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아주 엉뚱했다.
어느 날 신문 광고에 쓰인 우아한 글씨체를 보고, 나는 내 글씨체를 교정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작가 지망생인 나였기에 작가다운 글씨체를 갖고 있으면 좀 더 그럴듯해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어느 정도는 괜한 객기를 부려본 것이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귀여운 글씨체가 아닌 대충 흘려 쓴 것 같지만 왠지 모르게 멋스러움이 살아있는 어른스러운 글씨체가 갖고 싶었다.
그 날로 나는 아무 펜이나 잡고 안 쓰는 노트를 펼쳐 글씨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길들여진 글씨체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대충 쓴 글씨보다 공들여 쓴 글씨가 더 어색해 보이기도 했다. 내가 글씨체 교정에 힘을 빼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친구 하나는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며 면박을 주었다. 어차피 요샌 웬만해서는 컴퓨터로 다 작성하는데 글씨체가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소리를 들으니 오히려 더 오기가 생겼다.
생각보다 글씨체를 바꾸는 일은 쉽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죄 없는 펜 탓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펜을 바꿔 써보아도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근거 없는 망상이었지만 만년필만 있으면 나도 멋스러운 글씨를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급기야 나는 언젠가 열어본 아빠의 책상 서랍 한 구석에 얌전히 놓여있던 오래된 만년필 세 자루를 떠올리기에 이르렀다. 아빠는 마침 지리산 등정을 떠나고 집에 없었다. 이틀 뒤에나 되어야 돌아오실 터였다.
아빠는 산에 오르고 사진을 찍는 일을 낙으로 삼았다. 그리고 글을 썼다. 10년도 더 전에 아빠는 글을 쓰겠다며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셨다. 그 이후로 줄곧, 경제적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하고 싶은 걸 하며 자유롭게 살고 계셨다.
어쨌거나 나는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완전 범죄를 구상했다. 아빠의 만년필들이 몇십 년이 넘도록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없어졌다고 해서 당장 아빠가 찾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조용히 아빠의 서재로 들어가 만년필의 행방을 수색했다. 하지만 이 서랍 저 서랍을 열어봐도 만년필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찾았지만 결국 찾을 수 없었고, 나는 고장 나서 아빠가 버렸나 보다 하고 애써 실망스러운 마음을 감추며 발길을 돌렸다. 그 순간이었다. 책상 위의 연필꽂이가 내 눈에 들어온 건…….
찰나의 이끌림이었다. 나는 천천히 연필꽂이로 손을 뻗었다. 그 안에는 내가 계속 찾던 만년필 세 자루가 얌전히 꽂혀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발견되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만년필 세 자루는 그곳에 있었다.
예상대로 세 자루의 만년필은 모두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물에도 씻어보고 천으로도 닦아보고 혼자 낑낑대며 어떻게든 해보려 했지만, 애초에 부품이 망가진 걸 되살려낼 능력이 내겐 없었다.
나는 세 자루의 만년필을 잘 싸들고 수리를 하기 위해 만년필 가게를 찾아갔다. 주인아저씨는 내가 내민 만년필 세 자루를 보시더니 20년도 더 넘은 펜이라며 일일이 모델명을 가르쳐 주셨다. 워터맨의 구형 모델과 파카 180, 그리고 파카 75라고. 사실 펜이라는 건 다 쓰면 버리는 소모품이라 여겨왔던 내게 나보다 나이가 많은 펜의 존재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저씨는 만년필을 하나씩 분해해 보시더니 하나는 컨버터를 교체하면 쓸 수 있겠지만 나머지 둘은 어렵겠다고 하셨다.
“이건 닙이 독특하죠? 양쪽으로 쓸 수 있는 건데 닙이 망가졌어요. 단종된 지 오래된 거라 부품이 없어요. 이건 쓰면 쓸 수는 있겠지만 플라스틱 부분이 너무 삭아서 옷 버릴 수 있으니까 쓰지 마시구요. 골동품이니까 두 개는 잘 보관해두세요.”
세 자루 중 두 자루를 쓸 수 없다는 말에 나는 조금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오래 모른 척한 것 같아 만년필에게 미안했다.
잠시 후 아저씨는 더께를 벗겨낸 파카 75를 보여주셨다. 까맣게 손때가 타 투박하기 그지없었는데 어떻게 닦았는지 번쩍번쩍 광채가 다 났다. 캡과 배럴이 순은으로 되어있으니 가끔 닦아주라는 아저씨의 말씀에 나는 더 놀라고 말았다.
“이거, 은이었어요?”
세심하게 닙 교정을 봐주시는 아저씨의 모습에서 장인정신이 느껴졌다. 한참이나 닙을 다듬은 끝에 아저씨는 글씨를 써보라며 내게 만년필을 건넸다.
조심스럽게 만년필을 손에 쥐고 흰 종이를 보는 순간 갑자기 막막해졌다. 뭔가를 써야 하는데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다. 왠지 그냥 평범한 글씨를 쓰면 안 될 것만 같았다. 그동안 열심히 연습했던 멋스러운 글씨체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짧은 시간 동안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리고 다시 만년필을 잡았을 때, 나는 그저 길게 선을 한 번 그었을 뿐이었다. 펜 끝으로 자연스레 잉크가 흘러나와 흰 종이에 흔적을 만들며 서서히 베어 들었다. 거짓말 같지만 나는 그 순간 살아있는 만년필의 숨결을 느꼈다.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만년필은 길고 긴 기다림 끝에 기어이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신이 나서 계속 글씨를 써댔다. 기분 탓이었겠지만 만년필로 글씨를 쓰니 더 잘 써지는 것 같았다. 나는 만년필을 자랑하고 싶은 충동을 못 이기고 결국 언니에게 달려갔다.
“언니, 아빠한테 만년필 있는 거 알아?”
“응. 그거 얼마 전에 아빠가 고쳤다고 좋아하던 거 아냐?”
“망가졌던 거 내가 고쳐왔는데…….”
“아니야. 얼마 전에 아빠가 만년필 고쳤다고 잉크 사 오고 그랬었잖아.”
그제야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당연히 서랍 어딘가에 묻혀있어야 했을 만년필들이 왜 나와 있었는지. 아빠는 분명 컨버터가 망가진 것도 모르고 잉크를 채워 만년필을 사용했었던 거다. 그러다 다시 잉크가 나오지 않으니 실망하고 그냥 놔둔 게 분명했다.
만년필을 고쳤다고 좋아했을 아빠의 모습을 생각하니까 갑자기 마음이 흔들렸다. 그냥 내가 갖고 모른 척하려고 했는데, 이걸 다시 아빠한테 돌려줘? 말어?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그냥 이실직고하기로 했다.
“아빠, 이거.”
산에서 돌아온 아빠에게 나는 내가 고쳐온 만년필을 내밀었다. 아빠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내가 내민 만년필을 바라보았다.
“어이구야, 반짝반짝해졌네? 고쳤어?”
“응. 아빠 쓰시라구요.”
아빠는 만년필을 받아 들고 씩 웃었다.
“이거 무지 좋은 거야.”
사실 무지 좋은 거라기엔 아빠의 만년필은 너무 낡았고, 지금은 훨씬 비싸고 화려한 만년필도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응, 유명한 펜이래요. 난 몰랐는데 이거 은이더라?”
“그래, 그래서 아빠가 옛날에 치약으로 닦아서 갖고 다녔잖아.”
아빠는 추억에 서린 눈으로 만년필을 구석구석 바라보더니 다시 내게 내밀었다.
“이거, 너 써라.”
“예?”
“이거 옛날에 아빠가 글 쓰겠다고 했을 때 네 고모가 사준 거야. 이젠 네가 갖고 좋은 글 많이 쓰라고.”
아빠가 내미는 만년필을 다시 내가 받아 들었다. 묵직하다. 순간, 나는 이 만년필 속에 아빠의 꿈이 담겨있음을 깨닫는다. 갑자기 가슴이 벅차오른다. 아빠는 내게 만년필을 전해줬을 뿐이지만, 내가 전해 받은 것은 만년필만이 아니다. 과거 언젠가 글을 쓰며 키웠을 아빠의 꿈도 지금 여기 내 손에 있다. 그 꿈이 담겨있기에 낡고 오래된 아빠의 만년필은 내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무지 좋은’ 만년필이다.
나는 이제 아빠의 만년필에 내 꿈을 담는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나도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내 자식에게 내 꿈을 담아 이 만년필을 물려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그때는 세월의 더께만큼 추억의 두께가 겹겹이 쌓여있는 만년필이 되어 있기를…….
나는 작은 소망을 담아 이 글을 적는다.
2006년 8월 30일.
파카 수필공모전에 내려고 썼던 건데, 결국 내진 않았다. 너무 노림수가 빤한 게 좀 낯뜨거웠던 거 같다.
어렸을 땐 좀 순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