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 엄마가 아니야.

by 김로기


삼십 년 가까운 시간을 다른 사람들과 다른 밥을 먹어가며 다른 생각으로 살아온 두 사람이었다.

모든 것이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함께 사는 일은 당연히 어려운 일이었다.

연애 기간이 길다고 해서 결혼 생활이 순탄하리라는 것은 나의 대단한 착각이었다.

서로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드벤티지를 가져다주는 동시에 핸디캡이 되고 있었다.

나의 의견을 잘 따라주는 그의 태도가 좋았지만, 의견이 없는 그가 미웠다.

연애 때 곁에 있던 사람과, 결혼해서 같이 살게 된 사람은

마치 과거와 미래를 나누기라도 하듯 다르게 느껴졌다.

늘 마주하는 겉모습도, 그다지 투명해 보이지 않는 마음도.

내가 예전에 알던 그 사람과는 달랐다.

처음에야 서로의 시간과 서로의 공간을 나누는 것에 적응하느냐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는 정도가 얕을 수 있겠으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결국엔 갖춰진 자신의 모습을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리기 마련이었다.

편한 옷과 편한 얼굴, 편한 몸으로 바뀌어 가고

그런 상대의 모습이 성의 없어 보이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

마음에 서운한 부스러기가 쌓이기 시작한다.

상대도 낯설어하고 있을 나의 모습 따위는 잊은 채로.

어떤 사람은 그 모습까지도 사랑스럽다 말하겠지만

열의 아홉은 무덤덤하게 적응해 갈 것이다.

좀 더 나 자신과 가까워진 모습임에도

결국은 시큰둥한 마음으로 적응하게 될 것이라는 것.

물론 나도 사랑스러워 죽겠는 마음보다는 열의 아홉에 가까운 마음이었다.

그 말인 즉 이제는 애정이 듬뿍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볼 수는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하루하루가 지나고 자연스레 편한 모습을 보이는 그에게

나는 더 이상 갖춰진 나를 보이지 않게 되었다.

물론 아침 일찍 일어나 정돈된 모습으로 서로를 마주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 나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이렇게 그에 관한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편한 파자마 차림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착각해선 안될 것이 있는데

그가 그의 부모와 함께 지낼 때처럼 편한 모습으로 나를 대할지라도

나는 그에게 엄마가 될 수는 없다는 것.

신혼을 겪은 대부분의 유부녀들은 마치 내가 남편의 엄마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처음엔 너그러운 아량으로 상대를 챙기려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들이

어느샌가 그 챙김이 당연한 일들이 되어 버린다는 것.

나도 오지랖과 다를 바 없는 행동으로 그를 헷갈리게 한 것이겠지만

아무튼 내 입장에서는 억울한 상황이 오고야 만다.

우리는 맞벌이 부부로 비슷한 시간에 출근하고 비슷한 시간에 퇴근해서 같이 저녁을 먹었는데

어느샌가 내가 저녁메뉴를 고민하고, 장을 보고, 저녁을 준비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물론 그보다 내가 차린 음식이 서로에게 더 위안이 되긴 하겠지만

나라고 처음부터 밥 물을 맞추고, 찌개를 끓이고 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던 것은 아니니까.

결혼 전에는 나도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엄마가 빨아준 옷을 입고, 엄마가 정리해 준 자리에서 잠을 잤다.

그런 내가 결혼 후에는 내가 한 음식을 먹는 게 자연스럽다가 당연스러워졌다.

그와 내가 지친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어느 날 저녁이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주방에 서서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런 내 모습에 화가 났다.

내 모습이라기보다는 내 옆 자리에 서 있지 않은 그의 모습에 화가 났다.

물론 남편은 저녁을 먹은 뒷정리를 한다거나, 분리수거를 한다거나

암묵적으로는 서로의 역할이 정해져 있었지만

그 순간은 괜히 마음이 비뚤어졌었다.

그런 나의 불편한 마음이 투명하게 드러나자

그는 남편 밥해주는 것을 억울해하지 말라는 말을 하며 같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 순간.

앞 뒤 모든 상황을 다 제쳐두고, 그 말에만 꽂혀 상대를 몰아붙였다.

시대가 어느 때인데 그런 소리를 하냐는 말부터, 친구 남편들은 잘만 한다고, 나도 남이 해준 밥 먹을 줄 안다는 등의 유치한 말들을 쏴 붙였다.

서로에게 실망했고, 화를 내는 그가 낯설었다.

서로에게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음에도

그에게 또 다른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 고집을 부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감정이 앞설 일이었나 싶고

서로가 더 편하고, 잘하는 것이 있기 마련이었는데.

그 순간은 내 억울함과 분함만이 느껴질 뿐, 상대를 이해할 마음 따위는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도 그러했으리라 짐작한다.

그 후에도 우리는 비슷한 이유로 종종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여전히 남편은 내게 아이 같고

어쩌면 남편에게도 내가 비슷한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하물며 요즘은 남편에게 의지하는 순간도 꽤 많아졌다.

서로를 아이 취급하며 억울해하던 날들이

의지할 수 있는 서로가 되어 다행인 날들이 되어가는 듯하다.

엄마 아빠를 떠나 독립적인 사람이 되기는커녕

또 다른 둥지를 찾았나 보다.

남편에게 여자가 아니라 엄마로 여겨진다는 것은 참으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서로가 걱정되고 의지 되는 걸 보면

마음은 진심이 되어가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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