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되어

by 연이형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의 바람의 언덕. 바람개비.

벽제 장지에서 삼우제를 지내고 나오는 길에 다음 행선지 결정을 두고 잠깐 의견 충돌이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장례식을 치르면서, 혹은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장시간 비행해 오면서 다들 조금씩 지친 상태였고, 아무도 사소한 결정을 위해 여력을 소모하길 원치 않았다.


결국 별로 멀지 않고, 아니 사실 이 집단의 규모와 성격, 상태를 모두 고려해 최적의 목적지를 결정할 만한 능력을 갖춘 인물이 없었으므로, 그저 멀지 않다는 이유 하나로 우리는 임진각에 가기로 했다.


임진각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누군가 게임이론 이야기를 꺼냈다. 죄수의 딜레마 같은 내용이었는데, 그게 정확하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서로 조금씩 의견을 양보하다 보면 결국 아무도 원치 않는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요지는 임진각으로 향하는 이 결과가 최악의 선택이 아니냐는 물음이었는데... 사실 무언가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피곤한 상황을 속전속결로 벗어났다는 그 자체만으로 나는 우리의 선택이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할머니의 장례식은 내내 엉망이었다. 다들 뭘 해야 하는지 몰랐고, 우왕좌왕의 연속이었다.


연락을 받았을 때, 할머니는 부산의 요양원에 계셨다. 부산의 첫째 고모가 할머니를 모시고 올라오는 동안, 서울에 빈소가 차려졌다. 할머니 자식들 중 남자는 아버지뿐이었고, 둘째 고모와 셋째 고모는 캐나다에, 막내 고모는 미국에 있었다.


상주인 아버지는 마치 잔칫집에라도 온냥 굴었다. 문상객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웃고, 떠들었다. 문상객을 받고 할머니 영정 앞에서 맞절을 할 때나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자각을 하는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알려줘야만 했다.


아빠, 이거 할머니 장례식이야.


덕분에 아버지의 태도는 시종 우스꽝스러웠는데, 그 모습이 부끄러우면서 한 편으로 좀 슬펐다. 매번 어머니의 죽음을 새로 받아들여야 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어차피 아빠는 잊겠지만, 보는 사람도 잊는 건 아니니까.


할머니는 백수白壽를 살고 가셨다. 백수라는 단어의 의미를 그때 처음 알았다. 일백 백百자에서 한 일一자가 빠져 백수. 아흔아홉.


사실 돌아가시기 전, 한 7년간 할머니를 뵙지 못했다. 한 번쯤 뵈러 가야 할 텐데, 마음 한 구석으로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막상 실행하기가 어려웠다. 내게 할머니는 떨어져 있을 때나 같이 살 때나 한결같이 거리감이 느껴지는 어려운 사람이었다. 나는 그다지 살가운 성격이 아니고, 할머니는 더 그랬다. 나중에는 어차피 곧 돌아가실 텐데 이제 와서 어쩌겠어, 무책임하게 회피했던 거 같다. 그러게, 곧 돌아가실 걸 알면서 왜 그랬을까. 손이라도 한 번 더 잡아드리고, 말이라도 한 번 더 붙여드렸어야 했는데... 후회는 부질없다.


할머니의 모습을 다시 본 건 입관식에서였다. 할머니는 당신이 생전에 준비해놓은 수의를 입고 가셨다. 그 수의는 몇십 년 동안 할머니가 꽁꽁 챙겨 보관하던 거였다.


어쨌든 장례식 자체가 비즈니스인 장례식장에서는 뭐든 팔아먹으려 든다. 수의는 그중에서도 꽤 고가의 판매상품인데, 엄마가 챙겨 온 수의를 보고 장례식장 측에선 보통 이런 건 오래 보관하다 보면 빠진 부위가 있을 수도 있으니 확인을 해주겠다고 했다. 그들 입장에선 빠진 부위가 없어서 좀 아쉬웠을지도 모르겠다.


염을 마치고 수의를 입은 채 누워있는 할머니는 내가 기억하던 모습과 별 차이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인사하세요. 만져보셔도 됩니다, 염쟁이 아저씨 말에 할머니 이마에 손을 댔다가 흠칫 놀라 손을 뗐다. 차가웠다. 이게 죽은 사람의 온도구나. 딱히 인사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 알았다. 다음을 기약하지 않는 인사말이란 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걸.


좋은 곳으로 가세요. 어머니, 좋은 곳으로 가세요.


할머니 귓가에 속삭이며, 아빠가 울었다...


캐나다의 고모들은 장례식이 모두 끝난 다음에야 도착했다. 미국의 막내 고모는 결국 오지 못했지만, 어쨌든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아빠의 형제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임진각에 도착해 각자 흩어져서 산책을 했다. 오랜만에 와보니 임진각 주변이 인공미 넘치는 공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뻥 트인 언덕에 세워진 조형물들이 다소 조잡해 보이긴 했지만, 나쁘진 않았다. 장례식 내내 비가 왔는데, 그날은 날도 좋았고, 바람도 시원했다.


엄마는 동갑내기 셋째 고모와 한참을 걸었다. 나는 거리를 두고 그들을 쫓아 걸었다. 바람의 언덕에 바람이 불었고, 바람개비들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결국 바람이 되는구나.


이 글을 쓰게 된 경위에 이르기까지 심리 상태를 문득 반추해본다. 죄책감이었을까, 아니면 의무감이었을까.


마음에 걸리는 기억이 있다. 어렸을 때, 언젠가 할머니의 생신날이었는데, 그날 할머니는 사촌 언니한테 좀 비싼 외제 초콜릿을 선물로 받았다. 할머니는 단 군것질거리를 좋아했고, 그런 것들을 아껴두었다가 우리에게 하나씩 꺼내 주시곤 했다. 동생이 나에게 이거 먹자며 초콜릿을 들고 왔을 때, 나는 그게 할머니가 선물로 받은 초콜릿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먹어도 되나 싶은 생각도 초콜릿의 유혹 앞에서 금세 사라져서 결국 동생과 나는 그 초콜릿을 다 먹어버렸다. 뒤늦게 할머니가 여기 있던 초콜릿 못 봤나? 우리에게 물어봤을 때, 우리는 그냥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다 먹었어요. 대답했고, 그걸로 할머니는 됐다, 했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할머니는 가끔씩 멍하니 앉아 넋두리처럼 당신의 긴긴 삶의 이야기를 풀어내곤 했다. 억센 사투리 억양 탓에 나는 그 얘기의 반도 못 알아들었지만... 그랬다. 어쨌든 할머니의 삶에선 나라가 바뀌었고, 전쟁이 났고, 화폐도 바뀌었지. 멀리 만주를 오가며 장사해서 번 돈을 꽁꽁 숨겨놓았다가, 화폐가 바뀐 것도 모르고 전부 휴지조각으로 만들기도 했고. 돌아가신 큰 아버지와 부산 고모, 그리고 아버지 사이의 요상한 나이 차이는 할아버지에게 소박맞고 친정집에서 독하게 자식들을 키운 할머니의 역사였다.


어릴 땐 총기가 있어서 이런 것들을 다 기억했었는데, 지금은 가물가물하네. 내 이야기를 다 하면 소설 한 권을 쓸 텐데...


그렇게 말하는 할머니는 여전히 총기가 넘쳤는데, 그때 그 말에 묻어있던 아쉬움이, 지금 손녀딸에게 이 글을 쓰게 만들고 있어요, 할머니...


결국 그 기억들은 실체도 없는 바람이 되어 이렇게 흩어지고 잊히고 말 텐데. 그래도 바람결에 이런 이야기가 실렸으면 해서, 이런 우리 할머니가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걸 기억하고 싶어서, 이렇게 두서없는 기록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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