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메르시어
지금 떠난다면 책과도 작별을 고해야 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작가 파스칼 메르시어의 글은 건조하고 창의적이다. 형태와 색채와 멜로디가 느껴졌다. 그는 우리가 원하는 경험 중에 극히 틀에 박힌 일부분만을 평생 경험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원하는 나머지 경험은 어떻게 되는지 묻는다.. 내면의 진실한 욕구를 숨기는데 능하다 30년 혹은 40년이 지난 뒤 뭔가 자신을 위한 다른 생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 순간을 이 소설의 주인공 57세 대학교수인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를 통해서 말하려 한다.
그레고리우스의 이름 짧게 줄여서 불러야 할 만큼 엄청나게 고루하고 고전적이다. 실수가 없는 사람 그는 '문두스'라 불렸다. 그의 본질은 여러 개의 세계. 그런 의미기도 했다. 30년 이상 교육자로서 실수한 적도 비난받은 적도 없었고, 학교 제도의 기둥이며 존경을 한 몸에 받았고 고전어의 해박한 지식은 대학에서조차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포르투게스 Poutugues
'오'는 '우'처럼 들렸고,
올리면서 기묘하게 누른 '에'는 밝은 소리를 냈다.
'스'는 실제보다 더 길게 울려 멜로디처럼 들렸다.
그가 갑자기 수수께끼 같은 여자와 만나 상황이 기묘하게 흐른다. 그 여인은 사라졌고 모국어가 포르투갈어... 그것 말고는 아는 게 없었다. 붉은 외투, 분노, 남긴 숫자, 목소리만이 다시 떠올려졌다. 흔적을 지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 순간 모든 것이 결정되었음을 깨닫는다.(아름다운 무음! 영혼의 숨결...) 그레고리우스는 학교에서 빠져나와 에스파냐 헌 책방으로 간다. 그곳에서 포르투갈어로 된 프라두의 <언어의 연금술사>란 책을 우연히 집어 든다.
그레고리우스는 그리스어, 라틴어, 헤브라이어를 가르친다. 그가 태어난 스위스의 언어는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로망 슈어를 쓴다. 그가 고전 라틴어를 탐미하면서도 아내 플로렌스의 영역인 에스파냐어에 거부감이 있었다. 자신과 비슷하면서도 아주 다르다는 사실이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어떤 강요가 견디기 힘들었고 결국 이혼했다. 그는 외부 세계를 향해 빗장을 지른 채 생각에 잠겨 홀로 있었다.
그가 라틴어 문장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 문장들이 과거의 모든 침묵을 자기 안에 품고 있기 때문이었고 뭔가 대답하라고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언어는 온갖 소란스러움에서 떨어져 있었고, 확고부동하며 아름다웠다. 문자 그대로 사랑한 사람들이 알 수 있는 언어의 본질은 성스러운 것 그 자체이며 간절한 것이었다. 포르투갈 귀족의 책 프라두의 <언어의 연금술사>를 번역하며 읽기 시작한다. 그 언어를 익혀 입 밖으로 내기 시작한다...
훨씬 더 차가운 바람이 불기를 바란다. 낡은 단어들과 진부한 언어습관을 내 머릿속에서 날아가게 하고, 나를 씻겨 깨끗한 정신으로 돌아오게 해줄 바람.
내가 포르투갈어로 말하는 유일한 사람이 되어, 소리 없는 열차를 끌고 가는 우주... 신의 말과 비슷하고 과장이나 격정이 없이 정확하고 간결하여 단 하나의 단어나 쉼표도 뺄 수 없다는 점에서 언어의 연금술사가 엮은 시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 프라두 -
<라틴어>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될 때 그의 머리 위에 붙은 표지판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두루 알 수 있도록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는 문구가 그리스어, 아랍어, 라틴어로 표기되었다.
라틴어-BC 1세기 이후 고대 지중해 세계의 공용어-에는 고전 라틴어와 속(俗) 라틴어가 있다.
포르투갈어는 이베리아반도에 침입해 온 로마의 병사들이 들여온 속라틴어에서 오랜 지배하에 생겨난 말이다.
로망스 제어는 라틴어가 로마제국이 붕괴한 후 옛 제국 영역 내의 각지에서 지방적으로 분화하여 변천을 거듭하다가, 중세기에 이르러 다시 탄생과 성장의 길을 밟아 이루어진 근대어(近代語)의 총칭이다.
그레고리우스 모든 것이 옛날 모습 그대로 유지되기를 고집했다. 지금까지의 인생의 모든 것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그리워할 것인지 절절하게 느끼면서도 이 혼란스러움을 인정하는 것, 수수께끼 같은 경험들, 그 숨어있는 경험들 속으로 한 발짝 내딛는다. 그는 줄곧 기차를 타고 떠나는 동안 지난날 졸업시험을 위해 가건물로 걸어갈 때처럼 불안과 해방감을 동시에 느꼈다.지나온 시간이 괴롭지 않지만 이 탈출의 의미가 명확하게 윤곽이 드러나길 바랐다.
우리 스스로의 삶의 진정한 윤곽이 무엇인지 눈을 뜨게 하는 향유...... 실망
- 프라두 -
자신의 이 모순적인 갈망에서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 <언어의 연금술사>를 읽는다. 그는 기차가 멈추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공항으로 전화를 시시때때로 걸었고, 집의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옛날 안경과 새 안경의 도수와 테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새로 사 입은 재킷을 버렸다 회수하기도 한다. 또 심하게 그리스어나 헤브라이어를 읽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도 일었다. 잃어버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고픈 욕구에 시달렸다.
그는 베른에 없었지만 베른에 있었고, 리스본에 있으면서도 리스본에 있지 않았다. 포르투갈어를 쓰던 여인은 점점 잊히고 그저 프라두에 대해 점점 빠져든다. 40년 동안 닫혀 있던 기억의 수문이 그 어떤 전도도 없이 갑자기 열렸다. 무아지경에 빠졌던 기억, 자신의 소중한 그 무엇을 움켜잡으려 했던 날들을 떠올린다.......
중등학교 땅을 1,922일 동안 밟았다. 어두운 건물로 향한 횟수 11,532번이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나는 몇 번이고 이 장소로 다시 돌아온다. 형태가 잡히지 않은 채 우리 앞에 놓여 있던 그 열린 시간에 우린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무엇을 해야 했을까? 자유로이 깃털처럼 가벼웠고 불확실하여 납처럼 무거웠던 그 시간에.....
과거는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갔으나 미래는 아직 시작되기 전이었던,
아직 미래를 경험하지 않은, 생의 갈림길에서 있는 사람은
지금이 아닌,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꿈과 같은 격정적인 갈망이 없다.
미래를 겪은 사람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돌이키기 위해 옛날로 돌아가길 원한다.
돌아가 내 소망이 이루어진 만족감은 (돌이킬 수 없는) 나에게만 유효하다.
존재하지 않는 대상의 갈망에 따라 움직이는 것. 이것보다 더 정신 나간 일이 또 있을까.
- 프라두 -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그레고리우스
새어버리는 시간과 죽음에 대한 생각?
원하는 게 무엇인지 갑자기 모른다는 것?
자기 소망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
자기 의지가 지녔던 지극히 당연한 익숙함을 잃은 것?
그래서 이런 식으로 스스로에게 낫설어지고 문제가 되었다는 사실?
갑자기 나타난 이 빗장은 무엇인가? p122
그가 되돌아가려는 충동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프라두를 찾아야만 했다. 눈이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심이 그를 뒤따랐다. 리스본으로 향하면서 만난 실우베이라, 안과의사 애사, 헌 책방 주인 시몽이스, 헌 책방 전임자 코우팅뉴 노인까지 만나게 된다. 프라두의 여동생 아드리아나는 프라두 사후에 직접 책 출판을 했다. 이 사실까지 그가 하나씩 찾아내었다.
그레고리우스가 가르치던 학생들이 그에게서 뭔가 빼앗기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었다. 그도 지금까지의 삶을 누군가에게 빼앗기는 듯한 기분이 든다 하였다. 그들이 빼앗긴 것 무엇이었을까? (시간?) 그는 자신을 누군가에게 넘겨주는 듯한 느낌을 계속 받는다..... 은밀한 것은 발설한 순간 더 이상 은밀한 것이 아니게 된다....
프라두는 유망한 판사의 아들이며 인기 좋은 의사였으나 60년대 중반 쉰 살에 리스본의 인간 백정인 비밀경찰 후이 루이스 멩지스 목숨을 구하면서 '구한 죄'를 씻으려 한다. 1973년 6월-혁명 한 해전- 그는 뇌출혈로 사망하고 말지만 그가 쓴 글엔 억눌린 분노와 저항운동은 잘 어울렸다고 그레고리우스 생각한다. 그레고리우스에게 눈을 멀게 하는 도시 이스파한은 그의 삶에 아직 남아 있었다......
난 신의 말씀을 경외한다. 시적인 그 힘을 사랑하므로. 난 신의 말씀을 혐오한다. 그 잔인함을 증오하므로. 이 사랑은 아주 힘든 사랑이다. (중략) 우리의 영혼을 훔쳐가는 고문은 호흡하는 데 필요한 공기와도 같은 외로움, 우리가 스스로와 마주 설 수 있는 그 외로움을 파괴한다. 우리의 구주, 우리의 신은 자신의 방종한 호기심과 반감을 일으키는 그 궁금증으로 불멸이어야 할 우리의 영혼을 훔치고 있다는 생각은 왜 하지 않는가? (중략) 나는 대성당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 성스러운 미사가, 말씀의 신성함과 위대한 시의 숭고함 필요하니까.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자유와 모든 잔혹함에 대항할 적대감도 필요하다. 아무도 나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지 말기를 (p264-270) - 17살 프라두 -
이런 괴로움, 한없이 숨차게 계속되던 단어를 향한 갈망
그레고리우스는 1755년 <대지진>-리스본의 폐허-, 14세기 <흑사병>, 신부 아마로의 죄,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을 헌 책방에서 구입한다. 그는 진정한 의미로 이 도시에 도착하려는 참이었다. 어떤 도시를 그곳에 있는 책을 통해 알아가는 것이다. 페소아의 생각을 쓴 도시에 그가 서있고..... 그도 작가가 묘사한 들판 원래의 초록빛 보다 더 푸르다!를 이해할 선택받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을까? 프라두는 책을 삼키듯 그 의미 모조리 몸 안으로 사라졌다.
쓴 글이 너무나 인상적이고 현명하고 아름다운 문장들,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함께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이었는지 알고 싶다고 해서 독자가 찾아가는 경우가 있을까? 추종하는 작가가 생기기 마련이란 걸 알지만 그 끝이 어떨지... 솔직히 판도라의 상자 같기도 하다. 어떤 대답도 들을 수 없는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지만 그렇게라도 무덤에서라도 깨우고 싶은 작가라면 그는 불멸할 것이란 생각도 든다.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일까?라고 그레고리우스 생각한다. 자기 시간이 새어나가고 있다는 자각과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호기심은 서로 어떻게 조화를 이룰까? 그 답을 나는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전혀 다른 의문이지만 자신의 안과 주치의 그리스인 독시아데스와 리스본에서 만난 사람들.. 코우팅뉴 노인이 준 <그리스-포르투갈 신약성서>는 그에게 어떤 의미인가? 도 생각했다. 이 책 곳곳이 남겨진 퍼즐이 한 그득이다...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다
-프라두의 어버지-
그레고리우스는 병환과 빚으로 바다를 보지 못하는 어머니를 위해 돈을 훔쳤었다. 프라두의 아버지는 독재자가 통치할때 판사 자리에 계속 있었던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해 자살했다. 프라두는 아버지를 의학으로는 더 이상 굽은 등을 펴지 못한 채 살아가야 했던 것과 함께 지켜본다. 그레고리우스와 프라두가 불면의 밤을 보낸 그들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경멸할 수 있을까? 하는 부분에서는 동일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연약함을 찾아내었다......자신의 무력함에 분노의 눈물을 흘린다.
살라자르의 독재 치하에 고문당한 대기업의 회계사였던 에사의 삼촌 주앙과 의사였던 프라두는 변장이 완벽했다. 저항운동을 하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레고리우스는 무슨 생각을 했을 까? 외부 세계에서 만들어진 나의 모습은 진실한 나의 모습을 얼마나 비추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을까? 프라두가 외부 세계에서 만들어진 꾸며진 자신을 보는 것을 상상한다. 이제 막 만난 이방인처럼.....
리스본의 독재자의 지칠 줄 모르는 각성과 원칙과 금욕적인 의식에 사로잡혀 메마른 삶의 억압된 욕구와 충동은 강력한 명령으로 나타난 것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어떤 분노가 내부 세계에서 떠돈다. 천편일률적인 삶에서 기억이라는 조각이 보이는 비현실적인 느낌에 사로잡힌다. 프라두가 '구한 죄'는 죄가 아님에도 그는 씻으려 한다. 이야기는 뭔가 맞지 않지만... 실제로 분명히 훨씬 복잡하고 혼란스러웠을 것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한 사람 대 여러 사람의 목숨, 이런 식으로 계산할 수는 없지 않나.... 한 사람의 개별적인 목숨을 여러 사람의 개별적인 목숨을 위해 희생하지 않은 것..... p309
- 프라두 -
내부의 마비를 막기 위한 싸움, 글을 쓰지 않으면 사람은 결코 깨어 있다고 할 수 없고 자기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프라두는 무엇에 관해서든 한번 생각하면 언제나 끝을 보았다. 결과가 아무리 암울하더라도... 그의 생각은 어딘지 모르게 잔인한 그 무엇인가를 내포하고 있었고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그의 부재를 보았고 그가 없다는 사실이 마치 사진에서 예리한 가위로 오려내어 뚜렷하게 비어버린 윤곽, 그래서 다른 것들보다 더 중요하고 더 눈길을 끄는 빈 공간처럼 다가왔다. 뇌에서 터진 동맥류의 피가, 빛나던 그의 자의식을 영원히 꺼버렸지만 그가 본다는 느낌은 다시 되돌아 왔다. 열정적인 생명의 빛은 사라졌지만 침묵에 잠긴 그에게서 더 많은 요구를 듣게 된다......
영혼의 고고학자가 되어 어떤 보물을 찾아낼까? 그런 궁금증으로 이 책을 읽었다. 작가의 인식의 예리함을 통해 읽을 때조차 알지 못 했던 감각을 일깨웠다. 그레고리우스의 인생에서 포르투갈어와 페르시아어 사이에 아무런 구별이 없다는 것, 이 두가지가 어떤 의미에서는 같은 언어임을...... 그레고리우스는 38년이나 늦었긴 하지만 지금 이스파한으로 출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삶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 우리가 해야할 일들이 너무 많고 힘들어서 우리 감정을 다치지 않고 견디어내기 힘들다.
신의는 감정이 아니라 의지요 결정, 영혼의 견해 표명
우리의 감정을 필연으로 바꾸는 그 무엇, 영혼의 숨결........
그저 낮은 숨결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영혼의 한 부분....... p347
-프라두 -
인생에서 가장 길었던 날들이 이제 저물고 있다.
그레고리우스를 이해하려고 애섰다. 그는 프라두를 이해하려 애썼지만..... 둘은 정말 복잡하기만 했다. 나의 삶과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사는 것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려고 했을 뿐이다. 그가 떠난 우연과 그가 프라두를 찾은 우연과 내가 이 책을 읽는 우연을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할까? 천기누설이라도 되는가? 2권을 읽어낼 수 있을지 의심되고 내가 꼭 그레고리우스가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다시 되돌아가서 이 책 읽지 않았던 때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의 정교한 언어의 내부 세계에서 점점 빠져나와 외부 세계에 도달하게 된다. 그 둘의 교차점에 내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프라두의 조각난 자화상을 하나씩 찾아내어 그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려고 한다...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프라두의 흔적을 찾지만 뭔가 해결하지 못한 기분을 느낀다. 자기가 똑바로 알지 못했지만, 원하던 것이 뭔지 알게 됐다......한 순간에 깨닫게 되는 것! (나와 똑같이 보는 태도.... 나를 나 자신에게서 구원할 동등함.....일까? 프라두가 마리아 주앙을 보듯이?)
과거를 위한 기념비가 곧 책이었다. 에사와 아드리아나의 검은 눈, 검은 우단 재킷, 목에 감은 검은 우단 끈......침묵의 색이다. 처음에 만난 포르투갈 여인처럼 알 수 없는 의문만 그득한 접점이 이어졌고. 이후 에사의 삼촌 주앙의 만남과 멜로디 같은 리타, 아흔의 바르톨로메우 신부, 사무엘 베케트같은 조르주와의 만남이 이어진다. 비밀의 열쇠를 쥔 마리아 주앙, 시같은 이름 에스테파니아 에스피노자...... 이 두 사람은 프라두에 대해 또 무슨 말을 할지...... 2권을 어떤 이야기로 채울지 솔직히 상상이 되질 않는다...
각본대로 정해진 삶을 살면 흡족해도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을 듯하다.. 또 이 상태로 머물다 소멸된다면...... 모든 게 그저 생각으로만 그친다는 것이 아직은 제대로 답을 찾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그들의 말처럼 인생의 변주곡을 연주하는 일이 없이 끝나리라는 것을 알아버린 체념인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생각을 끝도 없이 이어지게 하는 사유의 발견과 은유의 세계를 느끼게 했다.....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프라두의 의식으로 가득채워져서 세세한 감정 하나하나가 살아나는 것 같았다. 기록이 되어버렸고 또 더 생각해야되지만 생각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되찾기 어렵기도 했다. 2권에서 다시 잘 정리해두고 싶다. 1월에 읽은 책은 영혼에 관한 테마였던 것 같다. 영혼에도 많은 이름이 있는 것 같다. 그레고리우스 이스파한으로 가게 될지 기대해 본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2권 커밍순.... > ^^;
불경한 사제가 내리는 사형집행인의 판결....
우리를 스치고 흘러가는 생각과 상像과 느낌의 강물은 너무나 강력하다. 이 강물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하는 말이 우연히, 정말 우연하게도 우리 자신의 말과 일치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말을 쓸어내고 지워버린다.p215
- 프라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