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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훌리아 Feb 22. 2016

문학은 변신이다. 샤를 단치 <걸작에 관하여>

걸작은 누가 결정하는가?

위대한 작가나 천재에 대해 더는 신뢰하지 않게 되면서부터 걸작이라는 흥분되는 개념을 믿지 않게 되었고 우리는 '고전'이라는 중립적인 개념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걸작이라는 개념은 교육자들에게 한 번도 받아들여진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은밀히 말하면 모를까. 걸작은 언제나 무시당하며 먼 거리에서 논의되어왔다. p167



샤를 단치 <걸작에 관하여>

01. 작가 없이 문학이 존재하지 않는다.

걸작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면 문학이 독자적으로 설 수 없었을 것이다. 문학은 더 위대해지려고 영역을 확보했다. 해변에서 모래성을 쌓는 아이가 되어 거기에 걸작의 성벽을 쌓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작가의 자리는 상아탑에서 비행기로 옮겨갔다. 3,000년 동안 한자리에 있다가 이제는 매일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문학은 도약하면서 발전한다. 지속적인 발전은 환상이다. 걸작은 바뀌었다.

작가 없이 문학이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를 빼고 문학을 이야기할 수 없고 문학 없이 작가를 이야기할 수 없다. 작가가 어떤 일을 했고 어떤 사람이며 어떤 사랑을 했는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창작의 과정은 존재한다. 방법론은 없다. 감수성, 포기, 예상치 못한 것을 뜻한다. 길들일 수 없는 것들, 붙잡을 수 없는 성질이다. 작가 자신도 모른다. 한순간 깨닫고 멀리 사라진다. 지능이 걸작을 만드는 유일한 능력이 아니며 철학자로 타락하지 않는다.

훌륭한 작가는 자기 자신과 문학, 그리고 자신이 사는 시대를 신뢰한다. 걸작은 언제나 기적과 감동을 준다. 우리가 걸작을 찬미하는 것이다. 걸작은 현재의 조각이고 영원한 현재다. 현재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현재를 대표하는 작품은 아니다. 나중에 그 시대에 색깔을 입혀준다. 작가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곳이 천국 또는 다른 어떤 것이라고 더욱 믿게 된다.

작가는 작가 자신보다 더 좋은 책을 쓰려고 노력한다. 이는 조물주를 자처하는 작가에 대한 신의 복수인지도 모르겠다. 걸작의 작가는 신처럼 숭배받는 자기 책을 통해 존재하지 않는 신을 비웃는다. p20

작가에게 문체는 문체가 아니라 숨 쉬는 것이다. p34




02. 문학을 완성하는 것은 창작이다.

출간 연도, 작가의 국적, 장르 어떤 것도 걸작의 기준을 찾을 수 없다. 걸작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고 평범함과의 단절이다. 독창성이 걸작의 유일한 공통점이다. 떤 걸작도 진정으로 인기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걸작이란 용어는 너무 부정확하고 작가를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사람'이 아니라 똑같은 것만 계속 생산하는 사람으로 축소한다. '위대한 작품'으로 부르는 것이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오늘날에도 옛날처럼 걸작을 불러와야 한다. 죽음은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 문학을 완성하는 것은 창작이다. 가장 훌륭한 창작은 창작에 대한 성찰이다. 작가는 글을 쓰면서 만들어지는 메아리를 전달하는 사람이다. 감정의 폭은 사랑의 흥분, 상처, 실패, 성공 그것이 전부다. 작가의 재능은 세상과 다른 또 다른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다른 세계에서 더 강렬하게 산다.

- 걸작 문학-
소포클레스 <콜로노이의 오이디푸스>, 한나라 <고시 19수>, 오비디우스 <비가>, 조반니 보카치오<데카메론>, 크리스토퍼 말로 <에드워드 2세>, 월리엄 셰익스피어 <리처드 3세>, 제임스 보즈웰 <새뮤얼 존슨의 생애>, 장 라신<페드르>, 스탕달<적과 흑>, 윌트 휘트먼<풀잎>, 아르튀르 랭보<지옥에서 보낸 한철>, 레프 톨스토이<이반 일리치의 죽음>, 헨리 애덤스<헨리 애덤스의 교육>, 프루스트<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안톤 체호프<벚꽃동산>, 페르난두 페소아<알바루 드 캄포스의 시>,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위대한 개츠비>,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뉴욕에서>, 장 주네<꽃의 노트르담>, 토마시 디 람페두사<표범>, 토마스 베른하르트<비트겐슈타인의 조카>......
- 혼자서 발견한 귀하고 연약한 책 -
로마제국 루틸리우스 나마티아누스<귀향>, 중국 14C말 명교중인<풍월전>, 프랑스 필립 데포르트<작품집>, 독일 하인리히 하이네<이념들, 위인의 책>, 프랑스 쥘 라포르그<전설적인 도덕>, 프랑스 프랑시스 잠<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 미국 셰우드 앤더슨<와인즈버그, 오하이오>, 포르투갈 안토니우 보투<노래>, 영국 크리스토퍼 이셔우드<베를린이여, 안녕>, 이탈리아 알베르토 사비니오<도시여, 너의 심장소리를 듣는다>, 프랑스 레옹-폴 파르그<굽이굽이>, 미국 셸비 풋<건기의 사랑>, 이탈리아 마리오 프라츠<생명의 집>, 프랑스 베르나르 망시에<랑드 지역의 삼각지대>, 예후다 아미차이<예루살렘의 시>, 고어비달<미합중국>, 이탈리아 조르조 만가넬리<아프리카 여행>....
- 자신이 좋아하는 걸작을 서로 연결가능한지 알아본다 -
마쓰오 바쇼 <오쿠로 가는 작은 길>, 막스 자코브 <흑색 방>, 니콜라 샹포르의 잠언집<완벽한 문명의 산물>, 블레즈 상드라르의 시집<세상에서>, 체호프 <세 자매>, 테네시 윌리엄스<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훌리오 코르타사르<불 중의 불>,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브로디의 보고서>,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테오레마>, 알베르 코앵<영주의 애인>, 앙리 드 레니에<미발표 수기 1887~1936>, 마튀랭 레니에<풍자>....
- 걸작은 현실과 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걸작은 우리에게서 나온다. -
기업가들은 걸작을 무시한다. 걸작은 인기가 없다. 2010년 미국의 풍자만화가 마크 피오레는 아이폰을 만드는 애플사에 자신의 시사 만평 애플리케이션을 판매하려고 했지만 거절당한다. 캐리커처가 "공인을 희화화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스티브 잡스 '포르노그래피'와 싸웠다. 아이폰과 아이패드에 포르노물 없다고 자랑했지만 거기서 수많은 성적 네트워크 애플리케이션이 배포되고 있다. 애플리 애플리케이션에 도덕적 검열을 하지 않고 소설<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만화로 만든 앱을 금지하기도 했다. 문학작품을 과도하게 해석한 게 이유였다.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소수자들의 걸작은 멸종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다.p218




03. 좋은 독자는 꽃이 내는 굉음을 들을 수 있다.

좋은 독자는 걸작을 부정할 수 있다. 더 잘 쓰인, 더 깊게 성찰한, 이미지로 사고하는 어떤 책과도 닮지 않은 자신만의 리듬을 가진 책들을 읽었다. 현실과 떨어져 있고 시간을 초월한, 연기처럼 실체 없는 작품, 서정적이면서 어둡고 바다 같은 이야기다. 어떤 운율법으로도 상상할 수 없는, 무척이나 특별한 떨림으로 쓴 책을 알아본다.

진지한 독자들은 즉각적인 통찰력과 편파적인 열정을 가지고 있다. 많은 수의 독자가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문학계에 중요한 인물 이상의 존재가 될 것임을 직감한다. 문학의 고집쟁이들은 그 책이 신분에 맞게 다뤄질 수 있도록 온 정성을 다한다. 걸작은 자신의 꽃봉오리를 열고 반가워하는 사람들이 지르는 행복한 비명이다. 훌륭한 책만이 독자의 걸작이 된다.

주위에 수많은 걸작이 있다. 멀리 있는 것은 찾기가 더 어렵다. 보통 다른 사람들의 추천을 통해 알게 된다. 진열장 뒤편, 이 빠진 그릇들 사이에서 반짝이는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 연약하고 귀한 걸작은 빛이 밝으면 시들 수도 있다. 독서는 잠수하는 것이다. 걸작은 절대 엄청나게 많은 수의 사람이 읽는  책이 아니다. 한 번은 들어봄 직한 책이다. 책이 담고 있는 소중한 것, 이야기를 들려주는 특별한 방식을 지켜야 한다. 독자는 걸작을 지키는 보초병이다.

숨겨놓은 걸작
루이 레른 <뿔>, 피에르 에르바르<상상의 추억>, 엔니오 플라이아노<실수 일기>, 리처드 브라우티건<미국의 송어낚시>, 맬컴 라우리 <화산 밑에서>, 이탈로 칼비노<반 쪼가리 자작>,
좋은 독자는 세상에서 가장 덜 종교적인 존재다. 그는 자신의 쾌락을 증가시키기 위해, 아니, 자신의 존재를 확장하기 위해 자유롭게 평가한다.p22

문학을 얻게 되면 절대 다시 잃지 않는다. p220




04. 형식의 특이성은 걸작의 중요 구성요소다.

걸작에는 주제가 없다. 형식만 있을 뿐이다. 실패한 책의 특징은 전형적인 것을 또 재생산한다. 이상적인 것이 되고 시간과 국가, 심지어 작가조차 초월해 보편적인 것이 되고 만다. 다수는 보편성이라는 폭력적인 말로 자신들의 취향을 강요한다. 영원성의 외관을 지니고 있다. 언제나 존재했던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규칙의 적용을 받고 평범한 상태로 끌어내려 진다.

확신이 없는 작가들, 시기하는 작가들, 분노하는 작가들의 내면에 하얗게 분칠한 광녀가 살고 있다. 사랑스러운 광대가 하는 말을 전부 믿어서는 안 된다. 영국 맥스 비어봄<줄라이카 돕슨>, 러시아 안드레이 비엘라<페테르부르크>, 이탈리아 쿠르치오 말라파르테<파멸>, 일본 미시마 유키오 <오후의 예항>, 콜롬비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 동안의 고독>.....


고전주의 걸작은 없다. '모방'은 아무리 품질이 좋아도 수공예품이다. 걸작은 재생산할 수 있는 모델이다. 작품 하나하나는 모두 작가의 분신이다. 이미 존재하는데 더 잘 만들 수 없으며, 만들어봤자 쓸데없는 물건이 된다. 이따금 잊힌 매우 오래된 작품을 모방했는데 걸작으로 받아들여져 이따금 성공을 거두는 예가 있다. 대중은 환호하나 작품의 미래를 열어주지 못한다. 모방은 걸작의 영광만 유지시켜줄 뿐이다.

개성이 없는 걸작은 없다. 창작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것은 작가의 관찰, 감정, 사실, 또는 꿈에서 출발한 형태다. 사실주의는 일종의 게으름이다. 사실주의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별 볼 일 없는 사건과 그에 대해 느끼는 오만한 감정을 그대로 옮길 뿐이다. 어떠한 형식적 시도도 하지 않는다. 사실주의와 회반죽 걸작이 다시 돌아온다. 세대마다 사실주의가 있었다. 지금까지 무시되었던 작가들이 벌이는 꿈은 복수의 시간이다.

걸작은 증명하지 않는다. 문학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물이다. 이것이 문학과 가장 오래된 신화를 연결하는 고리다. 문학은 변신이다. p73

어느 시대고 어느 곳에서고 모르는 사람이 없는 걸작은 신화가 된다. 그러면 진짜 죽는 것이다. 작가와 개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더는 문학이 아니고 별은 지고 차가워진다. p214




05. 걸작은 누가 결정하는가?

걸작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고 그 걸작의 형식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있다. 문학에서 사람을 분리시키면 문학은 공허해진다. 저항이 문학이다. 죽음에 대한 강한 저항이다. 소설이 계속 미지의 세계를 합병하면 삶에 인간성이 부여된다. 삶은 비밀스럽게 놔두면 폭력이 된다.

걸작의 기준은 걸작 자신이다. 걸작은 건강하지도, 병적이지도 않다. 언어의 구조가 모든 걸작을 결정한다. 부서지기 쉽고 연약한 것이 창작의 기본이다. 허세가 없고 암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수의 책은 책이 아니라 책이고자 하는 의지다. 글은 의지로 써지는 것이 아니다. 글을 쓰는 것과 글을 쓰고 싶은 것은 다르다. 읽는 걸작을 경계한다. 나만의 걸작을 가지는 것은 아름답다.

가장 위대한 책은 어떤 것에 또는 어느 누구에게 필요한 책이 아니다. 작가 자신에게도 필요한 책이 아니다. 글은 나중에 독자를 만나면 문학이 된다. 걸작을 말할 때 진실과 허구는 중요하지 않다. 걸작은 당신의 위협과 죄에는 무관심하다. 문학의 심판은 비평가, 학자, 독자 그리고 작가이다. 걸작은 우리가 하는 어떤 비평에도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맥베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진지함의 중요성>, <우아한 향연>, <불안의 서, 미완성>, <특성 없는 남자, 미완성>, <피에르 또는 모호함> 은 위대한 걸작들 사이에 자리 잡아야 한다.
글을 쓰는 책임이 얼마나 큰지 상상하지 못한다. 영원성과 마주하는 것이다.
걸작은 우리 인생의 흐릿함에 윤곽을 그려준다 p126




06. 걸작과 함께하는 삶은 완전히 다른 삶이다.

우리는 문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상을 가르친다. 문학으로 도덕, 사회, 통계, 사상을 가르친다. 많은 아이들이 철학과 팔씨름에 열중하고 문학과 영원히 결별하게 된다. 우리는 걸작을 진지한 은행처럼 생각하고 현대문학 혐오한다. 문학을 느끼려면 감각의 지식이 포함되어야 한다. 걸작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절대 진정한 걸작이 되려면 자신에게 맞는 독자를 찾아내야 한다. 작가는  창작하려고 죽는다. 죽기도 한다. 글쓰기는 전투다. 걸작을 탄생시키는 것은 결국 용기다. 창작은 칼의 숲을 지나는 것이다. 작가는 간다. 위대한 작가는 호랑이다. 걸작은 왕국이다. 우리는 그 성으로 들어간다. 왕국은 더 많아야 한다.

문학은 가르치지 않는다. 작가들에게조차 인생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혼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감정을 깨우쳐준다. 세상을 완성시켜준다. 우리를 구제해 준다. 인생을 사랑하게 한다. 용기를 준다. 행복을 느낀다. 욕망을 품게 한다. 꿈을 실현한다. 아름다움을 끌어낸다. 바로 사랑이다. 우리를 걸작이 되게 한다.

우리가 책을 읽는 것은 기쁨을 얻고 열정을 느끼기 위해서다. 걸작은 걸작을 읽는 사람을 젊게 하고, 잠시이지만 불멸성을 경험하게 한다. 걸작은 시간을 뛰어넘는다. p68

당신은 이미 많은 사람보다도 더 훌륭하다. 문학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은 문학이 소통이 아니라 영성체임을 알기 때문이다. p188

우리에게는 신이 없지만 책이 있다. 걸작은 우리가 한순간 왕이 되는 왕국이다. p209





<마무리>

훌륭한 비평가는 존경받아 좋은 일이지만 자신은 사랑받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듯했다. 하하...;; 걸작에 관하여를 나도 생각하게 했다. 샤를 단치가 논하는 것을 이해해보려고 했다. 방대한 독서에서 오는 집약된 사유가 쏟아져 나와 나 같은 독자는 주워 담기 바쁘다......

샤를 단치가 읽었던 책들만 나열해도 머리가 무척 어지러웠다. 어떻게 읽어나가야 할지 막연한데 더 가중됐다. <왜 책을 읽는가>를 읽고서 샤를 단치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신랄한 목소리 거부감도 있었지만 작가의 말에 더 관심이 갔다. 내가 모르는 이야기 들려줘서 좋았다. 그도  걸작이란 물음에 자신의 생각을 파헤치고 있다고 느껴졌다.

무슨 판도라의 상자라도 연 기분이다. 내가 다 거론할 수 없었지만.... 문학의 세계라고 짐작한 어렴풋한 기준을 명료하게 해주는 것도 같았다. 숨어있는 걸작을 발견하는 기쁨을 더 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아마 펼치자마자 놀라서 도망칠 수도 있다. 열어보지 않는 편이 나은 책도 있을 것이다. (다 보지도 못하는 것이 더 분명한 사실이지만....)

독서법에 관한  책들(실용서)을 읽다 보면 공통된 방법을 반복해서 말하여 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여러 권이 아니라 한 권이 된다. 하지만 독서 맵은 방대해서 누군가를 따라가게 된다. 그 방향이 나와 맞는지 생각해 보기도 했다. 여전히 어려운 숙제다. 하지만 조금은 느슨하게 풀고 여유를 좀 부려볼까 하는 마음도 들게 해줘서 고맙다.

우리는 걸작에서 수공업보다는 창작력을, 반복적인 행위보다는 독창성을, 비인격성보다는 감수성을 더 많이 발견한다. 무책임보다는 섬세함을, 신보다는 양식 있는 재능을, 마법보다는 포기를 더 많이 발견한다. 걸작은 그 무엇보다도 연약한 존재다.

-걸작에 대한 정의 시도! 샤를 단치 - p223



<함께 보면 좋을 책>

왜 책을 읽는가 리뷰보기 >> http://roh222.blog.me/220565266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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