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태새끼들이 나를 좋아해. 난 그런 사람이 아닌데.
많은 이들이 젊음을 도륙내고 있다. 그들이 받은 은혜를 자신을 위해서 쓰고 투자하는 것이 진정한 멋이라고 확신한다. 그것이 아름다움이자 가치라고 확신하다.
나는 젊다. 하지만 나는 진정한 멋이자 생명은 그것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
언제까지 속으며 살 것인가?
사람들의 사고는 어디서 일어나는가에 대해서 질문을 하게 되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살게 되는가?
나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은 왜 좋은 것이 아닌 것일까?
사람은 정상적으로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지불한다. 지금도 하루 5-12시간 유튜브 릴스를 보는 사람이 있다. 자신이 성장하고 있다고 확고히 느껴지기에 시간을 허비한다.
자기계발서는 자신을 챙기라고 한다. 자신을 챙기는 태도는 과연 올바른 것일까? 이 책에서는 자신의 삶에 방향 자체에 대한 질문을 하고 성찰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 사람, 인간의 관계 속에서 이기심은 실제로 내가 의도치 않은 어떤 영향이 내 삶에 미치는지에 대해 적어보도록 하겠다.
과거의 나는 솔직함과 겉멋을 중시하던 인간이었다.
나는 과거에 자신의 솔직함 그리고 심경 등을 감히 나누고 드러내게 되는 사람이었다. 또 자라면서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본다. 어린 시절 미국에서 자라오고, 그러한 자유의 문화를 동경한 나는 그게 진리인줄 알았다. 지금 되돌아보면 모두가 자신만의 질서를 위해서 그러한 방식으로 자신을 말하고 싶은 방식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자기주장을 통한 합리화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신에게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이 대단한 일을 하는 업적에 심취하여 당신을 이용하는 것 뿐이다. 즉 상대방은 당신을 물고기처럼 낚아내기를 원한다. 당신의 지갑이 되었던, 당신의 기대가 되었던.
또 이 세상에는 밥 벌어 먹기 힘든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욕심이 되었던지 간에 돈을 더욱더 갈망하기에, 위협적인 마케팅과 선정적인 것들은 많이 존재한다. 그리고 때로는 그런 것들이 내 영혼에 파괴적이다.
이 챕터는 선정적인 것에 대해 자주 언급 할것이다.
참고로 내 나이는 젊다.(약 20대 중반) 그리고 나는 내 자신이 꼰대여서 이런 말을 하는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선정성이라는 단어가 어떤 행태를 뜻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당사자 본인에게 무슨 영향을 정확하게 미치는지에 대해서 이 글에서 써내려가게 될 것이다. 그러니 너무 근본 없는 잔소리로 듣지 않길 바란다.
사람들을 끌어모으다 - 하지만 5년이면 끝나버리는 유행
이 사회는 병들었다. 소비를 부추기기 위해 사람들은 설득의 메타를 통해 끊임없이 이 누군가의 소비를 강요하기 위해서 부추기기 위해서 작전을 한 듯 보이기도 한다.
상업적인 유익을 위해서 세상은 돌아가고, 시청자로 하여금 구매를 유도하고 끌어들인다. 그것도 욕구를 자극한다. 하지만 4-5년 유행의 파도가 지나고 나면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고루(固陋)한 것들(촌스러운 것들) 이라는 것을 이후에 알게된다. 과연 소비했어야 되는 내용이었는가 반문하게 만든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바보이다.' '돈을 벌지 못하면 바보다' 등과 같은 가스라이팅은 온라인 상에서 많이 발견될수 있다. 하지만 그런 상대적 손실에 대한 자존심 대결은 결국 본질을 흐리게 한다. 한때는 헬스와 몸을 만드는 것이 열풍이었던 시기가 있었다. 몸을 왜 만들어야하는지 알지 못하는채로 만든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외모의 중요성과 그것으로 인해서 기회와 자유가 있었다고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실제로 그렇게 느낀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20대 초반에서 20대 후반에는 다른 것이 중요해진다. 일터와 일거리를 찾는 입장에서는 외모와 노는 인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의 실력과 스킬셋을 기르지 않는다면, 나를 부르는 내가 활용될수 있는 것도 지극히 적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 내게 가치있다고 여기는 외적 아름다움이 한때 지나가는 것에 불과했다는 것을. 이 사회는 병들었다. 모두가 타인을 향해 다른 집을 향해서 미사일 즉 위협을 가해 자신의 제품과 아름다움을 구매하라고 한다.
(물론 나는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 어느정도는 꾸미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앞서 말한 그러한 유행이 지나는 욕구, 즉 좋아보이는 것을 섭취한 사람 내면에는 우상이 생겨난다. 우상이란 idol, 가짜 신을 의미한다. 그래서 기존에 원래 있어야 하는 가치에 대해 왜곡을 시키고 세상을 색안경을 끼고 가치없는 것을 추앙하게 만든다. 글에서 앞으로는 정확히 어떤 부분의 가치가 색안경으로 인해 왜곡되고 다른 것이 집중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다뤄보겠다.
우선은 많은 사람들이 갈망하는 돈부터 시작해보겠다.
돈. 돈이라는 것이 애초에 존재하게 된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지금 사회는 돈이 많은 사람 혹은 부를 자랑하는 사람은 모델로 여기고 추앙한다. 나는 고등학교때 한번은 어떤 3D프린팅 강사 선생님이 나에게 자신의 시계를 자랑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러한 물질적인 지위를 알려주는 것이 어떤 부분에서는 필요한 명함일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솔직히 큰 충격에 빠졌다. 돈을 상대적으로 많이 버는게 왜 그리 중요할까?
나는 앞으로 돈을 지혜롭게 잘 벌고, 남을 위해 잘 쓰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주변에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러한 말을 많이 들어왔다.
'아 누가 나한테 100억원이라도 주었으면 좋겠다.'
...
이 말에 동의하는 사람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당연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돈의 가치에 대해서, 또 가치를 알지 못하는 돈이 내게 주는 댓가에 대해 말할 것이다.
일단 100억원이라는 돈이 일하지 않은 사람의 손에 아무런 댓가없이 주어지게 된다면, 그 사람이 돈을 어떻게 허비할지가 뻔한 길이다. 그것을 자신의 기회로 만들고 저축하기보다는 자신의 시간을 허비하고 사치하는데 시간을 쓰게 될 것이 뻔하니 아쉬워보이는 것에 불과하다.
나는 오히려 영화배우와 같은 사람들이 자신의 돈을 제대로 된 곳에 투자하지 못하는 모습을 볼때보다도 더 안타깝고, 돈이라는 것이 참 종이 쪼가리가 될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돈은 누군가의 책임이자 역할을 상징한다.
내 아버지는 나에게 재정적 지원을 해준다. 무상으로 해준다. 근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돈을 내 마음대로 혹은 무료로 쓰는 것이 아니다. 다 아버지의 수고로움을 나의 미래를 위해서 투자하는 것이니, 나는 미래를 위해 준비한다는 목적으로 이용해야 한다. 만일 이 돈을 아버지의 허락 없이 친구에게 줘버린다면 그것은 엄연히 도둑질이다. 아버지가 동의하지 않을 일에 돈을 크게 쓴다면, 그것은 당황스러운 일이다. 아버지는 돈을 준 목적과 방향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돈에는 명백한 사명이 존재한다.
그러나 대중의 여파는 돈이라는 자체에 대해 숭배 및 악착을 하기 시작한다. 돈을 누릴만한 사람인가?는 안중에도 없다. 그냥 누구 돈이든 상관없으니 돈이 있길 바란다.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돈이라는 가치는 그냥 지폐를 뽑아낸 정도가 아니다. 그 돈은 누군가의 시간이자 노고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런 노고를 하지 않고 내 손에 그것이 쥐어진다는 의미는,
그말은 즉, 나로 인해 이 세상 누군가는 자신의 노고한 댓가가 가져가지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만약에 학교에 반에서 바자회를 한다고 쳐보자. 거기서 현금이 아니라 초록색 쿠폰을 통해서 거래를 한다. 근데 내가 초록색 쿠폰을 갑자기 내 스스로 만들게 된다면, 그것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불행해지는 것이다. 내가 댓가를 지불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내가 가격을 올려 남의 가치,물건을 독점하게 된다. 그렇기에 큰 돈에는 그에 따른 올바른 책임이 따른다. 공동체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땀 흘려 노력하고 가치를 만들기를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노력하지 않은 공짜 지폐가 생겨나기를 바란다.
즉 남의 가치를 훔쳐버리고 싶다는 생각이라는 것이다.
마음이 나는 솔직히 더 악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의 것을 훔치기를 좋아하는 것. 사람들 중에 기적을 바라며 일하지 않고자 하는 태도를 가진 크리스천(기독교인)도 많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기적이라고 믿는다. 왜냐? 나는 하나님의 선한 사람이니까. 하나님이 돈 주시겠지. 그러며 의로운 사람, 그리스도인이 일하기 싫어하고, 돈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돈을 숭배한다.
동성애와 다를게 무엇이겠는가? 동성애는 나의 성욕을 내게 합당하게 주어지지 않은 대상과 그러한 유희만 즐기는 속이는 것이다. 성욕이 존재하는 존귀한 목적에 대해서 깨달음이 없다는 것이다. 공짜 돈도 마찬가지다. 내가 돈이 있다는 것은, 그것은 내가 일한 것에 대한 보수를 받는 것이다. 그때 누리게 되는 일종의 책임이 담긴 힘이다. 성욕과 마찬가지로 그 안에는 책임과 인과응보가 있는다. 그렇기에 돈이나 기회를 내가 그것을 받을만한 일을 하지 않았는데 얻게되는 것은 좋은 주의가 아니다.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이 세상에서는 그것을 위한 책임이라는 것이 따른다.
누군가 일을 하면 돈을 받는다. 그게 내가 돈을 쓰면 다른 사람이 일을 하는 이유이다. 돈은 일을 한 몫을 환원시키는 상징물이다.
근데 그런 돈을 일하지 않고 어쩌다 줍는다? 그건 앞뒤가 안맞다.
그것은 마치 전산처리가 잘못되어, 내가 하지도 않은 공로로 국가 공로 상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을 어떻게 얻는 것인지, 목적이 무엇인지, 사용처는 어떻게 되는지 알리가 없다.
그 국가 공로상의 자격의 의미?는 없을 것이다. 주변에 모여든 사람은 자신과 유사한 사람들일 것이다.
이 사람에게 자격은 없지만, 나도 그냥 상의 일부를 아첨좀 하면 공짜로 받을수 있겠는걸?
마치 자신이 외모로 꼬리치면, 자신 주변에도 자신과 유사한 태도의 사람들이 모이게 되는 것과 같이 같은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도 알것이다.
‘가짜구나’
비행기를 몰고 싶은가? 비행기라는 많은 재정이 투자된 것을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투자의 개념이다.
군대도 마찬가지다. 국가를 위해서 만들어진 막대한 자산이자 책임이다. 많은 사람들의 수고와 기술과 돈이 모여서 만들어진 비행기는 곧 그 가치는 투자한 이들에게 환원이 되어 운영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 그중 도둑들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가치가 투자된 것을 도둑질하여 빼앗기를 원한다.
왜? 자신의 명함만을 원하는 것이다. 마치 대통령이 되면 책에 나와서 멋있으니, 나는 대통령은 아니지만, 그러한 겉모습만 가져가겠다는 악랄하고도 속이는 마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임과 목적이 없지만 실력과 힘으로 인정받기를 원한다.
근래 그리고 항상 인간은 그래왔다. 누군가는 속이고 빼앗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멋있는 부류에 속하기 위해서 가짜 신분증을 구매하는 조선시대와 같은 것이다. 속은 텅텅 비어있고, 그 정도의 돈과 가치를 운영할 책임의 마음도 없는 사람에게 거대한 돈이 들려있으니 오히려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면서 합리화한다.
'나는 이런 저런 일과 사정이 있어서 남들과는 달라. 나는 이정도는 빼앗아도 돼'
돈이라는 것은 세상에 착실하게 땀 흘려 일하게 될때 그러한 자 앞에 모인다는 것을, 자꾸 누군가의 기적을 방해하는 급이다. 기적은 누군가의 것을 훔치는 것이다.
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ty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스파이더맨 영화 중
자신의 밭에 심지도 혹은 경작하지도 않고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의 재능으로만 승부를 하지 기초를 배우려고조차 하지 않는다. 노력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남을 위한 마음 자체가 부재한다. 그러한 게으른 삶을 자유의 삶이라고 칭한다.
하지만 남을 위하지 않는 사람보다 모순적인 사람은 없다. 내가 남을 위하는 헌신을 기뻐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것은 짧게 보면 이득처럼 느낄수도 있다. 나는 남들에게 마음조차 주지 않는데, 남들은 나의 외모로 자신을 사랑하니 이득이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있다.
'나는 결국 플러스네? 나이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사람들은 나에게 부어주니 이득이라고 생각할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자연스러운, 대부분의 사람들이 따르는 이 사고방식은 오히려 자신을 병들게 만든다. 왜냐하면 내가 남을 의심하면, 남도 나를 의심하는 것처럼 보이는 듯이,
내가 남의 이익을 탐하면, 남도 나의 이익을 탐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사람이 꼬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아래 진짜 예시에 대해서 적어두었다.
내가 남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고 겉모습만을 욕망하고 바라본다면, 상대방도 그렇다.
연애를 한적이 있다.
나는 과거에 한번 교회를 가게 되었다. 나는 첫눈에 뭔가 나를 좋아하는 듯한 여자 사역자를 보게 되었다. 나의 입장에는 솔직히 내가 여성에 대한 절제가 되지도 않는 사람이었고, 그냥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그냥 좋았고, 또 신체적인 느낌이 좋고 끌리게 되다보니 만나게 되었다. 나는 열정과 열의로 가득차 보였지만, 그것은 겉모습에 불과했다. 속으로는 무책임하고 그냥 더이상 결혼 등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고, 냅다 한 사람을 만나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보통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와 남자가 나빴네'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하지만 이야기는 아직 안 끝났다.
그렇게 내가 생각하기로 깊은 사랑을 나누고 있다고 생각할때 충격을 받게 된 점이 있다. 상대방도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대방도 그냥 연애라는 것을 해보고 싶었다. (실제로 자신의 입으로 말해주었음) 나에 대한 깊은 마음은 없었다. 그냥 친구가 연애를 하면서 깊게 사귀는 것을 보면서 내심 부러워했고, 그래서 그냥 이리저리 좋아하는 사람이었다.(과거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래서 나를 결코 사랑한다고 표현하지도 못했고, 그냥 더 깊게 가보기 위해서 사랑한다고 말은 해보았지만, 항상 그것의 결론은 비어있는 깡통과 같이 책임지지 못할 말이었다. 사과도 심지어 하였다. '미안 진심은 아니었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당신을 그렇게 대하고 말한다. '미안 진심은 아니었는데, 내 야망에 끌려서 너를 사랑한다고 말했어.'
누구의 잘못이었을까? 나? 아니면 상대? 둘다 아니다.
나는 내 잘못이라고 본다. 안좋은 사람은 세상에 넘쳐난다.
하지만 내가 그러한 안 좋은 상한 갈치를 좋아라 따른 것은 내 탓이자 내 책임이다.내가 그런 것들을 바랬고, 그 대가는 내가 골고루 받았다.
내가 어리석었다. 애초에 그딴 값싼 무책임한 유흥의 태도를 정말 더럽게 여기고 멀리했어야 했다. 하지만 내 삶 가운데도 그러한 욕구가 있었고, 그것을 즐겼고, 그런 사람이 꼬였고, 그에 대한 댓가를 나는 치르게 되었다.
미리 알았어야 하는데. 그 사건으로 인해 나는 그 공동체로부터 쫓겨나게 되었다. 내가 한 말과 책임에 따라 살지도 못했다. 쪽팔린 망신과 폐허 속에 쫓겨난 것 뿐이었다.
앞선 예시, 자신에게 부어주는 사랑을 일방적으로 받는 것. 나는 그들을 위해서 별 마음도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의 겉모습등으로 많은 마음을 부어주는 것을 기뻐하는가?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상대방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상대방은 당신의 외모나 거기에서 주는 느낌만 좋아서 소비를 하는 것이지, 솔직히 당신에 대한 생각이나 마음은 없을 것이다. 내가 상대방에게 주었던 태도는 그대로 나에게 돌아오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어리석음에 대한 댓가는 내가 온전히 마시게 된다.
마찬가지로 아래도 그러하다.
나는 이 만남 자체에 대해서 후회를 하며, 나는 지금도 이런 사람에게 가끔 끌려하는 경향을 가진 내 자신에게 말한다.
'야이 병신아. 저딴 사람한테 끌리냐?'
나는 이러한 내 모습과 속마음이 솔직히 이런 일을 당해도 싸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나도 책임있는 태도와 마음을 가지고, 상대방을 진심으로 위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더 신중히 고민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태도도 그냥 그러한 새로운 것을 끌려하고, 상대가 외국인이어서, 아니면 신체부위가 예뻐서 끌렸다는 그런 등신 같은 태도와 습관을 고치지 않은 나의 수많은 오차가 겹쳐서,
솔직히 그때 잘 분별하지 못했다.
(나는 그 사람을 미워하고 경멸하지 않는다. 다만 죄와 어리석음을 경멸한다. 어리석은 태도와 지혜없는 것은 선택이자 고쳐야 하는 책임이 있는 성인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아픔 이후로 나는 대학교에 복학을 하였다.
이후로 대학교에서 이전에 만난 여자 사역자와 동일한 느낌으로 나에게 전화를 걸고 접근한 여자인 동기가 있었다. 나는 이때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 '순수해보이는 갈망' '어린 아이 같은 연애하고 싶은 마음' '야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보다도 기피해야 될 무책임한 자기 중심적 태도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나는 이런 사람들이 있다면 끌리지 않기 위해서 노력을 한다.
단번에 고쳐지지는 않는다. 시행착오란게 있다.
다 자신의 마음에 대한 연단의 과정이기는 하다. 사람은 넘어져도 또 똑같은 자리에서 넘어지는 바보 같은 짓을 인간은 한다. 습관과 관성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훈련을 통해서 내 자신과 마인드셋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일상의 변화가 먼저이다. 집에서 혼자서 그런 누군가의 실루엣이나 외모 등을 즐거워하는 야동 같은 것을 즐겨본다면, 그런 것에 대해서 NO라고 말하고 끊는 것이 먼저다.
지금도 훈련중에 있다.
미래의 가정을 생각해서라도 말이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퀸(Queen).
지금은 모두가 경외하는 이는, 결국 그는 혼자가 될 것이다. 원래 처형당하는 한때의 아름다웠던 여왕 곁에는 아무도 없는 편이다. 왜냐하면 애초에 그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부, 명예, 외모에 끌린 물고기들이 많았던 것이지, 실제로 그 사람 자체에 관심이 있지 않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내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면, 그 아름다움을 칭찬하며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당신이 준 느낌만 기억할 것이지, 당신의 성격 혹은 당신이 누구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의 외모에서 주는 도파민만 기억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이 자초한 일이다. 자신이 그러한 겉의 아름다움의 유혹을 승락하고, 나도 그러한 아름다움을 즐기기에 그렇게 스스로를 꾸미고 강조한 것이다. 자신이 자초했고, 자신의 의도대로 자신의 욕구와 겉모습에 끌리는 '자신과 닮은 사람들'이 주변에 몰리게 된 것이다.
주변에 5사람을 꼽아보라. 그러면 그 평균치가 곧 나이다.
내가 심지 않고 먹는 삶을 기뻐한다면, 자연스레 나도 남을 생각할때 남도 “자신이 일하지 않고 먹는 것을 기뻐한다”라고 전제하게 될 것이다. 내가 정직하지 않고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이라면 주변도 그럴 것이다. 물론 나는 사람 스스로의 힘으로 정직해지고 올바른 길을 따를수 없다고 믿는다.
그 아름다운 독사과를 먹은 이의 결론은
남은 자신을 가벼운 유희로만 바라보고 나의 영혼을 보지 못하기에
진정한 나의 모습은 어디서도 공유하지 못하는
나의 유익만을 구하기 위해 속인 만큼 더 숨겨야 될 것 같은 느낌을 따르고
자연스럽게 혼자가 되는 것이 더 편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착실한 사람, 헌신적인 사람이라면, 다른 이도 그러할 것이다.
애초에 내가 그런 사람을 분별하여 나의 가치관에 맞게 만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부당한 공짜를 바라며 바람을 핀다면, 상대방도 당연히 그러할 것이다.
애초에 그럴 것을 알고 만났으니 상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아인슈타인의 예시를 들며 글을 마치게 될 것이다.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바람을 피는 사람이었다. 그의 3번째 부인은 아인슈타인이 바람을 필때 그러려니 했다. 왜냐하면 애초에 아인슈타인의 부와 명예를 보고 부인이 되고 싶었던 거였으니 말이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이 있어 누군가를 만났고, 상대방 또한 그냥 같은 처지이자 마음이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이다. 이 글은 단순히 신앙을 이야기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 시대에 지나친 외모 지상주의와 아름다움의 욕망에 휩쓸려 자신의 몸과 존재를 소홀히 다루는 분들을 위해 쓰여졌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 길은 결코 참된 만족이나 해답이 될 수 없다는 합리적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