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문학에서 찾다
책이 바로 나다
이 책을 기다린 시간이 오래다. 읽어야지 하고 생각했던 시간이 반 년이나 지났다. 책도 인연이란 말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올해는 그런 인연이 참 많았다. 키냐르 작가와 작품 리뷰를 찾다가 알게 된 이웃분이시기도 했다. 나중에서야 벨레누스님이 작가라는 사실을 알았다. 꼼꼼하게 리뷰를 읽기엔 어려웠다. 그래서 읽을 수 있겠다 싶은 만큼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여전하다. 사람마다 사유의 깊이 젤 수가 없다는 생각도 종종 든다. 작가 소개에 철학과 신경과학의 융합연구에 관심이 많다는 부분에 저절로 고개를 끄떡였다.
프롤로그를 읽고서 남은 글자는 '연약함'이었다... 우연하게 뻐꾸기 새끼가 나오는 다큐를 보게 되었다. 뻐꾸기의 새끼는 본능으로 다른 새의 알과 새끼를 둥지 밖으로 밀어낸다. 모르면서도 익히 알고 있는 본능이다. 연약하지 않은 생명이 있을까? 한 번도 연약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연약하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 강해져야 했다. 뻐꾸기 새끼로 인해서 죽어버린 또 다른 연약한 존재는 우연이란 것, 상황이란 것으로 인해 자신의 생명이 끊겼다. 그런 상황과 우연이 없었다면 그 생명도 본능적으로 최선을 다해서 생을 살았을 테다....
<카프카의 서재>는 고전 문학을 소개하고 있다. 차례를 보곤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읽은 책이 단 한 권도 보이지 않았다. 기쁘게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내년엔 이 차례 중에 몇 권의 책은 찾아서 읽으리란 계획을 세우고 싶어 졌다. 제목만 뚫어져라 보아왔던 그 작가들의 책이다. 읽고 싶어도 읽을 수 없다는 결론을 짓곤 했다. 내 취미가 구경이다. 읽어보고 싶다는 간절함이 최고치가 될 때 읽는 게 가장 좋기도 하다. 세이고 작가가 말한 것처럼 열쇠의 책을 더 많이 찾고 싶어 졌다. 여기에도 그런 책이 있을까 궁금했다.
삶의 불편한 진실. 불순물처럼 취급될 수 있는 사소한 에피소드 하나가 실은 운명을 좌우하는 열쇠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최초의 연습공연은 삶 자체라면 단 한 번뿐인 생에는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불멸> <커튼> - 필립 로스 <휴먼 스테인>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쿤데라는 삶이 감춘 우연과 아이러니를 읽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작가라 한다. 인생에서 어떤 에피소드는 거부하려면 거부할 수 있을까? 란 생각이 들었다. 하찮은 에피소드 하나가 운명의 대못을 찍어댄다. 거부권이 애초에 있을 턱이 없다. 거부할 만한 커다란 비극이 그 당시에는 눈에 보이지 않았을 테고 알았어도 똑같은 선택뿐이란 생각이 든다. 우스운 생각인데... 신이 있다면 제발 착하게 살 테니 다음 생이 없게 해 달라고 빌고 싶어 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심쩍은 생각이 든다. 반복해서 살고 있는 거 아닌지 전생의 업만큼 지금을 되풀이하는 것 아닌지 싶다. 업은 또 쌓였고 나는 다음 생을 준비해야 될 것만 같다.
완전한 소멸이란 게 분명한가 싶다. 죽음이 끝이라고는 한다지만 내가 탄생 이전을 기억 못 하듯이 죽음 이후 도 기억하지 못할 테다. 기억하지 못하는 그 이유가 소멸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근원을 찾아들어가는 이유가 완전한 소멸이 아니라고 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디에도 없다가 나타난 것이 확실한가? 조상님들 중에 한 분만 삐끗하였어도 나는 태어나지 못할 그런 과학적인 증명 말고 내가 존재한다고 느끼는 '이것'이 무언지 궁금하긴 하다...
우리 자신의 객관적 정체성에 관한 문제 시간이 자신의 정체성을 밝혀주기 전까지 그 누구도 자기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 아이스킬로스 <안티고네> - 에우리피데스 <바커스의 여신도들>, <휘폴리토스>
2천4백여 년 전에 쓰인 작품, 그리스 비극 작품, 그저 신들이 기획하고 연출한 운명의 드라마에서 장기판의 졸처럼 휘둘리는 불쌍한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고통스럽게 절규하는 바로 자신이었다고 말한다. 삶의 미스터리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고 한다. 작가는 원어로 읽고 싶어서 희랍어를 배우고 싶었다고 한다. 언어의 기원에 대체 무엇이 있길래...라는 생각이 든다.. 키냐르도 그랬다. 인간의 입으로 나온 최초의 것엔 무엇이 담겨있는 것인가? 처음 발견한 것에 비밀의 열쇠라도 있는 것인가? 책은 거울이면서도 나를 완전히 비추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내 존재가 완전하지 않아서일까? 불완전함을 채우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것인가?
너는 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았고, 행복할 때도 마치 다른 사람의 영혼인 듯 취급했다. 어차피 무의미한 생, 사랑이건 혁명이건 무엇이건 간에 인생 전체를 걸고 과감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베팅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결과엔 무조건 승복하고 인정하기.
# 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 파스칼 <팡세>
스위스의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대한 리뷰를 참 많이 보았었다. 읽어야 할 작품 중 하나다. 저 열차를 타고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항상 들었다. 어떤 이야기로 날 매료시킬까? 궁금했다. 리뷰를 읽지만 리뷰는 내가 책을 읽지 않아서 오는 갈증만 나게 한다. 이 책 속의 책 <언어의 연금술사>의 프라두가 인상 깊었다. 내가 작가를 추적할 때의 그 느낌이었다. 미안할 정도로 내가 로맹 가리를 헤집지 않았던가... 작가가 깨닫는 것을 목격하고 나서의 기분은 무척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사실 그렇지 않았다... 그가 놓아버린 걸 나는 놓아버릴 수 없는 미련만 남았다. 그레고리우스가 프라두에게서 목격한 것 그리고 그다음은.... 이 마음을 가지고 이 책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생태계를 규제하는 유일한 법칙이 있다면 생존과 번식 전략이라고 말한다. 물리계든 생물계든, 세계는 원초적으로 어떤 '의미'라는 속성도 갖고 있지 않다. 자살하지 않고 계속 살아가야만 할 이유나 의미는 무엇인가?
# 알베르 카뮈 <시지프의 신화> - 셰익스피어 <햄릿>
시지프의 신화는 코린토스의 왕이었던 시지프가 온갖 사고를 친 끝에 신들이 내린 벌로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굴려 올린다. 는 줄거리를 익히 알고 있다. 카뮈의 <이방인> 읽고서 이어서 읽으려고 했었다. 꼭 추천되는 작품이었다. 실존주의 작품으로 <이방인> <고도를 기다리며> <모래의 여자>가 떠오른다. <설국> <스토너> <마그누스> 이런 작품도 삶의 무의미가 느껴지는데.. 내가 주로 읽으려고 했던 작품들이 비슷한 형상을 띤다.
가끔 그 사건이 사실이었는지 기억에 없다. 아주 어린 초등학생이 한적한 골목으로 들어가선 나오지 않았다. 그 아이가 타살이 아닌 자살로 보도되었다. 평범한 집의 아이였다. 문제라곤 닥히 보이지 않았다. 그 아이가 무지해서 라고 하기엔 답이 되지 않는다. 삶의 덧없음을 느끼는 어느 때의 인간이라면 진지하게 고민했으리란 생각을 하지만... 그 아이는 생이란 것을 지나치게 빨리 알아버린 건가? 그런 생각도 했었다. 산 사람에게는 미스터리를 풀 기회와 치유가 있어왔다고 생각한다. 일부분 받아들이고 체념하기도 하고 어떤 의미를 부여했다.
당신이 자살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의 대답은 영원한 침묵이 아닐까 싶다. 살아있는 사람에 대한 예의, 그 삶이 고통이라도 견뎌왔던 사람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인류의 연속을 위해서 나도 여기에 끼여서 돌아가야 된다면 저항할 수 있는 저항 몇 가지를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리고 가장 오래도록 살아남아서 동시대의 사람들을 끝까지 지켜보는 것으로 생을 경멸할 생각도 했다. 참다운 독서는 사유하는 것이라고 했다. 생각은 붙잡을 수 없다. 거기까지 라고 해서 멈춰지지 않는다. 언젠가 사라지고 없을 나를 위하여! 책을 많이 읽자! 세이고 작가는 책은 살아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의 뜻이 이런 거였을까? 당신의 불꽃 심장이 움직이게 하는 것을 보라!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일찍 깨닫지 못한다. 미로 같은 세상을 헤매고 또 헤맨 끝에, 돌고 돌아 결국 원점으로 돌아와버렸다는 것. 인간이란 존재가 바로 그런 미로적 세계에 던져져 있다는 사실이다. 패배할 수밖에 없는 삶, 탄생 자체가 유죄이며 자신이 지금 어떤 미로를 헤매는지도 모르는 채. 끊임없이 어딘가를 갈망하지만 한평생 방황하다 허무하게 스러져가는 세계.
# 프란츠 카프카 <소송> <성> <황제의 사자, 단편> <만리장성의 축조> <어느 학술원에의 보고> <변신>- 소포클레스 <다이달로스> - 질 들뢰즈 <소수집단의 문학> - 박상룡 <죽음의 한 연구> -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카프카가 살았던 1차 세계대전,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유대인 아버지 훈육 아래서 작가로서의 정체성, 삶과 글쓰기의 딜레마로 깊은 고독과 고뇌로 가득했을 그 존재가 이 세계의 묘사와 그의 작품세계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김운하 작가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작품세계를 단순화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그는 이 작품을 신이 없는 세계의 미스터리를 미로로 형상화했다고 말한다. 미로엔 출구가 없다. 호러영화보다 무서운 이야기라고 표현한다.
미로는 가능성과 불가능성 자체가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모호함이 지배하는 장소, 그러한 세계에서 출구 찾기 자체가 근본이라 자유는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출구를 찾기 위해 투쟁하지만 대부분 실패하는 삶이라... 자신의 눈을 찌르고 개처럼 칼을 맞는다... 이웃분이 올리신 고은의 시가 떠오른다. 함박눈이 내립니다. 함박눈이 내립니다. 모두가 무죄입니다. 이 짧은 시를 읽고 풀리지 않는 감정이 남았는데... 우리 죄를 사하여 주는 건지 싶다. 진실은 밝혀지지 않은 채 유죄를 받는 삶이다. 그런 삶을 가리켜 무죄라고 말하여 주는 걸까?....
왕조와 문명들이 그렇게 스러져가는 동안 우리에게는 무엇이 남아 있는가? 시간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 놓았는가? 예술의 역사는 기술과 달리 각 개인의 독창성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 공자 <논어> -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 릴케 <두이노의 비가>
공자의 <논어>에는 인간미 넘치는 이야기, 삶의 시난고난한 고뇌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는 긴 서양 역사를 통해 신적인 영감으로 가득 찬 책이라 한다.
현대 서구사회는 스스로 자멸해가는 중이다. 지금 세상엔 더 이상 사랑도, 우정도, 희망도, 구원도 없다.
# 미셸 우엘벡 <소립자> <투쟁 영역의 확장> <어느 섬의 가능성> -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 로버트 버튼 <우울의 해부> - 레이 커즈와일 <특이점이 온다>
미셸 우엘벡은 획일화된 세상, 모든 것이 발달하고 풍요로워진다 해도 인간관계는 차츰 불가능해지며 여러 가지 인생 에피소드는 줄어들어 21세기는 뻔하다고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무제한 경쟁, 무한한 증식과 확장, 모든 것을 투쟁으로 물든다. 연애도 결혼도 개인주의 같은 기본가치들 마저도... 우엘벡의 소설들은 결국 현대 사회에서 짝짓기 경쟁에서 탈락한 루저들의 분노와 반항의 이야기라 한다. 사랑은 결코 얻지 못할 바에야 양성 일체 불멸하는 신인류가 등장 한들 어떠랴 싶기도 하다. 그렇게 진짜로 써버린 소립자란 소설을 감당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리뷰도 감당이 안되더니 역시나 이 작가는 참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다!
사랑을 진심으로 믿느냐는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나를 못 믿겠다는 게 그럴듯한 대답이 아닐까? 나는 나를 믿지 못하겠다. 내 어느 구석에 진심이란 게 있을는지... 사랑하는 대상 모두가 나와 같다고 한다면 사랑에 진심 따윈 없다. 그때 그때 상황이 그러했을 뿐이다. 꾸며진 것, 꾸며낸 것, 감정만 드러낸 것, 거둘 수 없는 감정의 찌꺼기... 다만 한 가지는 있다. 그립다. 보고 싶다. 보고 싶은 한 사람이다. 내가 유일하게 날 믿을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이다. 사무엘 베케트와 같은 사랑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아내만 떠올리다 그녀 곁으로 가는 것이다.
나는 온 세상에서 휴식을 찾았으나, 한 권의 책과 더불어 구석진 곳이 아닌
어디에도 휴식을 발견하지 못했다.- 토마스 아 켐피스 <예수 그리스도의 모방> -
# 조지 기싱 수필집 <기싱의 고백> - 알베르토 망구엘 <독서의 역사>
냄새만 맡고도 자신의 책을 분간하고 책을 펼쳐놓으면 그 책과 관련된 온갖 일들이 떠올린다는 조지 기싱 작가를 나는 모른다. 여기까지 <카프카의 서재>를 읽으면서 소개받은 책중 가장 읽고 싶은 책이란 생각을 했다. 나는 왜 이 작가를 모르고 있을까 애석해하는 중이다.(기억에서 사라졌거나) 전자책과 종이책 중에서 나도 종이책이 좋다. 다만 종이책이 아니어도 상관이 없다. 책장이 없어도 상관이 없는 것처럼... 이런 말하면 덜 사랑하는 것 같아서 그렇지만... 김운하 작가 스스로 자신이 낡은 것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또 한번 날 애석하게 만든다...
행복은 책을 자발적으로 찾아 읽는 개인에게만 전적으로 속하는 것에 나도 동의한다. 찾아 읽는 동안 행복이란 생각을 못했는데 이제는 그저 읽고 있다는 것 마저 잊어버릴 때가 좋은 것도 같다. 지치기도 했지만 회복하려던 것도 책을 다시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책은 나를 잊게 한다. 솔직히 내가 좋아할 만한 책은 빠트리지 않고 이 생에서 마저 읽고나 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김운하 작가가 1만 권을 읽고도 정말로 읽고 싶은 책이 얼마 남지 않아서 암울한 기분에 빠진다고 하는데 나는 얼마나 다행인가! (죄송하지만 얼마나 위안이 되는 말인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그 모든 것이 헛되도다
# 작자 미상 <코헬렛>
약 23세기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짧은 단편 소설, 과거 성경 번역자들이 <전도서>라고 번역했던 구약성경이라 한다. 무신론적인데다 허무주의적인 인생관이 결합한 것처럼 보인다 한다. 코헬렛의 저자는 신에게 매달리지 않는다. 그는 카이로스-때를 놓치지 마라-를 잡으라고 권한다. 우리가 지배하는 시간을 말한다. 다만 알아도 못하는 것이 많을 뿐이지만..
불쌍한 것!
우리는 모두 형제간이지.
모두가 구더기 밥이니까.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영혼의 자서전>
니코스 카잔 차스키는 실존 인물인 게오르게 조르바를 모델로 삼아 조르바의 이야기를 썼다고 한다. 이 책을 읽어봤을 뻔도 했는데... 작가가 소개하는 조르바라는 인물이 실로 짐승 같다. 또 다른 날 본 다큐에서 우기가 끝나고 초원의 변화와 함께 동물들의 집단 출산과 조르바가 겹쳐졌다. 그에겐 언제나 우기가 끝난 초원과도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조르바에게 자유란 자연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스스로 제동을 걸어버린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 그 제동이 잘 학습된 인간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무의식 깊은 곳으로 잠기고 말... 과거가 사라져 버린다는 것... 내가 누구인지를 더 이상 알 수 없게 된다는 것
#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모리스 블랑쇼 <기다림 망각> - 밀란 쿤데라 <웃음과 망각의 책> - 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인 유전자> - 토마스 홉스 <시민론>
기억이 실제 경험을 왜곡시킨다. 미래를 멋대로 꾸며내고 과거를 멋대로 각색하는 기억이라면 인생의 진짜'진실'은 어디에 있는지... 정치인처럼 실시간으로 자신의 하는 말과 행동이 비디오도 찍히지 않는 이상 개인은 무엇으로 증명이 될까? 개인마다 자신의 머리꼭지에 CCTV라도 달아두고 너 언제 어디서 이렇게 말했잖아. 이게 너의 진실이었다! 고 말해야 할까?
인간의 행복은 무엇으로 말할 수 있는 걸까? 경험과 기억 둘 다 떼려야 뗄 수가 없다. 지젤과 개코원숭이는 때론 공동체 생활을 한다. 위험을 서로 알려주고 자신과 새끼를 보호한다. 짐승들도 협력이란 것을 한다. 떼를 지어 다니는 동물들이 하나라도 더 지켜낼 수 있었다. 하이에나도 사자도 표범도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있는 짐승들도 먹이를 새끼에게 먼저 준다. 동물들은 살아남는 본능에 충실하기만 한데.. 인간은 본능과 또 망각 사이에서 살다가 말 존재인 건지....
21세기 학계의 가장 큰 특징은 여러 학문 간의 융합 현상. 인간을 닮은, 인간처럼 사고하는 기계를 만들어내는 방향. 인간만이 가진 고유함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 이케가야 유지 <단순한 뇌 복잡한 뇌> - 샹커 베단텀 <히든 브레인> - 존 설 <마인드> - 제프 호킨스, 샌드라 브레이크 슬리 <생각하는 뇌, 생각하는 기계>
과학과 뇌는 탐구하는 부분이 다르다고 한다. 과학은 본래의 것, 사실을 탐구하는 학문이고 뇌는 우리 자신의 마음작용에 관한 탐구란다. 뇌에 이상이 온다면 우리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통 마음이 무엇이고 자아가 무엇인지 말하려고 했던 것들의 가치가 달라질 수 있음을 말한다.
신이 있다면 뇌를 만들 때 우주를 본 따서 만든 것은 아닐까? 아직 우주도 다 밝히지 못한 것처럼.. 뇌도 아직 일부분만 밝혀졌을 뿐이고... 우리는 우주에서도 뇌에서도 아주 일부분만을 차지하고 사는 것 같다... 무의식으로 깨닫고 있는 것을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나는 책에서 인생의 깊이를 배웠다. 나는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늘 경험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회의하고, 그것을 성찰함으로써 지혜를 얻으려 애쓴다.
# 몽테뉴 <수상록>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 보르헤스 <책> - 단테 <신곡>
늘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는 기쁨을 주는 책들을 숭배하는 방식은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라고 한다. 동시에 행복을 누리는 한 방식이라고도 한다.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만 책을 읽었고, 글을 썼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자신이 잘 살고 잘 죽는 방법을 가르치는 학문만을 보았던 것이다. 나도 이 사람의 책을 꼭 한번 읽어보고 싶다.
보르헤스는 <책>이라는 에세이에서 책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공감이 가는 문장을 섰다. p250-252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만을 잃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책은 행복을 얻는 한 방식이라는 점에서 (중략) 읽기보다 다시 읽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내가 책을 숭배하는 방식이다.
*고통스러운 생각에 사로잡히면 그것을 억제하는 것보다 생각을 바꾸는 편이 훨씬 빠르다.(중략) 생각이 바꾸면 위안을 얻고, 문제가 풀리고, 번민이 없어진다.
*우리의 삶을 옳게 즐기는 법을 아는 것이 절대적인 완벽함이자 실질적으로 신성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삶의 용도를 모르기 때문에 다른 조건을 찾고, 우리의 내면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기 때문에 자신에게서 벗어난다.
*나는 나 자신 안에서 뒹군다
김운하 작가가 소개해준 책들을 보면서 나에게도 독서 세계가 있다면 이렇게 나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가을쯤 김탁환 작가의 <읽어가겠다>를 읽었을 때처럼 또 다른 작가와의 만남을 주선받은 듯한 느낌이다. 내년에도 잘 읽어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인간이 더 인간다울 수 있도록 우리는 책을 읽는지도 모르겠다... <카프카의 서재>는 작가의 질문이 있는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의 생각은 이러한데 너의 생각은 무어냐라는 질문의 반복이었던 것 같다. 책을 읽다 보면 나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기에 심심하기도 한데 여기선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김운하 작가는 말 속에 나이가 없는 것 같다. 유쾌함이 묻어난다. 그런 상실과 좌절과 인내와 고통이 지나갔어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와 함께 사유의 바다를 헤엄친 것 같다. 그저 행복, 그저 기쁨, 그저 즐거움, 그저 슬픔, 그저 고통, 그저 허무 그것들이 언제나 소중하게 있어왔음을 생각했다. 없어서 안 될 것들 그래서 여기, 그래서 지금, 그래서 존재를 느끼다 사라질 것들을 생각했다...
벨레누스님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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