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로서... 작가로서... 왜 책을 읽는가?
<왜 책을 읽는가> 샤를 단치, 이루 출판사
프랑스 작가 샤를 단치는 스스로 삐딱한 사유는 자신의 고질적인 문제점이라고 말한다. 논쟁을 예술만큼이나 사랑하고 토론하며 싸우기도 하지만 이치를 따지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자신의 반대자와 형제가 된다한다. 샤를 단치의 목소리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고 신랄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말처럼 내가 지금 이기적인 독서로 이 책을 덮을 예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궁금했다. 그의 눈에 무엇이 보였는지... 그동안 동양인문만 이어서 보았고 서양은 무슨 차이가 있나 궁금하기도 했다. (사실 별다른 차이라고 할만한건 없었다, 진리는 다 똑같은가 보다..)
샤를 단치는 작가, 작가의 글, 독자, 독서의 좋은 예와 나쁜 예를 수면위로 올린다. 사정없이 (독없는) 화살을 들고 보이지 않는 표적(익명의 사람들, 아니 작가는 이름을 드러내놓고 겨냥했다)을 향해 겨냥한다. 어느 작가와 어느 독자가 빨간 사과를 머리에 이고 불안함 마음(무시할 수 있을까?)으로 그를 지켜봐야 할지도 모른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 게다가 글도 많이 쓰는 사람(작가)은 작가에게도 독자에게도 어떤 세세한 차이... 잘못되거나 잘하고 있는 것들을 너무 잘 파악하고 있다.
독자는 책을 단숨에 먹어 치워 없애버리는 소비자가 아니다.
# 단순히 지식을 채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유추類推 능력'이다. 지성을 넘어 감성에 반응하는 유추를 통해 사물을 이해한것이 바로 문학이다.
독서를 하면서 점점 나아지고 있는 부분이 바로 사물에 대한 이해인것 같다. 끝이 없고 분명하지도 않고 항상 모호하다로 끝나버리지만 작은 발견에 기쁨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계속해서 독서를 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사물이란 말이 참 낯설고 그런 낯섬을 즐기는 작가와 독자를 자주 마추친다. 아직 글, 그림, 음악, 예술이라 부르는 모든 것에 대한 이해는 내가 조금 알았다고 해서 보여지는 것도 아니란 생각이 든다.
# 독자는 작가의 머릿속을 몰래 헤집고 다니면서 원하는 것을 얻는 편을 더 즐긴다. 독서가 지나치게 도덕이 되지 않으려면 독자는 어느 정도 저자의 생각을 훔칠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독서를 시작했는지는 알고 있다. 그게 꼭 나쁜 짓을 한 것처럼 마음이 무거워졌었다. 편히 쉬는 작가를 무덤에서 불러오는 짓인가-라고도 생각했다. (로맹 가리가 그랬고 파스칼 키냐르는 아직 생존 작가다) 처음이었다고 치부하고 그러지 말아야지라고도 생각했다. 그저 작품으로만 읽어야겠다고 마음먹기도 했다. 하지만 샤를 단치 고맙게도 내가 듣기 좋아할 만한 말을 해줘서 조금은 독침을 날리는 목소리가 좋게 들리기까지 한다.
# 책은 독자를 양분으로 삼아 생존한다.
사무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http://roh222.blog.me/220392590466리뷰보기> 리뷰를 써놓고도 고도에 대해 무척 오래도록 생각했다. 그에게는 고도가 '독자'였다고 나는 지금 그렇게 믿고 있다. (각자의 고도는 다르다) 그래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항상 <나를 살게하는 고도>라고 부른다. 작가는 이 책을 펼쳐든 독자에 의해 살아남는 것이다. 얼마나 긴 고독 속에서 침묵하며 기다릴까! 먼지만 쌓인 책은 죽은 책(작가)이다...
# 모든 독서는 독자가 책을 다시 써내려가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독서의 신> 마쓰오카 세이고 작가는 독서는 '자기 편집'인 동시에 '상호 편집'이란 말을 해줬다. 대부분 그런 독서를 하고 있구나 생각했다. <왜 책을 읽는가>의 차례를 보면 아주 짧게 짧게 단락이 구성되어있다. 솔직히 나에겐 읽다가 끊기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떠올리고 싶은데로 다시 기록을 하는 편이란 걸 알았다. 다른 독자의 리뷰를 통해서도 다시 한번 내가 놓친 생각을 찾기도 한다. 이런 반복이 책에서 더 많은 것들을 유추하게 되는 것도 같다..
책에 푹 빠진 이 어린 중생들에게 우리는 무릎을 꿇어야 하리라. 오직 이들만이 세상에 감사할 이유를 준다.
# 우리가 고대시대의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수도사들 덕분이다. 정신에 대한 수도사들의 순수한 사랑!
미완성인 책들에 대한 이야기가 긴여운을 남긴다. 고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미완성된 책을 보면서 굉장히 매혹적이다고 말한다. 샤를 단치 자신도 공백이 있는 소설<조급한 인생, 2001>을 썼는데 독자가 그 공백을 메워버렸다고 한다.(실패한 글은 독자가 고쳐 쓰기도 한다) 왠지 샤를 단치 미소를 짓고 있을 것만 같았다... 예전에 <장난스런 KISS> 카오루 타다 작가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그 작품은 미완성인채로 끝났다. 하지만 그 인기는 계속되어서 아시아의 여러나라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나도 얼마나 미완성인 채로 끝난 그 부분을 연결해서 생각했던지!
# 후대의 독자들이 내 작품을 새로 해석할 수 있는 요소들을 작품 곳곳에 남겨 놓으려고 노력한다.
이 얼마나 치밀한 노력인지.. 작가의 속마음을 알아버리면 정말 깜짝 놀라고야 만다. 살아남는 것 그 이상까지 고려하고 있다. 가끔 글쓰는 것 자체가 부질없다고 느껴버리고 마는데... (이런 말 침울하기만 하다.) 책을 정말로 많이 읽어주고싶다. 내 능력이 된다면! 하지만 그런 능력이 없다. 읽어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독자가 이 얼마나 이기적인 독서를 하는지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선택받은 책이 아니고서야 펼쳐지지 않는다...
# 한 집단에서의 어휘는 그 세계에서의 소설이다.
사라진 언어를 불러낸다는 것은 그 언어 뿐 아니라 그 언어를 사용했던 문명도 부활시키는 것이라 했다-파스칼 키냐르. 김영하 작가도 되도록 도시인들의 삶에 밀접한 관련을 맺은 것들을 그대로 끌어다 쓰려고 한다고 했다. 쎄븐 일레븐을 쎄븐 일레븐이라 하고 로손을 로손이라 쓴단다. 쎄븐 일레븐이라고 할 때와 로손이라고 할 때가 다르다 한다. 그런 미세한 차이를 정직하게 그리려고 한단다. 그의 책속엔 그려지고 있는 것이 후대에도 보이겠지 싶다.
젊음과 늙음(이 둘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은 지식의 서로 다른 두 상태다. 우리는 더 이상 무지한 젊은이가 아니며, 권력에 짓밟히지 않고 계속해서 살아 나가기 위해 유연하게 타협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결코 타협하지 않고 단호하게 결단해야만 할 순간도 있다. 수많은 사건들로 이루어진 인생은 시가 아닌 산문인 것이다. 작가의 허영심을 즐기다 중에서... p83
# 한 작가에 대한 견해는 책을 읽는 시대뿐 아니라 그를 알게 된 독자의 나이에 따라서, 그리고 작가와 독자의 나이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독자들의 생각이 제한적이라고 해서 책이 그들 생각으로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윌슨-)
지금 아니면 나중에 이 책을 읽을 일은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에서야 나에게 의미있는 책이다 싶다. 10년 후 20년 후엔 나에게 그 어떤 의미도 던져주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깐 지금 충분히 먹고 마시고 음미해야 되지 않을까? 실컷 배부르게 먹고 나면 아쉬움 따윈 없을테다....그저 추억의 한 페이지로만 남을 테다.....
#위대한 작가들의 책을 읽으면 내가 미개한 자나 무지한 자, 가장 불완전한 자의 모습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임을 느낀다.
책은 작가의 거울이다. 내 거울은 아니다란 생각이 들었다. 책을 보고 공감한다는 것이 풍경 속에 그저 한 장면이지 그 전체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존재의 불완전함을 더 느꼈을 뿐이다. 그 조차도 될 수 없는 비참함까지는 아니다. 비난은 있을 수 없다!
내 인생의 진지한 모든 장소에서 나는 그 무엇보다 훨씬 더 진지한 일, 즉 독서를 했다.
# 책을 읽는 것은 관심을 기울이며 살아가는 방법이다.
책을 읽는 다는 것이 오히려 삶의 한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함 임을 어느 순간 느꼈다. 생각을 끊임없이 일으키고 사물을 이해하며 더 살아움직이듯 살게하는 원동력이 책 속에 있다. 이 부분은 나도 어느정도 확신하고 있다. 내 말 어디에도 확신이란 게 들어차 있지 않는 편이다. 그저 느끼고 그저 생각했을 뿐 어떤 분명한 명제를 띄울 수가 없다. 작가들이 하는 말의 용기가 얼마나 큰지 느꼈다. 넘쳐서도 안되고 딱 들어맞을 수 있는 건 어려운 일이다.
# 독자의 발목을 잡는 가장 위험함은 겸손함이라는 함정이다.
책은 어려워서 소화하기 힘들거야란 말은 적절하지 않다한다. 세상에는 독자의 수준을 따라오지 못하는 책들도 아주 많음을 알라고 한다. 몽테뉴 <수상록>을 나중에 읽어야할 책으로 미뤘다. 지금은 정말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시 생각해봐야할까? 겸손해지지 말리니.. 웃어버리고 말았다...
# 쓰자마자 사라지는 그런 글, 작가가 말하지 않은 것을 찾아내기 위해 책을 읽기도 한다. 독서를 하다가 몽상에 빠지는 순간이 있다.
키냐르 <마지막 왕국>이 그렇다. 아니 그의 전 작품이 나에게 그렇다. 말해주지 않는 걸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읽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하면 내가 읽은 글은 사라지고 백지상태다. 재독해서 그 미스테리를 다시 풀어야할지도 모르겠다.
# 글 쓰는 것이 기술이 아닌 것처럼 읽는 것도 기술이 아니다.
독서광들이 아니라면, 우리는 영원히 메마른 글들만 맛볼지도 모른다고 일러준다. 베스트셀러가 아닌 책, 추천도서목록 100권 안에 들지 않는 책을 원한다. 지금은 그런 책들을 찾아다니고 있다. 그래서 독서광인 이웃분들이 내겐 보물이다.
인도의 책이 없다. 10억 인구와 공식 언어만도 18개 언어에 달하는 인도의 책이 2,300년 동안이나 외면당해온 것이다.
# 좋은 책을 읽는 것처럼 나쁜 책도 읽는다.
책을 읽는 사람을 보는 여러가지 눈이 있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분류되기도 한다. 어떤 책을 읽는 지에 대해서 들여다는 건 본능적이다. 독서가라면 그렇지 않나? 나도 만화만 읽는 동안 문학은 끼여들 틈이 없었다. 문학이란 게 별개로 존재하는지 조차 몰랐다.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그뿐이다. 나는 여전히 잡식성인데 알고보면 일관성 있는 면도 있다. 더이상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만...
# 우리의 인격은 어떤 하나로 요약될 수 없다. 소설 속 인물들도 쉽게 짐작할 수 없었으면 좋겠다. 영혼은 인간을 벗어나 신비스러운 존재로 군림하며, 밝혀지는 것을 완강히 거부한다.
로맹 가리 스스로 자신이 에밀 아자르라고 밝혔다. 완전히 묻어버렸어야 할까? 샤를 단치는 작가는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죽어서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럼 로맹 가리 죽음과 평가를 맞바꾼것일까? 고도를 위해서? 침묵하는 그를 잡아 흔들수도 없는 노릇이다. 밝혀진 미스테리는 영원히 밝힐 수 없는 미스테리란 생각이 든다. 그는 어떤 것에도 의미를 두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때로 책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때로는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기도 한다.
# 집요하게 책을 읽다 보면, 같은 작가의 책들을 연속적으로 읽을 때의 유익함을 알게 된다.
샤를 단치 글쓰기 비법을 은밀하게 말해주는 듯 했다. 글감을 가공시킬 줄 아는 것, 새로운 실마리를 건지는 것, 새로운 글감의 발견 등이 있음을 말한다. 독서에 열중하는 시기, 독서만 하는 경우, 작가가 아닌 독자로 남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라고 아낌없이 이야기해 준다. 사실 이 부분은 독자로서 작가로서 방향이 다르다. 작가는 창조의 세계로 돌아온다고 했으니...
우리는 표면적인 세계뿐 아니라 진짜 주제와 진짜 현실도 읽어야 한다. 인물의 정신도 읽어야 한다는 얘기다. 수사 뒤에 감추어진 소네트와 송가는 물론,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말과 그다지 믿을 수 없는 화자의 진술 등 그 문장을 구성하는 내적인 동기 역시 놓치지 말아야 한다. 안무만이 춤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p219
# 글을 쓰지도, 책을 읽지도 않는 시기, 사랑하지도 않고, 존경을 받지도 못하는 시기
자발적인 독자가 작가의 진정한 상속인이다. 이 말 참으로 멋지다. 샤를 단치 이런 멋진 말도 간간히 한다. 날카롭게 말하다가도 어느순간 그도 책을 사랑하는 그저 1인에 불과한 모습으로 건너다본다. 법대에 들어가서 자신이 가장 잘 한짓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은 것이라고 할까!
# 저널리즘이 죽음이 아닌 죽은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문학은 창작이라면 저널리즘은 해석이라고 한다. 저널리즘 신문 지면에 집착하고, 폭력을 순화시키기 위한 이미지들의 반복이라 할 수 있으며, 연민과 동정심을 자극할뿐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반면 문학은 유쾌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문학의 본질은 그 자체에 내재해 있어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달된다.p242-244
# 책을 읽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지만, 읽지 않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
독서라는 정신 활동을 하는 가운데 쉼을 얻거나, 신체활동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체득하기를 갈망하는 순간에 모든 것을 내놓을 필요도 있다한다. 또 책도 사람처럼 때로는 사회의 해묵은 관습을 타파하는 역할을 하며 돈벌이를 위해 몸을 파는 책, 작가의 심술이 절정에 이른 책, 영원히 명예를 박탈당한 작가의 책, 그리고 어떤 작가에 대해 완전히 이해했다고 믿는 어리석은 '나'가 되려고 할때! 읽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한다. 책읽기의 운명은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독서능력이 주관한다.
# 책을 읽으며 나아갈 때 나는 죽음과 경주를 한다. 독서는 독자와 함께 죽는다.
독서는 아주 짧은 한순간이지만 죽음을 이긴다. 그리고 책은 그보다 좀 더 오래 죽음을 이긴다. 샤를 단치 모든 것 소멸하고 더이상 책을 읽지 않는 인류가 다시 자연으로 되돌아가.. 몇몇의 독재자와 짐승과 총천연색 이미지들이 난무하는 세상을 떠올린다.... (나는 미리 그리고 싶지는 않다. 궁금하지도 않다....)
# 샤를 단치가 읽은 책 나도 읽어 보고 싶다. (그는 뒤라스를 낱낱이 파헤치며 읽은 듯하다)
데이비드 그로스만 <지젤라의 살과 뼈를 입고>
로베르트 무질 <특징 없는 남자>
마가리트 뒤라스 <검은 머리 푸른 눈> <숲에서 보낸 나날> <노르망디 언덕의 창녀> <여름날 밤 열 시반> <롤 베 스타인의 황홀> <죽음의 병> <물질적인 삶> <고통> <80년의 여름> <글쓰기> <연인>
토마스 하디 <푸른 두 눈>
엘런 베넷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
토마스 베른하르트 <소멸>
사무엘 베케트 <세계와 바지>
수잔 손탁 <재탄생>
슈테판 츠바이크 <불타는 비밀>
시릴 코널리 <소란한 무덤>
장 폴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샤를 단치는 내가 위태롭게 붙잡고 있는 독서에 대한 불안을 하나씩 짚어내어서 풀어줬다는 생각이든다. 생각보다 나와 대화를 많이 해준 것 같아서 샤를 단치에 대한 선입견을 깨고 마무리되어서 기쁘다. 다르게 읽는 사람들에 대해 조금 더 알았다싶다.
독서를 점검한 마지막 달이 채워지고 있다. 내년에 읽을 책 목록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안다. 나의 개성을 믿어보라는 세이고 작가의 말이 좋았다. 내가 읽고 싶은 데로 읽어나가고 싶고 정말 좋아하는 책과 나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책을 읽어 나갔으면 좋겠다.
신영복 <담론http://roh222.blog.me/220440934434>, 오에 겐자부로 <읽는 인간http://roh222.blog.me/220488762889>, 마쓰오카 세이고 <독서의 신http://roh222.blog.me/220548417827>, 김운하 <카프카의 서재http://roh222.blog.me/220553122420> 그리고 이번 샤를 단치 <왜 책을 읽는가>를 이어서 읽으면서 마음이 놓였다.
왜 책을 읽는지 어떻게 읽어야하는지 독서의 방향은 어디인지에 대해 앞으로도 계속 생각하려고 한다. 솔직히 인문으로 가는 길이 생길 줄 몰랐다. 마음이 조금 무겁기도 하지만 그렇게 나에게도 인문으로 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한다. 인문은 사람에게서 배우는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