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 사회 _ 완벽한 정의란 세상에 존재하는가?

완벽주의의 실패. 참된 정의와 의인이 어디 있을까? 누구일까?

나는 완벽한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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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에 대답하기 이전에 사실은 '사람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고' 반문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의로운가?


이것에 대한 질문을 답할수 있겠는가?

...


걱정하지 마라. 이 글을 쓰고 있는 장본인도 의롭지 못하기에

그 의로움에 대한 갈망과 투쟁을 잘 공감한다고 생각한다.


군대에 복무를 할 당시에 그것은 커다란 질문 중에 하나였다.

만일 국가가 내일이라도 전쟁이 일어날수 있는 상황에 거짓말을 대놓고 치는 후임들이 있다고 했을때,

나는 후임을 위해서 함께 거짓말에 동조할 것인가?


유도리가 있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거짓을 보태는 것이 원칙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느정도의 규모의 사기 혹은 손해가 납득이 될 만한 선택인가.


내가 사기를 쳐 속여서 남의 통장에 남아 있는 앉아있던 돈을 어쩌다보니 내가 얻게 되는 것은 괜찮은 것인가?


동네에서 중고 마켓에 물건을 올리게 되었는데, 기존의 물건보다 올려서 팔게 되는 경우에는 어떠한가?

잘 알지 못했다는 생각과 말과 핑계로 인해서 내가 남에게 이득과 유익을 보는 행위는 어떠한가.


나의 잘못과 과오를 어떻게 씻을 것인가.


마음의 찜찜함만 남아 있을 뿐이다.


vivid_wave_______--chaos_25_--ar_169_--profile_bfdscdn_bcxu6l_7384fc70-6e75-490e-a61e-61e84a6a56af_2.png 인류의 개척은 과연 옳은 것인가? (일제강점기와 미국의 개척의 차이란?)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책에서는 인류의 의로움(righteousness)은 상대적이라고 말한다.

상대적, 즉 누구보다 더 혹은 덜을 통해서 내가 의로운지 아닌지를 비교를 통해 결정한다는 것이다. 의에 대한 개념을 인간이 말하는 의로운, 마땅히 해야 되는 결정은 온전하지 못하며 모순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인간이 말하는 ‘의로움’이 결국 상대적인 관념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선한 선택처럼 보여도, 그 이면에는 언제나 모순과 불확실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파헤친다.

인간은 본래 완벽한 것을 원한다. 또 인간은 본래 완벽을 갈망하기 위해 지어진 존재였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은, 본능적으로 완전함을 갈망한다. 그러나 타락 이후, 완전한 빛에서 멀어지자 그 갈망은 찢겨진 형태로 남았다. 창조자와의 단절은 단순히 ‘신과의 거리’가 아니라, 내 안의 공허가 회전하며 '더! 더!'를 외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전도서 3장 11절 (개역개정)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Ⅰ. 존재의 비합리성: 불확실성의 시대적 고통


이러한 근원적인 완전함의 부재는 개인의 실존과 사회적 구조 모두에서 불확실성이라는 고통으로 발현된다.

개인적 경험에서도 이 괴리는 명확하다. 근래 나는 학교에서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었다. 한동안 나는 학교에서 한 여학생을 좋아했었다. (먼저 말하자면, 지금은 그랬던 것을 후회한다)그녀가 예뻐서가 아니라… 함께 대화하는 순간마다 마치 퍼즐이 맞춰지듯, 나에게 꼭 필요한 조각이 내 삶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다른 것은 둘째치고 .. 그냥 .. 같이 대화를 하다 보면 그녀가 나에게 있어서는 신과 같은 존재처럼 느껴졌다. 마치 레고 피스가 연결되듯이. 심지어 기도를 시작할 때조차, 그녀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나는 기도하는 가운데에도 그녀가 먼저 생각이 났다.


사실 누군가를 좋아할수 있는거는 자신의 자유가 아닌가?


그 마음이 죄인가? 성경적으로는 ‘사랑’ 그 자체는 죄가 아닌가? 하지만 성경적으로 따지고 보면, 내가 그 친구를 좋아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때 당시에 나는 내 스스로를 압박했던 것 같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돌아보았을때 나는 소유하고자 하는 강박이 있었다.


나는 내 마음을 단속하지 못한 채, 그녀를 통해 무언가를 얻고자 했던 내 욕망이 있다는 것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느꼈다. 이것은 사랑인가 불타는 이기심인가. 그래서 결국 나는 포기했다. 근데 .. 결론적으로 포기하고 나는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내 모습.. 어쩌면 죄 아니면 욕심 있는, 보이는 대로 행동하고, 느껴지는 대로 반응하는 나. 보이는 대로 행동하고, 보이는 대로 느끼고 싶었던데로 살아간 내 자신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 나는 그 모습 자체를 '죄'라고 명하며, 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완전함에 대한 집착은… 결국 나를 더 불완전하게 만들고 있었다.


'저 멀리에 살고 있는 누군가는 완벽한 하루를 보내고 있겠지. 나는 왜 한쪽이 무너져있을까' <재의 도시 中>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창조자와의 단절 하나님과의 단절로 인한 마음의 결과물은 계속해서 회전하며 '더! ' '더!'를 구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당위성을 스스로 복잡하게 증명하고 싶어한다. 스스로 수많은 질문을 던지며 그 질문의 꼬리들을 잇는다. 내가 어릴 때, 나는 그 ‘더’를 따라갔다. 과거 고등학교때는 그래서 잘 보이고 싶었고, 강해 보이고 싶었다. 심지어 남에 대해 있지도 않은 사실로 욕을 하며 내 자신의 우월감을 느끼려고 했었다. 너무나도 한심한 본능이다. 남을 무시함으로서, 남에 대해서 깍아내림으로서 남을 비참한 존재로 언급함으로서 내가 선다고 상상하는 모습.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고등학교 졸업만 하면 사라질 바람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미래란 없었다. 지금이 중요했다. 지금 보기에 내 주변에 2-3명 되는 친구들에게 내가 인정을 받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남에 대해서 실컷 욕을 하니 말이다. 복도에서 스피커로 노래를 틀고 복도를 횡단하면 어깨가 으쓱해지는 느낌을 따를 뿐이다.


나는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이런 나의 과거의 모습을 보고 나를 비난해도 나는 떳떳하다. 나는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속으로부터.


당시에 아무도 그것을 ‘공허함에 대한 표출’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세상은 공허하고 법칙을 원하기에 사람은 섹스를 갈망하게 된다. 누군가에 대한 정복적 의지에 대한 거대한 야망이다.


사람들은 영원한 것을 갈망한다. 오늘 늦은 밤 새벽에 편의점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일하시는 내 어머니뻘 정도 되시는 여성분이 스님이 예언한 한국의 통일에 대한 무슨 용머시기 한 판타지스러운 예언을 듣고 있었다. 왜 그런 것일까? 왜 거대한 것을 바라는 것일까?


인류는 소속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근래에는, 사람들이 종교에 눈길을 다시 돌리는 추세를 보여준다. 요즘 사람들은 종교에 다시 눈길을 준다. 공동체는 한때 축구 국가대표 경기를 보며 하나 되었다. 같이 응원할수 있는 방향을 일시적으로 찾은 것과 같다. 고등학교 때는 누가더 미친짓을 하나등에 대한 모습을 드라마에서 보면 볼수 있다. 학교 폭력도 사실 자신을 증명하고 싶은 수단을 악랄하게 소중한 남을 이용한 것이다. 공동체에서 원래는 같이 무언가를 응원하거나.. 2001 월드컵 등을 통해서 의미를 찾았던 것 같다. 응원과 지향과 소비를 통해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보다는 바쁨으로 그 질문의 답을 대체한다. 그런 걸 생각할 틈이 어딨어. 난 가난해. 나는 바빠. 나는 누구보다 바쁘고 많은 것을 내 뇌에 쑤셔넣고 있어.

이러한 방식으로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과포화 상태의 개인이자 사회이다.


이젠 그 자리에 가짜 뉴스, 인플루언서, 알고리즘의 피드백 루프만 남았다.

가면 갈수록 근데 온라인은 믿을 만한 공간이 안된다.
경제 위기가 폭격처럼 일상을 덮치고, 코로나와 함께 닥쳐오는 위기가 쾅! 하고 내려찍고 .. 사건 등을 통해서 연예인들의 불온전함을 끊임없이 마주하다 보니.. 연예인들도 거룩하지 않으며, 미디어도 다 보여줄 걸 보여준 시대. 그리고 미디어도 이미 나올 것이 다 나와 더 이상 비교할 게 없는 사람들. 이미 개인적으로 전부 보급이 되어버린 AI. AI조차 인간보다 더 정확하고 조리 있게 말하니까. 누구도 더 이상 '완전함'을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완전한 게 없다고 느껴지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인간관계? 가족? 그런건 시시콜콜한 것은 이제는 내게 상관도 없다. 뭔가 커다란 것을 구해야만 입증을 할 것이다. 남들도 그렇게 살기 때문이다. 그것도 트랜드의 흐름에 따라서 물론 바뀐다.


이번에 배우 엠마 왓슨이 소수 성애자를 지지하다가, 대중의 시선이 변하니 5년만에 자신의 입장을 바꾸고 대중의 입장을 따르는 것처럼 말이다. (출처 : 유읽남 유튜브)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은 나치 수용소에서 생존하며 "인간의 가장 큰 동기는 쾌락이나 권력이 아니라, 의미를 향한 의지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사실 권력을 향한 욕구 이면, 깊은 곳에는 완전하고 싶은 갈망으로 인해, 나를 증명하지 못할 것에서 최고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레 내심스레 잘되고 싶은 마음, 1등이 되고 싶은 마음과 욕구들이 존재한다. 아니, 그 욕구를 통해서 내가 굳이 그 질서 속에서 (고등학교와 같이 일시적인 질서) 1등이라는 계산 결과를 통해서 나에 대해 증명을 하려고 한다. 마치 소의 육질 품질을 A급으로 받는 것처럼 말이다.

카뮈는 신이나 영원한 도덕률 같은 외부의 완벽한 기준이 부재함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반항과 열정을 통해 삶의 가치를 스스로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완벽함이 사라진 시대, 그럼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쯤에서 물을 마셔야 목이 시원해질까? 라는 물음을 던지며 완전함을 포기할 것을 촉구한다.


[사실 완벽한 인간은 없다. 추후 글에서 그 내용에 대해 이 책에서 다룬다]



이후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Reinhold Niebuhr)가 남긴 기도는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인간이 최선을 다했다고 믿는 선택이 결국 '양심의 한계'에 봉착함을 보여준다. 그의 기도는 이러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과, 바꿔야 할 것을 바꾸는 용기, 그리고 그 둘을 구별하는 지혜를 주십시오.'

이 기도문은 1930년대 후반이나 1940년대 초에 니부어의 설교를 위해 작성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 군목 자료에 포함되거나 금주협회(Alcoholics Anonymous, AA)에서 채택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 '양심의 한계'와 니부어 사상의 연결

배경 사상: 니부어는 인간의 도덕적 한계와 집단의 비도덕성을 강조하는 기독교 현실주의(Christian Realism)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그의 저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에서 보듯이, 그는 개인의 양심과 도덕성은 있지만, 인간이 모여 만든 집단이나 사회는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며 비도덕적일 수밖에 없다고 보았습니다.

기도의 의미: 따라서 이 기도문은 불완전한 현실과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신앙의 현실주의적 태도를 보여줍니다. 인간의 노력과 의지로 바꿀 수 없는 거대한 사회 구조나 고통(즉, 인간 양심의 한계가 도달한 지점)에 대해서는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수용이 필요하며, 동시에 바꿀 수 있는 부분(개인의 책임이나 구체적인 부조리)에 대해서는 용기를 내어 행동해야 한다는 실천적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기도문은 인간이 최선을 다했다고 믿는 선택이 결국 '양심의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는 이중적인 현실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지혜롭게 행동하기 위한 처방이라고 볼 수 있다.


과연 이 땅에서의 시원한 물이 있을까? 제자 요한의 책, 요한복음 4장에서는 사마리아 여인(이방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 예수는 이스라엘도 아니고, 여기 이 신성하다고 하는 산에도 그 물은 없다고 한다.


‘시원한 물’은 없다. 완전함은 없다. 불완전한 세상 속, 완벽과 TOP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내 스스로에게 달성할 수 없는 목표를 위해 우리는 하루하루 “지금 나는 불행해”라고 정의하며 살아간다. 완전한 모습보다는 부족한 모습을 앞세워서 본다. 스스로는 완전해지고 싶은데, 도달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멈추자니 불안해서 계속 걷는다. 이루지 못할 목표 앞에, 계속해서 나를 “덜 된 존재”로 선언하게 되는 것.

그 나를 향한 과거의 죄책감만이 나의 불완전함의 죄를 씻을 것 같다.


결국, 우리가 오직 '불완전함'이라는 렌즈를 통해서만 대상을 바라보기로 작정한다면, 누구도 비참해진다.

농구 황제로 불리는 마이클 조던의 경력조차도 예외일 수 없다. 그는 스스로의 입으로 "나는 선수 생활 동안 9,000번 이상 슛을 놓쳤고, 거의 300번의 경기에서 졌으며, 결승 슛 기회를 26번이나 놓쳤다"라고 고백했다.

우리가 그의 6번의 우승수많은 성공은 지워버린 채, 이 1만 번에 가까운 실패의 기록26번의 결정적인 순간의 좌절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가 아니라 그저 끊임없이 넘어지고 실패한 선수로 규정될 뿐이다. 완벽이라는 기준 앞에서, 그의 경력은 결국 데이터화된 수많은 실패의 덩어리이며, 우리가 쫓는 '완벽'의 그림자와는 거리가 먼, 정말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불완전한 기록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Ⅱ. 완벽한 기준의 강박: 통제와 윤리적 마비


완전함에 대한 갈망이 좌절될 때, 인간은 그 공허를 메우기 위해 외부에서 완벽한 '기준'이나 '통제'를 찾게 되는 실수를 범한다. 엔트로피의 세상에 통제라니.

나는 종종 생각한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풍요롭고 안정된 일상이 언제든 갑자기 박살날 수 있다는, 혹은 완전히 빼앗길 수 있다는 가능성은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왜냐하면 세상의 기술이 발전할수록, 그것을 다루는 인간의 힘과 역량 또한 극단적으로 강력해지며,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불확실성 역시 무궁무진해지기 때문이다.


� 역사가 증명한 낙관론의 붕괴

실제로 인류는 이러한 맹목적인 믿음이 얼마나 위험한지 이미 경험한 바 있다.

19세기 말 낙관론: 19세기 말 소위 벨 에포크(Belle Époque) 시대를 살았던 서구 문명은 기술 발전이 인류에게 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계몽주의적 낙관론에 깊이 빠져 있었다. 대량 생산, 철도, 공중 위생 등 눈부신 기술 발전 속에서 '인류에게 과연 무슨 문제가 있을 것인가?'라고 자문했다


하지만 ...

1차 세계대전의 충격: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처참하게 산산조각 났다. 발전된 과학 기술은 평안 대신 기관총, 독가스, 잠수함 같은 대량 살상 무기로 변모하여, 불과 4년 동안 2천만 명에 달하는 인명을 앗아가는 비극을 낳았다.


�️ 인간성으로의 회귀와 미래의 예측

결국 인류는 기술 그 자체가 아닌, 그것을 다루는 인간성(Human Nature)과 그 본질적인 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기술을 진보의 신으로 숭배하는 것은, 그 신성한 도구를 사용하는 불완전한 인간이 누구냐에 따라 최악의 실패로 바뀔 수 있음을 역사는 값비싸게 증명했다.

나는 앞으로 더 혼란스럽고, 지금 우리의 풍요로운 일상을 근본부터 뒤흔들 정도의 커다란 전 지구적 위기가 다시 한번 다가올 것이라 예측한다. 그리고 그 거대한 혼란의 끝에서, 인류는 기존의 시스템을 강제로 해체하고 재구축하는, 이른바 'The Great Reset'을 시도하려 할 것이다. 앞으로의 진보된 기술을 통해서 인류의 모든 생산을 통제하는 결정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기술력은 커지고만 있고, 이제 더이상의 전쟁이 일어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 인류를 기술 속에서 통합을 하고, 기술을 신으로 만들 것이다.

이는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절망 속에서 저지를 수밖에 없는, 가장 멍청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근본적인 결정이 될 것이다. 가장 인간다운 선택이다.


기술적으로 인류 통제는 가능해지고 있다.
당연한 결과다. 인간은 원래 올라가려고 한다. 서로가 견제되니 그렇게 하기 어려운 것 뿐이다. 질서와 통제가 없는 인간의 불법 행위는 어디까지 갈지 모르는 법이다. 그래서 지혜는 자신을 관리하는 것이다.
과도한 힘. 그는 모든 것을 다시. 모든 세상을 다시 세우고.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리고, 더 이상 흔들리지 않도록, 완전하게 통제된 세계를 세우려 들 것이다. 완벽한 통제 사회를 바라는 사회가 오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 실수도 없고, 실패도 없게 하자’는 이름으로 말이다. 태어날때부터 완벽히 조작된 인간을 만들자.

이러한 통제 사회의 유혹은 러시아 작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Fyodor Dostoevsky)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대심문관(Grand Inquisitor)' 에피소드에서 극명하게 비판된다. 대심문관은 인간이 자유 의지로 인해 고통받고 불행해지기 때문에, 차라리 그들의 자유를 박탈하고 빵과 확실한 행복(완벽한 통제)을 제공하는 것이 더 자비롭다고 주장한다. 대심문관은 “자유와 빵. 누가 더 강하겠는가?”라고 물으며, 통제된 행복이 인간의 본능적인 갈망을 충족시키리라 확신한다.


vivid_wave_A_darkly_atmospheric_and_intensely_symbolic_oil_pa_fcb95f15-e8bc-4e7e-afc8-69983a8adc84_1.png '우리에게 빵을 주세요... 저희는 당신이 시키는데로 하겠습니다.'


그것이 정말 답일까? 요즘 내가 다시 읽은 소설 《거대한 트라이 팰리스》는 그 상상을 다룬다. 질서가 지나치게 잘 유지되는 사회. 감정은 억제되고, 욕망은 코드화되고, 시민은 ‘이상적 인간’으로 길러지며, 모든 선택은 시스템이 대신해준다. 읽는 내내 나는 섬뜩했다. 지금 글을 쓰면서도 나는 그게 답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아… 이게 맞는 거 아닌가?’ 하는 유혹이 분명 있었다. 정해진 스케줄, 지연 없는 피드백, 질병도 없는 도시. 누구도 고통받지 않는 세상. 언뜻 보면 좋고 행복해보인다. 19세기때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곧 깨닫게 된다. 통제는 답이 아니다. 왜냐하면 통제 뒤에는 마음으로의 잔혹성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모든 것을 풀어버리려는 잔인한 욕구로 인해, 말할 수 없는 억울함이 쌓이고,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누군가는 시스템을 부숴버리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갈망은 결국, 인간을 고립시키고, 단절된 개인으로 만든다. 인간과의 모든 관계는 끊어져 버리고, 결국 나를 우상화 시키는 단절된 사회가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우월하다’, ‘나는 오류가 없다’고 믿는 사람들만이 남는다. 그 모습은… 마치 공산주의 체제 안에서 드러났던 부조리와 똑같다.
공산주의와 독재의 부조리도 마찬가지이다. 정의로 출발했지만, 감시와 침묵 속에서 정의는 가장 먼저 사라졌고, 무고한 이들이 그 뒷감당을 했다. 자신의 몫을 챙기는 고위관료의 부패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아사한 중국의 사건도 알 것이다.


이 부분은 내 비서가 더 잘 알려줄 것이다.

주어진 정보와 언급하신 키워드 ("중국인들이 아사한 사건," "고위 관료의 부패," "공동 주방 방식," "공산주의와 독재의 부조리")를 종합해 볼 때, 사용자님께서는 중국의 대약진 운동(Great Leap Forward, 1958년~1962년) 기간 동안 발생했던 대기근에 대해 질문하고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건은 언급하신 것처럼 공산주의 체제 하의 정책 실패, 지도층의 강압, 그리고 부패가 결합하여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낳은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입니다.


�� 중국 대약진 운동과 대기근 (1958년~1962년)

1. � 사건의 배경 및 정책적 원인

대기근은 마오쩌둥(毛澤東)이 주도한 대약진 운동의 결과로 발생했습니다. 이 운동의 주된 목적은 짧은 시간 안에 중국을 농업 중심 사회에서 선진 공업국으로 변모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인민공사(人民公社) 및 공동 식사제: 농민들을 거대한 집단인 인민공사에 강제적으로 편입시키고, 사적인 소유와 경작을 금지했습니다. 특히, 언급하신 "공동 주방(大食堂)" 제도가 시행되어 모든 사람들이 함께 식사를 하도록 했습니다.

부조리: 이 제도는 식량 낭비를 촉진하고, 개인의 노동 의욕을 떨어뜨렸으며, 식량 배급에 대한 통제권을 공사 간부들이 독점하게 만들었습니다. 식량 비축 및 관리의 효율성이 극도로 낮아졌습니다.


2. � 고위 관료의 부패와 독재의 부조리

사용자님께서 지적하신 독재와 부패의 부조리가 이 비극을 키운 핵심 요인이었습니다.

허위 보고와 통계 조작: 지방의 간부들은 자신의 실적을 높이기 위해 실제 곡물 수확량보다 훨씬 부풀린 허위 보고(浮誇風)를 올렸습니다. 중앙 정부는 이 허위 보고를 근거로 실제 농촌에 남아있는 식량보다 훨씬 많은 양을 징수했습니다.

간부들의 특권: 공동 주방 제도가 무너지고 농민들이 굶어 죽어갈 때, 권력을 가진 고위 관료나 인민공사의 간부들은 자신들을 위한 특별 식량 창고를 운영하거나 상대적으로 더 좋은 음식을 배급받는 등 부패와 특권을 누렸습니다.

감시와 침묵: 독재 체제 하에서, 정책의 실패를 지적하거나 굶주림을 호소하는 것은 "반당 행위"로 간주되어 처벌받았습니다. 이처럼 강력한 감시와 침묵의 분위기 속에서, 진실은 은폐되었고, 기근의 규모는 더욱 커졌습니다.

3. � 참혹한 결과

사망자 수: 대약진 운동 기간 동안 발생한 기근으로 인해 수천만 명의 중국인이 아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망자 수는 학자마다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2,000만 명에서 4,500만 명 사이로 알려져 있으며,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기근 중 하나입니다.



불완전한 인간들이 .. 원하는 완벽하고자 원하는 욕구로 인해, 스스로의 머리를 ... 잘못된 곳에 쑤셔 박은 결과라고 생각을 한다. 반면 성경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정의를 제시한다. 인간이 온전할 수 없기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하고 은혜로 덧입는 것이 바로 ‘의’라는 것이다. 이 관점은 진정한 의를 행하는 것과 충돌하는 듯하지만, 역설적으로 둘 다 인간에겐 완전한 진실일 수 있다. 둘 다 완전한 것이다.


의로운 인간은 없는 것과,

의로워질수 있는 것은 신의 은혜가 아니고서야 말할 수 없는 것.


완벽하고 싶다. 완전하고 싶다. 온전하고 싶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에 강박적으로 잡힌다. 왜? 우리는 완벽하라고 지어진 존재였기에.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완전한 정의나 통제된 행복이 아닌, 불완전한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마주하고 그 한계를 용인하는 인간적 연대의 자세이다. 통제된 행복을 여전히 원한다면, 중국 대약진 운동과 대기근을 다시 읽어보기를 권한다. 아무리 이게 아니어도 미래에는 누군가 독재를 하게 될 것 같다고 생각한다.

Ⅲ. 필연적인 불확실성과 윤리적 마비
완전하지 못한 인간이 절대적 선을 행하고자 할 때 겪는 문제가 또 있다. 이는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 윤리적 마비는 '선택의 불확실성'에서 비롯된다. 세상은 불확실하다. 내가 투자한게 어쩌면 운 나쁘게 반대로 흐를수도 있다.
가장 큰 전제는 나의 어떤 선택으로 인해 미래의 운명이 바뀔 수 있는 선택이 다가온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가장 중요한 운명을 위한 선택이, 무죄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가능성, 그 불확실성 때문에 선택을 하는 것에 있어서 막대한 무게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종교적인 이야기보다 일상에 조금더 와닿을수 있는 예시의 이야기들을 전해주겠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사건 중 2005년 미 해군 특수부대의 딜레마를 소개한다.

그들은 오사마 빈 라덴의 탈레반 지도자를 찾기 위해 떠나가는 중이었다. 그 여정 속에 특수부대팀은 아프가니스탄 농부 2명이 약 100마리의 염소를 몰고 나타난다. 마주치게 되었고, 이 주민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군대의 행동지시 원칙에 따르면. 이 농부들이 순전하게 자신의 갈 길을 갈 수도 있을 수 있으나, 탈레반 세력에 보고를 한다면 큰 위험이 될 것이기 때문에 주인공, 추후 유일한 생존자는 큰 고민에 빠졌다.
상관의 지시에 따른다면 그들을 죽이는 것이 맞았겠지만 양심의 이유로 인해 결국 그들을 놓아주게 되었다. 그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채 1시간 반도 되지 않아 휴대용 로켓 발사기로 무장한 군인 80~100명에게 포위를 당하게 되었다. 군인 중 3명이 목숨을 잃고 미군의 헬기가 격추를 당해 16명이 죽게 되었다. 그리고 이 글을 쓴 저자는 산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바람에 간신히 목숨을 건져 이 내용을 책으로 쓰며 끔찍하게 자신의 선택에 후회했다고 고백을 하였다.

참... .... 아찔하다... 나였다면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만약 그 상황이었다면.

나였더라면 .. . 나의 동료들이 죽는 꼴을 보게 되었겠지. 거짓말이 팽배한 곳에서 대체 어떻게 ... 누가 선인지에 대해 어떻게 분간할 것인가 .. . 생각해도 막막하다. . . 전쟁이란 그런 건가. 무죄한 사람을 죽일 수 있겠는가? 무죄한 사람을 자신을 위해서 죽이는 것이 아닌가?



...


FPS 게임처럼 사람을 실제로 죽이는 것은 전혀 즐겁지 않다. 국가가 선택한 전쟁에 참여하는 것 뿐이다.

이야기가 너무 무거워졌다면 미안하게 되었다. 그냥 내 생각을 깨는 얼음을 위한 망치라고 생각하자.

그럼 다음 비유다.
이를 설명한 또 다른 비유가 있다.


만약 기차가 선로를 지나가고 있다.

한쪽에는 5명의 무죄한 인부들이 있고 선로를 바꾸어 한 명의 인부를 향해 기차를 돌릴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합리적으로 봤을 때는 한 명이 옳을 것이다. 5명을 위해서 한 명의 목숨을 희생하는 것은 옳은 선택으로 보인다.


...
하지만 이 책에서는 이 같은 한 명을 희생해야 되는 상황을 조금 더 바꾸어 제시를 한다.

만약에 상황을 바꾸어 내가 기차의 기장이고 5명의 인부를 향하고 있는 기차를 운행하고 있다. 옆에 동료, 덩치가 큰 동료를 보며 이정도 덩치라면, 기차 밑으로 끼게 된다면 기차는 멈출 것이다. 그래서 기장은 덩치 큰 사람이 안보는 틈을 타 힘껏 밀어서 떨군다.

선로 위에 옆에 서있는 덩치가 큰 사람을 밀어 죽이는 선택이라면? 5명이 살릴 수 있다는 상황을 전제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 선택은 잔인한 선택으로 보일 것이다. 전혀 공정치 않은 의롭지 않은. 물론 솔직히 그런 행동을 하면 나중에 살인죄로 처벌될 것 같기는 하다 ... 아주 긴박한 답답한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물건과 같이 보게 만드는 상황, 잔인한 질문.. 정말 회피하고 싶은 질문이다. 전쟁의 상황은 아쉽게도 그렇다. 어떤 존재를 존재, 신뢰할 수 있는, 살아있는이 아니라, 정보를 운반하는 미개한 골치 아픈 기계로서 봐야 하는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아까 상황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누군가는 희생을 당하게 될 상황에 있어서 어쩌면 내가 누구를 기차에서 밀어 죽일 것인지에 대한 말과 같은 것이다.

그 사람과 직면하기 전까지는 사실 오늘날 사회를 살아가는 누군가의 보이스피싱이, 혹은 내 마음의 동기도 남을 '물건'으로 취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편함을 주는 존재 말이다.

내 삶에서의 적용을 생각해도 그러하다. 나는 돕고 싶은 가족이 있다. 나의 어머니가 있다. 그리고 주변에 내가 돕고 싶은 사람들도 존재한다. 나의 재능을 가지고 도와주고 싶고 때로는 그 도움이 즉시 필요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존재하기도 한다. 당신이라면 그러한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가? 그런 가까운 가족을 두고 방에 들어와 영상 작업을 시작할 때 쯤이면 그런 질문이 들게 된다는 것이다. 과연 내가 이 주변에 소중한 사람들을 언제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것을 외면하고 나대로의 일을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이것은 사소한 것이었지만, 앞으로의 선택의 폭과 책임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 심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어떤 선택을 위해서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을지에 대해 그리고 그 선택으로 인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른다는 것 이 두 가지 이유가 어렵다는 것이다. ‘과연 이 선택이 최선이었을까?’ 이 불확실성은 멀리 있는 중요한 일에만 해당된다고 생각할 수 도 있지만 사실은 매우 가까운 일에도 포함이 된다. 바로 일상 가운데 작은 선택이다. 그 고민 때문에 매번 선택하지 못한다. 오늘의 작은 것을 희생해 거룩하고 짠맛을 내지 못한다.

불확실성 때문이다.

Ⅳ. 결론: 불완전함을 걷는 존재

나를 미워하는 친구가 있는가?


나는 이전에 대학교 2학년 때 한 친구가 나를 죽도록 미워했다.

그 친구는 나에게 욕설을 퍼붓고 너는 반성할 기미가 안 보인다며 결론적으로 ‘너의 죄를 안고 평생 죄책감 안에서 살아라’ 라는 말을 했다. 아 물론 그 친구는 ... 트라우마가 많아서 나를 그렇게 놀렸던 것 같다.

나는 생각을 해보았을 때 이 친구에게 더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원수로 여기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그때 당시 첫 번째로는 나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그 친구에게도 지금 내가 그런 말들을 받아주며 연락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친구의 연락처를 차단하게 되었고, 나는 그것이 옳았다고 여기고 있었다. 불확실한 인생 가운데 최선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 어느 날 밤 나는 이 사실에 대해 나누었는데 뭔지 모를 이질적인 것을 보았다.
- 나도 그러한 선택에 대한 후회나 의심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안다.

일상의 순간 가운데 의심 등이 찾아왔었다. 그런 선택으로 인해 정신적인 어려움 가운데 있는 그 친구가 만약 자X을 선택해 내가 다시는 연락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지면 어떡하지? 등의 생각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나는 무시했다. 그리고 무시한 명분은 이와 같았다.

사람은 애초에 모든 것을 알 수는 없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일은 나의 일이 아니기에. 한정적인 내 자신에 맞추어서 내가 집중할 것을 선택한 것이었다.

[내 주변에 정신적으로 아픈 분들이 종종 계셨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내가 이렇게 차단을 한 내용을 동역자들에게 나눌 때,

‘그녀가 자X할지도 모르지만 그거는 애초에 내가 상관할 수 없는 부분이었고 그러므로 나는 선을 행한 것이다.’ 라고 당당하게_ 말이 떨어지지 못했다.

이질적이었고, 억지 같았고, 내 마음속에 양심이 이게 아니라는 것을 알지 않냐고 제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불확실함 가운데 완벽하지 않은 손해를 볼 수 있는 선택을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내 스스로가 확신을 갖고 완벽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나의 불완전함에 대해서 부인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모든 책에서 공통적으로 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인간은 쓰레기 라는 것입니다. <출처 너진똑>

사람에게는 누구나 양심이 존재하고, 찔리게 된다. 무엇이 선인가 그리고 악인가에 대해서 어렴풋이 안다. 하지만 그 선을 행하는데에 있어서, 모든 미래를 알 수 없는 제한적인 인간은 그 선을 옳게 판단할 수도, 행할 수도 없기 때문에, 내가 행한 것이 완전한 선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란 불가능하다. 인류의 불확실성도 그에 한몫한다.


삶에서의 선택 가운데, 그리고 작게는 쇼핑을 할 때도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 대부분의 일도 바로 이 질문에서 온다. 학문은 모호함을 부정한다. 다 알 수 없는 것은 알지 못한다 말하지만 틀릴 수도 있는 사실을 '이게 맞다!' 이게 최선이라고 어떠한 불완전한 기준선을 완전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학문의 영역이지 않나 싶다. 뭐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 그런 방법을 쓰는 것? 인정한다.


하지만 그러한 치우침은 곧 양날의 검이다.


인간의 답은 결국에는 신념을 따라 행동하는 존재밖에 되지 못한다. 누구나 치우쳐져 있다. 인류의 마음은 계속해서 강박적으로 더! 더! 그리고 완벽함을 원한다. 하지만 성경[로마서3]은 그런 인간을 두고 은 그러한 모든 인류를 두고, 바로 치우친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이야기 한다. 웃프지 않은가. 진리를 행동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인간의 마음.. 그래서 열심히 하는데, 열심히 하면 할수록, 열심히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마치 음식물이 썩어지듯 우리를 성경은 율법주의로 쌓이게 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인간은 신앙이 필요한 것 같다. 지금은 괜찮다고 여길지 몰라도, 저러한 불확실성을 당당히 마주할 수 있는 것은 신앙이 아니고서야 안된다고 생각한다. 신앙이 종교에 불과한지, 아니면 치우침인지는 그 신앙의 신이 정말 창조자인지 아닌지를 보고 결정을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신은 과연 운명을 정해 놓았을까? 운명과 자유의지. 나는 무엇인가? 운명은 인간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결정. 잠잠한 게 최고. 정말 지혜가 있지 아니하고서야 잠잠하지를 못한다.


위의 모든 글을 쓰며 나는 하나님 외에 답이 없고, 이것은 전도를 하려는 목적과 무관하게 지을수 있는 유일한 답이자, 명료한 해답이다.

신앙이 종교에 불과한지, 아니면 치우침인지는 그 신앙의 신이 정말 창조자인지 아닌지를 보고 결정을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내게 줄수 있는 유일한 유익한 것을 남겼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사도행전 3장 6절, 개역개정)



안녕하세요 !


항상 글의 결론은 비스무리한 것 같은데,

소재가 고갈되어서 그런게 아니라 ... 그냥 이게 답이어서 이렇게 일종의 답안지를 베낀다는 생각으로 글을 썻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답답할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글을 읽어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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