, 살아내지 못할 감정을 쏟아붇고 표현하는 것을.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영웅적 행동이라고 착각한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받은 희생과 은혜를 없다고 취급하고, 자신은 남을 기르고 돕는데 전혀 나몰라라 한다. 그들의 계산법은 이와 같다.


1+1= 2이다.

1+1 =1이 아니다.


나의 자유에는 누군가의 책임과 투쟁이 늘 존재했다.


그러한 자유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자신과 이 나라,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이 그냥 당연히 존재하는거로 착각한다. 자신의 몸조차 누군가가 준 헌신이 담겨있는 것이라는 것을 인지를 못한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무료인 세계에서 더 행복과 자유와 간섭하지 않을 자유를 추구한다. 시간을 낭비한다. 기분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그 것에 대한 결과는 참혹하다.

자신 스스로는 행복하지 않으니, 자신의 몸을 해하는 짓이나 담배를 피면서, 자신은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름답다고 말을 하고, 이것이 자유라고 말한다. 자신이 지금 존재할수 있는 것과 자신이 서있는 모든 것은 누군가의 땀 흘려 일해서 있는 것인데, 정작 자기 자신은 자신의 몸을 해하면서, 남들에게 나는 좋은 사람이라고 말을 한다. 이런 모순이 어디있는가! PC주의가 매력이 없는 이유는 책임이 없기 때문이다. 더이상 슈퍼히어로가 히어로가 아닌 이유는 힘에 대한 책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여성 혹은 남성이 매력없어지는 이유는 평등을 강조하며, 힘 있는 사람이 약자를 지켜야할 책임과 의무를 던졌기 때문이다. 요즘은 그런 자유, 스스로를 사랑하는 코드를 너무 기뻐한다. 주토피아2도 경찰이 경찰 외의 일을 하고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것처럼, 일탈과 일생에서을 도피하기를 원하며, 그것이 자유라고 몰입을 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것이 바로 중독이다.

사람과 젊은 세대, 대학생(나는 현재 대학생이다). 자신의 책임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밥 벌고, 되도록이면 돈 쉽게 많이 벌 생각을 한다. 누군가를 위해서 헌신하여 만들 생각도 안하니, 공부도 보일만큼만 한다. 이유도 목적도 없으며, 자신을 사랑하는 것, 곧 self love를 하며 자신을 꾸미는 것과 겉 실적을 꾸미는 것에 집중하고, 그것을 영향력이라고 칭한다. 이 사회는 보이지 않지만 붕괴하고 있다. 낮은 출산률, 곧 이 사회에 대한 책임에 대한 도피. 아파트 값과 들어갈수 없는 것 등. 돈을 뺏고자 하는 자들이 가득하지만, 책임을 가지고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은 적어도 적다. 그것이 이 사회의 현재 상태이다. 자신이 짐을 지는 사람은 어디 없을까? 자신의 욕구와 자신만의 신을 만들어 숭배하는 사람이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배할 믿음의 사람은 없는가? 자신이 무료와 공짜를 밝히며, 자신의 시간을 그냥 쓰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전문성의 역할

전문성이 사라지고 있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책임에 대한 가치가 희석되니, 전문적인 사람들이 이미지는 더이상 책임감 있는 믿을수 있는이 아니다. 장인 정신도 없다. 그냥 어떻게든 자신은 일을 덜하고 내 돈을 뜯어 갈 것 같은 이미지가 가득하니 돈을 쓰기가 더더욱이면 싫다. 이러한 태도는 개인에게도 사회의 경제활동의 당위성 또한 훼손시킨다.

나는 진심으로 질문하고 싶은 것이다. 진정한 투자는 겉에 보이는 반짝이는 활동이 투자가 아니다. 멋있어 보이는 대학생과 친목을 하는 것도 전혀 남지 않는다. 나는 그런 마음으로 영화계에서 처음에는 친목을 다졌었다. 하지만 시간의 지남에 따라서 그런 겉에 있는 가치를 따라서 하는 사교는 남는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들도 김가차와 같이, 상대방의 특별함에 자신이 매몰되기를 원하면서, 다른 사람을 속이고, 준비되지 않은 것 가운데 초대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를 나의 이벤트에 초대하고 싶은가? 그러면 해야할 일은 정말 간단하다. 준비하는자가 되면 된다. 하지만 물어보면, 준비하지 않고, 게임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시간이 그저 흐르는데로 놔둔다. 그래도 하나님(신)을 사랑하고 올바르게 살아가고 싶은 마음은 있다. 마음만 있다. 그래서 자신이 나름대로 행동을 한다고 하면서 하는 짓은 장기적 투자가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지는 연락등과 같은 것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의사와 비교를 해보자. 의사는 그렇지 않는다. 길거리에 누가 아픈지 눈이 불이나캐 찾으러 돌아다니지 않는다. 왜냐? 자신의 병원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세운 병원에는 간호사부터 시작해서 시스템이 있다. 그래서 환자를 그곳에서 기다리면 환자들은 다 거기로 모여서 들어온다.

나는 그 공동체의 무시를 통해 동기를 얻었다. 좌절도 많이했다. 내가 나의 능력을 쌓고 그들을 도와줄수 있도록 작업물과 프로젝트를 실천해낼수 있는 운동력이 없으니 그들에게 할말도 없었다. 내 스스로가 너무나도 한심해보였다. 나는 무시당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돕고자 하는 욕구, 일하고자 하는 나의 본성을 갓난아기 취급하며 젖병을 얼굴에 드미는 것이 싫었다. 물론 모두가 나같은 것은 아니다. 애정을 갈망하기에 애정과 사랑을 갈망하는 사람 또한 존재한다. 하지만 나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여러분들 모두에게 그러한 사실을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의 전문성과 내가 나의 직무와 존재에 대한 이유를 잘 논증할수 없다면, 사람들은 여러분들을 노예 혹은 갓난아기가 있는 곳, 신생아실에 여러분들을 넣고 처분을 하려는 곳이다. 지금 개인화의 시대에는 더이상 단순한 노동을 하는 것으로 어디에 가서 말을 할수 없다. 기계가 할 것을 왜 너가 하는지 물으며 이상한 눈으로 볼 것이다. 나의 존재에 대해서 신실하게 일하는 태도, 증명되는 자격은 그러므로 중요하다.


성장 vs. 안락함 (1만 시간의 법칙)

중독 혹은 수많은 경험들, 심지어 게임을 한 경험들이 나에게 이길수 있는 경험이 될 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여정을 실력적인 성과로 본다면 완전히 틀렸음을 이야기 하고 싶다. 1만시간의 법칙의 실패에 대한 논증을 보게 된다면, 단순한 반복하는 1만시간이 아닌, 스스로를 불편한, 즉 자신이 기존에 알지 못했던 방식으로 도전시키는 것을 내포한다. 어떤 전문분야에서도 그러한 스펙트럼을 띈다. 자신이 편하고 잘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자신이 전혀 하지 못하는 분야나 알지 못하는 분야를 할때 그때 스트레스와 함께 성장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런즉 중독, 오히려 불편함을 회피하며, 자신의 학문적인 부분을 배우기 위해서 노력하기보다는 늘 똑같다. 음란물 중독인 사람은 늘 같은 것을 보지, 더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그러한 음란한 사업과 매체의 형태 또한 늘 똑같은 값싼 욕구를 통해 사람들을 끌고, 또 자신과 같은 경쟁자가 많이 생기면 도태되는 방식은 늘 있어왔던 사실이다. 한번 시험하며 지켜보아라, 지금 대단한 인기를 끄는 듯한 외모로 인기를 끄는 사람이 자신의 개발을 하지 못했다면, 35살 정도 되어서는 활동을 중단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뉴페이스가 주는 단물을 다 빼먹어서 이제는 재미가 없다고 보통 상황을 표현한다.


사람들은 공간을 통해서 영향을 받는다. 이런 조건들, 사람들은 영향을 받기 때문에, 영향을 받을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 또한 실력이라는 것을 알것이다. 내가 나의 비전과 목적하는 바를 달성하고자 하는 친구들, 또 그러한 공동체에 속해있다면, 함께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나는 내가 생각한 꿈을 달성하는 방향으로 더 가까이 갈 것이다.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을 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자신의 전문성을 지닌 직장이 있거나, 자신의 자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는 상대적으로 뭔가 재능이 있고 있어보이고 싶은데, 겸손하지를 못해서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게 좋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나보다. 그래서 나한테 이 공동체에 오라고 많은 초대를 하였다.

현재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도서관에서 나와 다른 사람만 있다. 밖은 겨울이어서 벌써 어두워졌으며, 나의 동료와 친구들은 다른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도 지금 채플을 드리고 싶다. 나도 그곳에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후회를 통해서 나는 깨어지고 깨닫게 되었다. 내가 허투로 보내고, 오늘만 흘려보내면 괜찮아라고 합리화를 시켰던 하나하나의 시간과 기회들, 곧 내가 심은 것으로 말미암아 나는 낙심이 되었다.

고등학교 때 반강제적 절제, 시험기간에 보았던 짜릿함 처음 3일은 좋았다. 높아진 욕구로 인해 더이상 할수 있는 것이 사라짐. 이렇게 중독이 되기 쉬운, 생각하지 않고 결정하면 중독의 길을 따라가기 쉬운 세상 속에서 나도 중독에 빠져있었던 것 같다. 과정에 즐거움보다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결과를 중시하였기에 오늘을 느리게 가는 것 같았다면 답답하고, 늘 ‘얼른 달려나가야 되는데’ 라는 부담감이 마음속에 존재했었다. 부담감 만큼 조급하고 실수를 많이 하는것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이 부담감이 더 좋은 성과로 이루었는가? 아니다. 그런적이 거의 없다.


IV. 結 (결론) - 진정한 기쁨을 찾아서: 참된 가치와 중요성

세상의 물질이 실존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컴퓨터 세상의 치트키가 존재하는 곳에 있지 않는다. 모든 돈과 기회에는 이유와 근원이 있다. 우선순위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 항상 공평한 것과 같은 것이다. 노력하는 만큼 일하는 것 _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은 바로 동등하고 동하게 말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행복이란 것은 바로 노동을 하면서 자신이 일을 하고, 그러한 것의 중요성이다. 정금과 같은 단련과 고난은 바로 고난을 통해서 나오는 연단의 사람이란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 타인을 위해 단련받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우선순위에 대해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 나의 마음은 어느쪽에 속해있는가? 무엇이 더 집중을 하고 싶어하는가? 그것이 사람에게 있어 중요한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한동안 아침에 일어나는 것을 힘들어 했었다. 예정된 시간보다 훨씬 늦게 일어날때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미 충분히 이른 시간에 일어났음에도 마음에 생각하고 있는 완벽한 성취에 비하면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실망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나의 과정에 대한 믿음을 두고, 현재의 기쁨과 짜릿함에 집중하지 않았다면 더 나은 선택을 할수도 있었지만, 결과가 중요한 세상에 살다보니 언젠가 과정과 묵묵히 걸어가는 것보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을 빠르게 붙잡으려는 그리고 마침내 어느 순간에 나는 늦은 시간의 기상을 보았을때 두렵지 않았다.

두려움이 찾아오려고 할때 마음에 새겨말한다, 결과가 중요한게 아닌 한걸음을 내딛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그렇게 7시반에 눈을 뜨게 되었을때 내 마음에 이게 참된 기쁨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주어진 모든 것…

* 구독과 좋아요 덕분에 글을 완성해나갈수 있었습니다. 글을 적는 과정이 멘탈적으로 쉽지는 않습니다. (무거운 내용이다보니)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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