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신 - 마쓰오카 세이고 일본작가
우리의 감정은 결코 튼튼하지 못 합니다.
'긍정의 영역'도 있고 '부정의 영역'도 있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결여나 부족이나 구멍이 생길 수도 있는 조금은 아슬아슬한 책 읽기입니다.
책을 제대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지 1년 정도 되었다. 그동안 책을 안 읽은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읽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감정이 그저 흘러가게 둔 것일 뿐이다. 제대로 움켜잡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감동적이거나 재미거나 정보 습득에 치우친 단순한 독서였다. 작가와 작품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 했던 것 같다. 작가가 말하려는 게 무엇이었을까? 그 점을 가장 염두에 두면서 읽는 게 시작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도 알아가는 과정이란 생각도 들었다. 나는 넘치는 것보다는 가둬두는 글을 또 이미지로 보이는 글을 좋아하는 듯하다. 이런 나를 알아가는 과정도 좋았다. 하지만 여전히 읽고 싶은 데로 읽는 내가 제대로 책을 읽고 있는지 의문이 가득하다.
책을 분석하거나 비평하거나가 아닌 받아들이기 이해하기 빠져들기가 좋다. 내 생각 따윈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도 생각한다. 결국 내가 느끼는 게 전부일 텐데 그 과정을 즐긴다는 것은 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무의미한 생각도 한다. 교훈적인 것도 발전적인 것도 바라지 않는 데도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에 즐겁기도 하다. 혼자만의 즐거움, 그 유희에 매료되곤 한다. 반복적인 일상에 책은 정서적인 안정감도 준다. 읽고 싶은 책을 더 많이 찾아서 읽어야겠다 고도 생각한다. 그 점이 막막하기도 하다. 모르는 작가와 작품이 너무도 많다는 게 문제고 깊이 빠져들기가 버겁다는 생각도 든다.
나의 모태는 순정만화다. 어린 시절부터 장르 불문 만화만 너무 많이 읽어서 다른 문학책을 읽은 기억이 없다. 늦은 독서 입문이었고 어디서부터 읽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결정적인 책은 제인 오스틴 소설이었다. 그 시대부터 관련된 소설책을 읽기 시작했다. 지금 되돌이켜보면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읽기에만 연연했다. 브론테 자매의 소설을 좋아했었고 찰스 디킨스의 소설이 특히 기억에 남을 뿐이다. 그리고 역사소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삼국지도 그래서 읽었고 불멸의 이순신부터.. 김탁환 작가의 소설을 이어 읽기를 조금 했었다. 드라마적인 역사소설을 주로 찾아 읽었었다. 박경리 <토지>를 읽으면서 아주 느리게 독서하기로 마음먹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흐름이 끊기고 맥없이 독서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역시나 지금까지도 전작주의 독서를 하는 편이다.. 나는 무척이나 일관된 독서만 해왔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겐 다양한 책은 어려운 숙제 같다.
김탁환 작가의 작품을 간간이 읽었고 에세이 <읽어가겠다>를 읽는 것도 당연한 수순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기회는 우연을 가장을 필연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가 소개한 젊음을 상기시키는 23권의 책을 통해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와 로맹 가리를 알게 되었다. 내 입맛에 맞았고 나는 그들의 작품과 리뷰를 찾아 읽었고 좋은 이웃분들이 생겼다. 그리고 이웃분에게서 파스칼 키냐르 작가의 작품을 소개받았다. 운명 같다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너무 맛나서 아껴두며 먹었다. 중간에 독서가 흐지부지되고 놓아버렸다면 맛보지 못할 진수성찬이었다. 그런 만남을 외면했더라면 인간적으로 나는 조금도 나아진 면이 없었을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우스운 생각도 한다.
독서는 신성하다거나 매우 의미가 있다거나 상당히 특별한 행위하고 여기지 않는 것이 좋다.독서는 훨씬 다양한 것이다. 따라서 독서는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아니, 약도 독도 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나에게 책과의 첫 만남은 생경한 것이었다. 마쓰오카 세이고 일본 작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랬고 다른 사람들, 그들의 자녀들에게 하는 것을 보면 나와 무척 다르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어릴 적 기억으론 부모님께서 책을 사주신 기억도 읽어주신 기억도 전혀 없다. 있다고 하셔도 내가 기억나지 않으니깐 어쩔 수 없다. 대화를 많이 한 기억도 없다는 게 내가 무척 사랑받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받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는 않다. 그저 지켜본 기억이 많을 뿐이다. 아버지를 어머니를 지켜본 기억이 많다. 보통은 그와 반대겠지만... 그리고 나는 책 읽기를 가장 못 했고 두려운 것들 중에 하나였다. 거의 대부분 학창시절이 그랬다...
이제는 어느정도 독서의 맛보기를 알았고 더 나아가면 내 입맛에 맞는 책이 엄청날 것이란 생각도 든다. 그 찾는 과정을 즐길 것인지 버거워할 것인지 내가 선택할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파스칼 키냐르 작가의 글은 한 문장이 거의 완성에 가깝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한 이미지를 각인시키길 좋아한다. 그가 좋아하는 콩트 같은 엽편소설처럼 짧게 표현하고 시작과 끝이 없다. 언제나 언어 이전의 근원을 찾아들어간다. 로맹 가리 작가의 글은 자신의 슬픔을 가둬둔 채 누군가의 슬픔을 거두려 한다. 그런 처연함이 좋았다. 그들의 언어로 들어가 내가 보는 것, 느끼는 것, 깨닫는 것들이 좋았다. 그래서 더더더 원하기도 했다.
궁금하긴 했다. 어떻게 그 많은 책들을 읽는지... 워낙 느리게 읽는 편이라 이 부분 좁혀지지 않았다. 나름의 방법은 맛보기 책을 넉넉히 집어와 읽고 싶은 부분만 읽는다. 그리고 이웃의 리뷰를 되도록 꼼꼼히 읽어보는 정도로 다른 분야의 책을 맛본다. 그런 책도 있구나 새롭다 등등 인상적인 부분 기억해뒀다가 다음에 내가 읽어보는 식으로 그 책을 알아가는 재미를 느낀다. 한 권의 책에 수많은 사람의 드나듦이란 아마도 이런 것이겠다 싶다. 개개인마다 반응하는 부분이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했다.
파스칼 키냐르의 마지막 왕국 시리즈를 2-3-1권 순으로 읽어버려서 전혀 워밍업 없이 읽어버렸구나 싶었다. <옛날에 대하여>를 다시 읽는다면 놓쳤던 장면을 다시 이해할 수 있을까?를 <떠도는 그림자들>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천천히 들어갔다면 좀 더 이해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재독을 꼭 권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조감력과 미시력에 대해 모르고 독서를 해왔지만 어느 순간 그렇게 읽을 책과 아닌 책을 구분한 것도 같다. 키냐르의 글은 그런 부분에서 연습이 되었다. 그렇다고 책을 판단하는 능력은 나아진 것은 아니고 고르는데 머뭇거림이 많다. 그 머뭇거림을 줄이는 게 지금의 목표다.
로맹 가리 소설을 읽으면서 '잘못 걸렸다'라고 생각한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내가 왜 이것마저 알아야 하는 지 작가에게 묻고싶기 조차했었다. 4타석 헛스윙 삼진 아웃 내리 당해도 놓을 수 없었다. (오타니 덕분에 우리나라 타자들 빠른 공에 익숙해진 것처럼!) 나에게 무척 그것마저도 소중한 경험이란 생각도 들었다. 로맹 가리는 같은 주제로 책을 쓰지 않았다. 책 마다 전혀 다른 이야기 들려주어서 좋았다. 반면에 파스칼 키냐르는 다른 이야기를 계속하지만 결국 하나의 이야기 같은 면이 있었다. 두 작가는 참 다른데도 좋아할 수 있었다. 내가 더 알아야 할 작가가 많다는 데서 오는 버거움이 가득해진 게 문제라면 문제다... 아직 마조히즘은 사라지지 않았다!
읽는 사람이 하기에 따라서 독서는 유쾌해질 수 있다.
쓰는 사람이 언제나 좋은 내용을 쓴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책을 읽을 때는 독자 자신이 잘할 수 있고, 여럿이 같이 읽기 쉬운 유연한 방법을 몸에 익히기를 권한다. 처음부터 다독술을 이용해 책을 즐기는 것이 좋다.
제목만 유심히 들여다본다. 이것만 반복하다가 지례 지치고 만다. 읽을 수 있을 지 몇 번이고 의심한다. 그리고 첫 번째가 통과하고 나면 차례를 보고 상상한다. 읽고 싶은 지 계속해서 물어본다. 머뭇거림이 점점 심해져서 가끔 포기할 때가 더 많다. 그렇게 두 번째가 통과되어도 막상 읽으려고 첫 장을 넘기고 실망 아닌 실망으로 방치되는 책들이 있다. 나는 재미를 가장 우선으로 추구하는 편인데 재미가 없으면 읽지 않겠다는 게 우습지만 나의 독서 법칙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읽을 수 없는 책이 너무도 많아진다... 특히 철학책은 도저히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언어에 갖혀버린 언어들이란 생각이 가장 먼저 들어버린다. 극복할 자신이 여전히 없다는 게 문제다..
키냐르 소설 두 권을 한 달 넘도록 붙잡고 있으면서 독서가 주춤한 것도 같다. 독서력에 대한 의문으로 독서 관련된 책을 찾아서 읽고 있다. 제대로 책을 읽는 지 의문이 들어서다. 마쓰오카 세이고 일본 작가에 대해서 언제인지 모르나 기억하는 부분이 있었다. 같은 저자의 책을 한 권 이상 다루지 않으면서 매일 밤 한 권씩 도서 감상문을 온라인에 올린다고 한다. 처음에 1000권을 목표로 시작한 이 작업은 이미 초과 달성되어 아직까지인지 모르나 계속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궁금했다. 나도 계속해서 읽어나갈 수 있을지... 지치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을지... 이 책은 나를 검증하면서 읽히고 있다.
** 센야센사쓰 페이지 http://1000ya.isis.ne.jp
앞서서 내가 제대로 책을 읽는지에 대해서 고민한 것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말 같기도 하다. 충실히 감정에 따르란 말일까? 참다운 독서라... 그렇구나... 참다운 독서... 다른 이야기지만 필사를 해본적이 없었는데 키냐르 책은 그러고 싶었다. 필사를 부분적으로 하다가 어느순간 전체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점점 화려해지기 시작했다. 악필이긴 하지만 점점 읽는 순간의 감정을 기록해 두고 싶어졌다. 마쓰오카 세이고의 말처럼 '실시간으로 느낀다' 한창 읽고 있는 도중에 무엇을 느꼈는지도 강조해 두고 싶다는 기분을 조금은 경험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까지 실험해 온 경험을 토대로 다양한 독서 프로세스의 특성을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과 파는 사람 사이에 확장시켰다.
이것은 책을 읽기 '전'과 읽고 있는 '중'과 읽은 '후'를 단절 시키지 않고 연결시킨 것이라고 해도 좋다.
브런치는 블로그와는 조금 다른 느낌을 받는데 그냥 완성되지 않아도 마음껏 직구를 던져도 된다는 느낌이다. 읽는 재미에 비해 쓰는 재미는 그다지 못 느끼고 있었는데 혼자서 노는 재미가 있었다. 내 글 속에 어떤 모방의 냄새가 나기도 한다. 그리고 가장 어려운 점은 어떤 글도 확신할 수 없음이다. 자신이 없는 글이 된다는 점이었다. 누군가를 설득해야 한다면 결코 할 수 없을 그런 글이다. 작가들은 어떤 확신으로 말할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저자와 독자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은 생각보다 까다로울 수 있겠다 싶다.. 한 쪽만 반응할 순 없는 것이니깐...
독서를 계속해 나가다 보면 그 내용이 방대해짐을 느낀다. 전에 없이 리뷰가 길어지는 이유가 그것이다. 기억해 두려는 것이 많아서 이기도 하고 그만큼 생각의 부피도 커지는 것 같다. 읽다가 틈틈이 리뷰를 적기도 한다. 이제는 페이지를 접어두는 것만으로 기억하기가 어려워졌다. 저절로 노트가 필요해졌다. 이 작가처럼 연대기 노트나 인용 노트까지는 못하더라도 블러그를 잘 활용하는 편도 좋을 것 같다. 작가의 글, 독서의 길에 대한 카테고리를 만들기도 했었는데 그런 인용구가 나오면 메모해 두기 시작했다.
<추천하는 다독술>
첫째, 독서를 생활 체험과 연동시키고
둘째, '의미의 시장'에 자리매김하고
셋째, 독서 행위를 지적 중층 작업의 방식으로 촉진하기.
책상에 정자세로 앉아서 책 읽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다. 집에서는 오히려 책이 안 읽힌다. 이동 중이거나 일이 없을 시간에 틈틈히 읽는 것이 좋았다. 깊이 읽는 데 방해받지 않는 시간이 좋은 것 같다. 집에서는 여러 가지에 방해를 받기도 하고 나 스스로 책에 몰입이 안 되고 눕고 쉬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책 읽는 게 쉬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좋아하는 책은 정독을 하고 그 외 여러가지 방법으로 읽는 것 같다. 그가 말한 예를 보자면 (1) 감독減讀, 탐독耽讀, 석독惜讀, 애독愛讀, 감독敢讀, 범독犯讀, 식독食讀, 녹독綠讀, 미독味讀, 잡독雜讀, 협독狹讀, (2)난독亂讀, 음독吟讀, 공독攻讀, 계독系讀, 인독引讀, 광독廣讀, (3)정독精讀, 한독閑讀, 만독만讀, 산독散讀, 조독組讀, 근독筋讀, 숙독塾讀, 역독逆讀 등이 있다. 한번 상상해 보라 한다.
<다른 사람의 독서법 참고>
하나, 엄권俺卷하다. 책장을 조금씩 읽어 나갈 때마다 잠깐씩 책 읽기를 멈추고 책장을 덮은 다음 방금 읽은 내용을 머릿속에서 떠올리면서 되밟아 나가는 방법이다.
또 하나, 신독愼讀하다. 독서한 내용을 혼자 독차지하지 말고 반드시 타인에게 제공하라는 방법입니다.아울러, 야학의 성격을 가지라. 독서는 언제나 밤에 뿌리를 뻗는 법.
나도 베스트셀러, 로맨스 소설, 판타지 등 잡다한 책을 즐겨 읽는 편이다. 지금도 여전히 기분전화겸 읽는다. 스포츠도 다양한 면으로 두루 섭렵한 편이다. 재미를 추구하는 건 여전하다. 그러면서도 파고들만한 책을 찾아 읽는다. 그런 부분에서 내 취향은 보편적이다. 부족한 부분이 여실히 들어날 뿐이다. 개성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만의 독서는 그동안에 꾸준히 해온 듯 싶기도 하다. 다만 좀 더 다양해지길 바랄 뿐이다... 그 거부감이 좀 줄어들면 좋을 텐데...
사람과 책이 겹쳐지면서 무게감이 커진다. 요즘에서야 그 말에 무게를 느낀다. 누구에게 추천받았다고 해서 와닿는 것도 아니고 내가 잘 읽었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니란 생각이 많이 든다. 결국 자신이 확인하고 확신해야만 하는 과정이란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특별한 누군가에게 추천받으면 그 책은 완전히 새롭게 느껴진다. 설레기도 한다. 나도 그런 설레임을 누군가에게 전해주고 싶어진다. 작가를 완전히 믿거나 존경하지 않는다고 부정하면서도 나는 그러질 못한다. 너무나도 반짝거린다. 눈부시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완전히 믿지 않는다고 거듭 말한다. 일말의 경계다.
<복합 독서법>
첫째, 비슷한 종류의 책은 가능한 한 함께 읽거나 비슷한 시기에 읽는다.
둘째, '책에서 책으로' 읽는 것이다. - 책의 바다, 텍스트 숲
셋째, 빛을 발하고 있는 한 권을 반드시 만난다. 열쇠의 책 = 키 북을 기본으로 해서 읽는다.
브런치에 매거진을 만들면서 그동안 읽어온 리뷰를 나눠서 담게 되었다. 그러면서 유독 중심이 되는 책이 눈에 띄었다. 아마도 나에게 그 책이 키북이 되었고 다른 책들과 점진적으로 읽어나가려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메타포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실존주의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손꼽히는 것이다. 또 여성작가 문학과 동서양 인문으로 해서 읽어나가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로맹 가리와 파스칼 키냐르 작품은 나에게 전체가 키 북이기도 하다.
<마쓰오카 세이고 키북>
(1) <이백>중국의 대표하는 고전시인, <우에다 아키나리>일본 소설가, 시인, <프랑켄슈타인>, <폭풍의 언덕>, <아서 클라크>영국작가, J.G 발라드의 <세월의 소리>
(2) 야코프 폰 윅스퀼 독일생물학자 <생물이 본 세계>, 스티븐 제이 굴드의 <판다의 엄지>
(3) 발트루샤이티스 리투아니아의 상징주의 시인 <환상의 중세>, 루돌프 비트코베어 독인의 예술 사학자 <이미지와 상징>, 프란시스 예이츠 영국의 역사학자 <세계극장>,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스기우라 고헤이의 <형태의 탄생>
(4) <마쿠라노소시>, <겐레이몬인우쿄노다이부 전집>, <도하즈카타리>, <이자카야>, <안나 카레니나>, <레베카>, <호소카와 가라샤 부인>, <완이라고 하는 여자>, <기류인 하나코의 생애>
(5) 페미니즘의 리안 아이슬러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인 여성운동가 <성배와 검>, 루스 이리가레이 벨기에의 여성운동가의 책이나 우에노 치즈코 일본 페미니스트며 교수의 책들 도나 해러웨이 미국 여성운동가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등
<토지>를 읽으면서 주춤한 결과 독서에서 멀어질 뻔했고.. 파스칼 키냐르 책을 읽다가 끝모를 이 거리감에 또 한번 주춤한 결과 다시 여기에 오기가 싫어져 버렸다. 그래서 그동안 안 읽었던 로맨스 소설을 잔뜩 읽어버렸다. 며칠을 꼬박!;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즐거운 생각을 많이 하려고 했다.. 마쓰오카 세이고 작가도 다른 책을 읽어 독서력을 회복하라고 한다. 기분 전환이 아니라 다른 독서 모드로 들어가는 것이라 한다. 그러면 독서 건전지가 충전된다고 표현한다.
도서 흐름을 눈에 익히려고 한다. 도서관이나 서점의 진열대 위의 신간이나 온라인의 순위라든지 또 이웃분들의 리뷰를 확인하면서 요즘 읽히는 책을 알아둔다. 그래도 여전히 다음 책으로 손이 선뜻 나아가지 못한다. 구경만 열심히 하는 편이다. 세이고 작가는 자신의 감각을 중요하게 여기면 개성도 산다고 한다. 책이란 결국 독자가 언제 어떻게 읽었는가 하는 경험과 함께 살아있는 것이라 한다.
아직 도구를 사용한 그런 독서는 전혀 바라지 않는다. 그저 읽는다는 것에 충실하고 싶다. 세이고 작가처럼 누구처럼 독서하기 참 힘들겠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 그래도 정확하게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천년이상 계속 진행해온 구조가 바로 책이라면 이 책의 콘텐츠를 따라올 것은 없다는 결론이다. 펼침 페이지로 구성된 심연이라고 생각하면 될까? 독서와 블러그는 이제 한 몸 같다. 나눔이란 생각도 든다. 독서 사회, 독서 문화, 북클럽에 대한 것들은 세계 어디든 앞으로 발전적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독서에 관한 서적을 찾아서 종종 읽지만 리뷰를 남기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나의 독서를 검증한다 생각하고 하나씩 짚어가며 읽었다. 문제라고 삼지않고 편하게 자유롭게 읽으라는 말을 전해 들은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 지치지 않고 어떻게 독서하는지 궁금했다....그런 면에서 조금은 해답을 찾았을까?
by 훌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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