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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훌리아 May 25. 2016

에밀 파게 <독서의 기술>

                                                                                 

다시 읽는다는 것은 다시 살아간다는 것이다.
진정 다시 찾아보고자 욕망할 때만 다시 읽어야 한다.

Iterum quae digna legi sint
다시 한번 읽을 가치가 있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읽게 될 소중한 책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천천히 책을 읽어야만 한다. 천천히 읽기는 모든 독서에 적용된다. 그것은 독서 기술의 본질과도 같다. 생각에서 태어난 생각, 감정과는 무관한 생각, 순수한 생각은 모든 일이 마무리되거나 거의 끝에 다다라서야 생겨나는 보편적인 생각이다.

거듭하여 읽기는 모든 연령의 즐거움이다. 그중 노년은 케케묵은 오해를 바로잡는 데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 시기다.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정신 깊숙이 불씨가 당겨지고, 상상력에 날개가 달린다. 조급함과 조바심에 멀어져 문체를 즐기며 기술적 측면과 사상의 배치 방식에 주의를 기울인다. 거듭 읽기는 책 읽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단단한 독서                                                     


작가는 모든 것을 녹여 버리는 방식으로
자신이 다루려는 덕을
인접한 모든 종류의 결점과 뒤섞는다.



1. 정신 + 새로운 힘



# 생각하는 행위
우리가 생각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정신의 힘, 의식하는 힘은 우리를 확장시킨다. 우리의 지성을 발전시킨다. 우리가 한 철학자를 읽으며 찾고자 하는 즐거움은 바로 사유의 즐거움이다. 작가의 생각과 해석하는 우리의 생각이 섞여 드는 또는 배반하는 사유의 즐거움을 맛보게 된다.

# 철학가와 작가의 내면 읽기
언제나 작가와 거리를 둔 상태라면 작가의 내면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 철학자를 읽는다는 것은 마치 그를 분석이라도 하듯 주의 깊게 읽고 또 읽는 것이다. 작가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존재로 마르지 않는 샘이며 우리는 그러한 작가를 읽어 나가며 많은 것을 얻는다.

# 모순 즐기기
언제든지 저자와 대치한 상태에서 그 방식을 뒤집어 볼 수 있어야 한다. 작가를 가장 밑바닥까지 소유하는 행위다. 작품의 뿌리나 씨앗을 소유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진정으로 작가를 알게 된다. 그들의 정신적 자유로움이나 돌연한 충동, 지적 분출은 풍요로운 사유의 변신을 가져다준다.

# 지적 건강을 위한 운동 (듣는 자세, 토론의 자세)
작가를 이해했다면 작가 스스로 반론을 펼치는 순간을 기다려 함께 생생한 기쁨을 나눈다. 독자 스스로 자신의 정신을 비좁게 만들면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선 작가에 맞서지 않고 작가만큼 원활하고 폭넓게 그가 갖는 생각의 길 위를 걸어야 한다. 또한 마지막에 이르러 명료하게 뜻이 일치해야 하며 또 다른 앎(작가가 틀렸음)에 감사해야 한다.


독자의 진정한 행복이란 바로 정신적 자유이다.
1) 작가에 의해서만 판단하려 하고, 2) 작가와 대립해서만 판단하려는
이 두 가지 사이를 언제나 비슷한 거리에서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EMILE FAGUET <L'ART DE LIRE>





2. 독서에 따른 독자의 특성



# 마담 보바리는 바로 나 자신이지!
좋은 허구는 우리를 발견으로 이끈다. 독서는 우리에게 자기 자신의 심리를 분석할 수 있기를 요구한다. 우리의 의식을 살피고 검토하는 습관을 길러 준다. 사실주의 소설에서는 관찰을, 이상주의 소설에서는 아름다운 감정을, 시인들에게서는 관찰과, 아름다운 감정을 포함해 새로운 율동과 운율, 조화를 발견한다.  베르길리우스, 호메로스, 호라티우스를 읽으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은 상당히 유별난 사람들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이성과 상상력, 감수성과 취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전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영혼까지 함께하는 정신 연구이다.

# 난해한 작가를 좋아하는 다양한 사람들
모든 보편 감각을 배제하려 한다. 느끼기 어려운 희귀한 감정만을 용납한다. 생각 외에는 그 어느 것도 이해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무지한 독자로부터 책에 담긴 생각을 지켜주길 원한다. 지성에 집착하며 자신의 허영을 채우려 하며 인정받길 원한다. 매우 적게만 정말이지 알 수 없는 그 무언가를 이해한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에만 탄복하고 미지의 것에만 매력을 느낀다. 호기심, 심연의 끌림, 부드러운 도취며 위엄이다.

# 작가는 소통하고 싶은 청중을 선택하고자 한다.
아무에게나 이해받고 싶지 않으며 자신의 의도대로 먼 상태를 유지함과 동시에 거리를 만들고 '입구'를, 이해를 막아선다. 하지만 대부분 '붙잡힐' 상당히 헛된 일이다. 가장 어려운 것에 돌진하는 멍청이가 있다. 여하튼 작가의 작업에 인내심을 발휘해 간결함으로 나가 꼼꼼하게 읽어 장치들을 파악하고 사상을 마주하며 파고들면 모든 게 밝혀진다. 비평가의 글은 언제나 마지막이 좋다.

# 조악한 책을 읽으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사람들
일종의 배출 행위다. 조악한 작가는 위대한 작가의 영광을 위한 밑거름이라 할 수 있다. 조악한 작가를 조금은 읽는 것은 나쁘지 않다. 바보 같은 책에 대한 증오는 쓸모없다. 다만 독서의 적으로 단지 여흥거리가 없어 시간을 때우려는, 취향도 적성도 없는, 저급한 문학을 더 조장하는 사람들은 떨쳐야 한다. 그리고 자기애나 (유행을 따르는) 소심함, 몰입이나 비판적이기만 한 정신도 주적이다.




3. 희곡의 특별한 독서방법



우선 해당 작품이 극장에서 자주 상영된 것이어야 한다. 작품을 읽으면서 동시에 작품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작품을 눈으로 본다는 것은 창의성을 쫓는다는 말이다. 무대에 올려지는 것을, 배우가 들어가고 나가는 것을, 대화를 주고받으며 행동하는 것을 극작가는 미리 보고 좋은 작품을 쓴다. 독자도 마찬가지로 무대에 올려진 것처럼, 배우를 보고 대사를 듣는 것처럼 봐야 한다.

고전 연극은 조각과도 같은 예술이다. 등장인물, 영혼, 생각, 사상, 눈으로는 선적인 아름다움에 만족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예술가로 삼는다. 극작가를 읽을 때의 즐거움은 바로 사상적 측면에서 무엇이 작가의 것이고 무엇이 등장인물들의 것인지를 가리는 일이다. 이 탐구는 깊은 몰입과 열정이 필요하다. 작가는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성이 남아 있어야 한다. 강조는 그 주관성을 알아볼 수 있도록 기능한다.




4. 소리로 그리는 문장



# 언어의 조탁가, 선별된 고결한 사람
시를 읽는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예술가이거나 예술가이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예술적 언어' 안에서의 독서를 원한다. 예술적 언어 안에서 세계는 말하지 않는다. 단지 들려올 뿐이다. 시인과 시를 읽는 사람들 사이에는 특별한 유대감이 있다. 추상적인 생각을 하고 순전히 작가나 작중 인물의 설명만으로 이뤄진 책 읽기를 즐기며, 내적 성찰에 능한 사람이다.

조탁(彫琢)   1.보석과 같이 단단한 것을 새기거나 쫌. 2.문장이나 글 따위를 매끄럽게 다듬음.


시는 처음에는 매우 낮게 읽고 그 후 소리 높여 운율과 음성적 균형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의미는 이미 파악한 상태여야 하며 정신은 놓치지 않고 따른다. 귀로 듣고 이해하려는 목적이다. 마침표, 쉼표 그리고 콜론, 세미콜론 등에 유의해야 한다.(콜론, 세미콜론은 한국어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구두점이 잘 찍힌 판본으로 시를 읽어야 하며, 꼼꼼히 살펴야 한다.

구두점 유의하기 - 마침표(.), 쉼표(,), 콜론=쌍점(:), 세미콜론=쌍반점( ; )


운율의 문장은 한 문장이 보통 이상으로, 단어가 울려 퍼지거나 잦아들면서, 리듬이 생명을 얻거나 사그라지면서, 어우러지는 것이다. 우리는 단어가 세계를 그리는 법을 보게 된다. 즉 보편적인 리듬과 소리의 울림 그리고 침묵이 세계를 그린다. 이 모든 것이 음악으로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며 균형을 표출하는 방식이다. 리듬이란 본래 의미 자체며 생각에 앞서는 것이다. 그것은 작가 영혼의 움직임, 직접 소통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다.

음악처럼 쓰는 작가의 글을 함께 천천히 음미해야 한다. 화가를 대하는 것처럼 공부해야 한다. 총체적 인상은 모든 요소가 어우러져 비로소 드러난다. 글이라는 알을 품어 부화의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 진정한 시인은 비평가와 일치된, 비평가와 함께하는 시인이다. 비판은 창조하기 위함이다.






암호가 걸린 언어를 번역하는 작업으로,
암호를 풀 힌트를 찾아내야 한다.
가끔이라면 즐거움이나 이로움이 없지도 않을 것이다.

독서란 권태로움이 자기애를 물리치고 승리를
거머쥐는 행위다.

책은 우리에게 남을 마지막 친구이며,
우리를 속이지도, 우리의 늙음을 나무라지도 않는다.

- 에밀 파게 -






<마무리>


무모하게 돌진하던 나날들이 떠올라 뜨끔했다. 맙소사.... 뭘 바란 건 아니고 호기심이 분명할 테다. 그런 새로움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더더더 읽었던듯하다. 지금은 한풀 꺾였다. 10년에 한번 오는 운명의 작가를 2번이나 만났으니 앞으로 20년은 못 만날 수도 있다. 아니 좀 더 분발하면 더더더 많이 만날 수도 있을 테다. 그물망을 되도록 넓히는 중이니깐..

프랑스인이 100년간 즐겨 읽은 독서법의 고전이라 한다. 에밀 파게Emile Faguet(1847-1916)는 보편적 독서 원리를 파악해 주고 있다. 극작가에 대해 가장 어렵다고 여기던 참이었데 설명해 주어서 좋았다. 여전히 고리타분한 느낌을 지을 수 없어서 문제지만 친근해졌으면 좋겠다. 또 비판적 독서가 주는 폐해도 있지만 비판적 독서가 주는 장점도 분명히 있다. 아직은 나에겐 비판적 독서가 어렵다.

책을 더 잘 읽을 수 있도록 독서법을 점검한다. 분명 두어 번 집어 든 책이다. 처음엔 읽을 수 없어서 덮었다. 어느 때에 읽을 수 있다는 신호 비슷한 걸 느낀다. 첫 장에서 넘어갈 수 있는 느낌? 시를 읽는 방법, 난해한 작가와 독자에 대한 그의 설명은 조금 신랄했다.  그러면서도 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독서력도 키워야 함을 이해시키려 했다.

애니메이션의 어원은 '영혼'이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애니마(anima)' 와 '살아나게 하다'의 의미를 가진 애니마투스(animatus)에서 유래했다. 나는 분명히 만화를 본 순간 감동 그 자체였다. <플란다스의 개>는 내가 기억하는 첫 애니메이션이다. 만화를 읽기 전이고 아주 어릴 적인데 나는 말 그대로 펑펑 울었다. 아마도 내 독서는 거기서부터 일까 (의미 없이) 생각해 본다.

문학의 공백기 동안 만화와 로맨스 소설로 대부분 채웠기에 나는 그 조악하다-할만한 책들은 모두 섭렵했다. 나는 조악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독서는 자연스럽게 흐른다고 생각한다. 내가 더 이상 볼 것이 없다고(순정만화는 원없이 봤다) 판단했기에 다른 것을 찾아 나선 것처럼 그렇게 문학을 만나고 시를 만나고 또 새로운 작가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도 마지막으로 읽게 될 소중한 책에 이르기까지 천천히 방향을 잃지 않고 읽어나갔으면 좋겠다.

지금 시대는 더 이상 틀어박혀 책 읽을 시간이 없음을 안타깝게 토로한다. 온전히 읽었다 할 수 없는 독서라고 나도 생각한다. 시간에 잡아먹히는 듯 쫓기듯 책을 읽고 덮는다. 독서에서 적이란 인생 그 자체라 한다. 삶은 책을 읽기에 알맞지 않다고 말하니 납득이 되는 이유가 뭘까. 삶을 단순하게 하라는 뜻이라고 여기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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