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로테 잘로몬 자화상
신화적인 장서가의 도움을 받아 독자는 자신의 유년기의 환상을 쫓고 마음을 잡아끄는 기이한 인물을 찾는다. 추방된 장서 중 한 예술가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의 개성, 그의 시대를 들여다본다. 계획 없는 즉각적인 깨달음, 예기치 못한 인도, 사랑했던 바로 그 모든 것들, 그 음악, 그 환상, 그 절망, 그 광기에 점령된다. 추종자가 되어 그들이 못다 한 작업을 계속한다.
삶인가? 아니면 연극이가?는 <샬로테>의 주인공 샬로테 잘로몬의 대표작으로 일련의 구아슈-회화 기법- 작품들이다. 시와 음악과 비주얼 아트를 아우르는 총체적 예술작품을 꿈꾸던 바그너적인 야망이며 그녀 자신의 삶, 사랑, 좌절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의 이야기가 눈부신 색채 속에 담겨 있다.
소설<샬로테>는 음악과 시의 이상적인 융합을 도모한 작품이다. 작가 포앙키노스는 1974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이 작품은 10년에 걸쳐 작가의 치밀한 조사와 준비를 거쳐 한 줄짜리 자유시의 형태로 쌓아올린 소설이다. 그의 공로가 인정받은 것일까. 그는 2014년 프랑스 저명한 두 개의 문학상을 수상한다. 문학 전공, 재즈, 기타 강사, 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로 예술 영역을 넘나들며 자신이 좋아할 만한 글을 썼고 자신의 아름다운 오마주 드디어 <샬로테>에 담았다.
다비드 포앙키노스 소설<샬로테>,2014
빠져나오기 힘든 치명적인 멜랑콜리
행복은 가까이 갈 수 없는 과거의 섬 하나
프란치스카는 죄책감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
동생이 사라진 그날처럼 동생을 애도한다.
결코 사라지지 않는 고통, 꼭 같이 나누는 슬픔.
No1.삶의 매 순간 그녀는 잔치를 벌이는 게 좋다.
No2.세상을 보고 싶어 한다.
No3.사랑하는 것은 자유고 해방이다.
No4.피아노 앞에 앉아 악보와 속삭인다.
No5.자신의 딸 이름을 자신의 동생 이름으로 새긴다.
No6.바흐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어린 샬로테는 묘비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읽는다.
죽음도 삶의 일부라는 걸 일찍이 깨닫는다.
엄마는 이제 어떤 응답도 없이 침묵하고 있다.
고독을 배워야 할 때,
샬로테는 어느 누구와도 자기감정을 나누지 않는다.
이미 감정 표현이 어렵다.
현실과의 첫 번째 타협, 연극의 시작.
텅 빈 것보다 넘쳐흐르는 것이 좋다.
행복한 여자아이 흉내를 낸다.
아무런 선율도 없이 흘러간다.
진실이 존재하는 곳은 커튼 뒤밖에 없다.
강렬한 삶이 세월의 걸음을 재촉한다.
장식 뒤에 감춰진 것은 못 보는 눈먼 이 방문객들
삶을 정당화하려고 끝까지 멈추지 않는다.
외과의사 아버지 알베어트와 프리마돈나 새엄마 파울라는 만찬에서 다시 만났다.
피아노 앞으로 가는 파울라를 보곤 샬로테 심장이 거칠게 내달린다.
파울라는 바흐의 노래 위에 슈베르트의 가곡 하나를 선택해 얹어놓고 천사처럼 노래한다.
여기 빌란트슈트라세 15번지는 나중에 슈톨퍼슈타인이라 불린다.
1930년대 유대인 성향의 부재 위에 유대교 신자인 아버지와 그의 새 여자는 기독교 성가를 사랑했다.
유명한 아인슈타인, 건축 에리히 멘델존, 슈바이처 등을 초대해 파티를 즐긴다.
슈톨퍼슈타인(Stolperstein)
'걸림돌' 혹은 '발부리에 걸리는 돌'이란 뜻의 독일어, 2차 대전 중 나치에 의해 살던 곳으로부터 쫓겨나거나 직전까지 살던 집 앞 보도에다 금빛 황동판을 갈고 거기 희생 당한 사람의 이름과 출생/사망연도 등을 기록하여 글들의 삶을 기리는 유럽 전역에 걸친 역사 프로젝트다.
빌리 와일더는 이렇게 말했다.
"비관주의자들은 결국 할리우드로 왔고 낙관주의자들은 결국 아우슈비츠로 내몰렸다."
알베어트와 파울라는 직업을 잃었다.
증오는 권력을 잡고 폭력은 일상이 되었다.
쓸려 없어질 예술가들, 지성인들, 의사들이 잘로몬 저택에 모였다.
반고흐1,2 / 샤갈3,4 / 에밀놀데5 (자화상)
뭉크1,2 / 코코슈카3 / 베크만4 (자화상)
현대 미술 작품 샤갈1,2 / 에른스트3 / 오토딕스4
한순간 선명해진 강렬한 밀도가 그녀 안에 퍼진다.
물속의 핏방울은 흐려진다.
샬로테는 하나의 작품, 하나의 그림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싶다.
샬로테는 더 사랑받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 아이가 겪는 고통의 심연은 무엇일까.
그저 질투? 압박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초췌해진 영혼으로 마침내 굴복하고 말 테다.
닥쳐올 비극에 달아나야 할지도 모른다.
기나긴 죽음의 혈통이 통탄스럽고 벼락 맞은 듯 침잠이 밀려와 괴롭힌다.
그 아이를 둘러싼 우울, 어두운 힘, 거짓말, 침묵이 지키는 낸 것은 무엇일까?
한 예술가의 궤적에서 보이는 자신의 목소리, 주장.
샬로테가 그린 최초의 그림들에서 그것이 희망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반 고흐의 깊이, 샤걀의 발견, 수채화가 에밀 놀데, 뭉크, 코코슈카, 베크만...
아카데미즘과 모던 스타일 사이의 길을 찾아낸다.
인종차별을 넘어 베를린 예술대학은 그녀의 철저함과 창의성에 주목한다.
나치 독일은 자유 예술들을 타락한 예술로 몰아 붙태우고 침을 뱉는다.
현대미술을 처형한다.
샤갈과 에른스트, 오토 딕스 지금은 거창한 회고전의 중심에 있다.
보통 사람을 구할 사람은 혁명가, 저항가, 문화 동맹자들뿐이다.
성악 교수이자 작가인 알프렛 볼프존은 파울라의 발성 선생으로 일하게 된다.
그리고 그와 샬로테의 강렬한 만남으로 이어진다.
자아의 맨 밑바닥으로 내려가 목소리를 찾는다.
능력의 원천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 속에 숨겨진 것을 향한 광란의 침잠沈潛
인간들은 어떻게 혼란으로부터 되돌아오는가?
집착을 이해하려면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
1919년 존재하지 않는 해
어둠의 한가운데서 어떤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삶이 이처럼 얽힌 적이 없다.
뛰어들었다 살아남기 위해
마치 죽기 위해서 물속으로 뛰어들듯이
알프렛과 샬로테의 이야기는 죽음과 소녀 이야기다.
아직 무모한 짓을 할 자유가 있다.
존재만으로도 한순간 한순간이 격렬해진다.
공포의 표현에서 아름다움을 본다.
자신이 영구히 두려움에 떨고 있지 않은가?
자신의 그림을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야 했다.
자유란 것은 살아남는 자들의 슬로건이다.
거기 담긴 약속, 순진하고, 거칠고, 미완성인 너의 목소리...
상실과 불안, 생생한 광기, 아름다운 시작이다.
샬로테는 그 작품 속에 살았던 것이다.
물리적 현현顯現
하나의 이상理想
말하고, 꿈꾸고, 노래하고, 쓰고, 창조하고, 죽을 수 있다.
어두운 그림자.
그것은 달아나고 있는 과거다.
그녀의 행복은 그렇게 드러난다.
그녀의 본질은 독특하고, 기이하며, 시적이고, 뜨겁기까지 하다.
두려움보다 더 강한 사랑의 아름다움.
현재가 영원의 형태를 띠기 시작한다.
깜깜한 밤의 한가운데를 그녀는 걸어간다.
없어지질 않을 기억 속에 남을.. 그건 슈베르트의 음악과 더불어 존재한다.
우리의 삶과 기억은 우리가 알아서 정리해야만 한다.
오래오래 껴안고.. 입술을 꼬옥 누르고 있었다는 흔적..
난 내 삶을 버리고 싶지 않아.
난 여기서 태어났어.
왜 나는 아직도 고통을 감내해야 하지?
카프카는 <소송> 주인공 요젭K는 영문도 모른 채 체포당한다.
분별 있는 단 하나의 태도는 상황에 적응하는 것.
요젭K는 결국 개죽음을 당할 터인데.
마치 그는 죽어도 모멸감은 살아남듯이.
더 이상 이름을 가질 권리가 없다.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긴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 건지. 누구인지 모른다.
의식이 방황하는 그런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수만 명이 강제수용소에 수감된다.
그곳, 그들을 기다리는 건 죽음뿐.
모든 기억과 삶과, 유년기, 유일한 사랑, 유일한 자의 영혼.
"널 믿었다는 사실, 절대 잊지 마."
눈앞으로 끊임없이 검은 베일이 지나간다.
추방이란 한낱 자신의 몸이 어디 있느냐의 문제일 뿐.
침울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흥분은 강렬하다.
어떤 힘이 뒤에서 당기는 것 같다.
한 번도 본적 없는 지중해의 광활한 광채다.
꼭 같은 슬픔을 나눠 갖고 있다.
심장은 똑같은 모양으로 뛴다.
살아남은 자들이 숨 쉬듯 죄지은 것 같은 모습으로.
어차피 여기 과거의 잿더미에서 살아남은 건 하나도 없다.
거의 동일한 하나의 몸짓.
허무의 한가운데로 내닫는 한 번의 도약.
서로 다른 나이에 맞은 죽음.
어떤 나이도 살 만한 가치가 없었을까.
가슴에 새겨진 기억, 그리워서 미치겠다.
숱한 약속을 닮은 저 색채들.
삶의 의미, 바로 너.
바다를 향해 달린다.
머리 위로 파도가 잦아든다.
샬로테는 울부짖는다.
밤은 오로지 그녀 위로만 내려앉는다.
1960월 샬로테는 귀르 수용소로 가는 열차 안이다.
귀르 수용소(Camp Gurs)
1939년 프랑스 남서부의 귀르에 건설한 수용소. 원래는 스페인 내란이 종식되고 프랑코 정부의 보복이 두려워 스페인 탈출한 사람들을 수용하려고 만들었는데,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프랑스 내의 독일인 및 위험한 정치이념을 지닌 프랑스인들을 수용하는 데 사용되었다.
삶의 진정한 척도는 기억이다.
-발터 벤야민-
샬로테는 미소를 지으면서 동시에 아파할 수도 있다.
아픔을 감추는 법이라면 어누 누구보다 더 잘 안다.
끊임없는 고통에 익숙해져 있는 그녀이기에.
샬로테의 외로움에 대한 위로가 필요했다.
한층 더 자신의 세계로 침잠한다.
눈을 꼭 감고 그 아름다움을 건너간다.
뜨거운 색채 사이에서 오랫동안 횡설수설한다.
숱한 죽음이 다시 살아나도록....
고독의 한가운데로 한층 더 깊이 들어가...
지난 세월의 이미지들을 생각한다.
자신의 역사를 그리는 것.
예술가라면 누구나 이용하는 길.
시간과 세월이라는 이 아리송한 터널.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형식 안에서 만나게 되는 완전한 자유.
살로테는 자기 작품의 사용법을 제시한다.
인간의 구역으로부터 사라질 필요...
그림의 반주로서 지정하는 음악.
한 페이지, 한 페이지, 그의 얼굴을 수백 번 그린다.
창조에 취해 숨이 멎어도 황홀하다.
광란의 상태, 그린다기보다 내달리고 있다.
심연의 가장자리에 이루어진 창조.
은둔의 샬로테는 스스로를 잊고 몰두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마무리>
#1
시의 형태를 입은 소설이다. 작가 자신이 등장하고, 소설을 되고, 어떤 집착들이 이런 형태의 소설을 만들었을 테다. 연이어 두 문장을 쓸 수가 없었다 한다. 꼼짝할 수 없어 숨이라도 쉬려 다음 줄로 넘어가야 했다 한다. 이렇게 써야 됨을 깨달았다 한다. 특이한 사람이다. 키냐르처럼... 자신의 괄호 안에 들어 있는 말들이 도사리고 있었고 마침내 낚아챈다.
모든 것은 죽음과도 연관돼 있었다. 샬로테의 죽음의 계보... 말은 감각의 경계에 멈추고 혼란의 영역을 정신없이 헤맨다. 혼동 속에서 산다. 운명은 기막힌 환상처럼 느낀다. 열병과도 같은 과도한 감정은 온통 끓어오른다. 이상한 리듬, 이상한 현상이 몸속에 일어난다. 자기 생을 주제로 한 작품은 그녀 자신을 닫아건다.
책 속에서 우연히 마주친 카프카는 언제나 주위를 맴돌고 있을까. 누구라도 카프카의 놀라움에 대해 말한다. <샬로테>는 프랑스 문화진흥국의 출판 번역 지원 프로그램의 도움으로 출간되었다고 한다. 아마 우리나라도 그렇게 하고 있을듯하다. 어느 나라든 문화를 전파하는 힘이 강한 쪽에 압도당한다.
#2
작가 포앙키노스는 스물여섯의 나이, 임신 5개월의 몸으로 나치의 광기에 내몰려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사라진 유대 여인 샬로테를 다시 한 번 더 부활시켰다. 비운의 예술가, 그녀의 짤막한 삶을 산문으로도 말할 수 없었다. 소설 같은 시의 노래로 표현했다. 그는 샬로테의 모든 것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림들, 심각한 미학적 정서, 모든 장소와 색채....
작가는 추적하는 사람이 자신 말고도 있다는 얘기를 듣고, 안심해야 하는 건가, 견딜 수 없어야 하는 건가 때아닌 고민을 한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아마도 나누기 싫은 독점욕 같은 것일까? 나도 때아닌 고민을 해본다. 프랑스 니스에 가본다면... 어떨까... 생각만으로도 무척 행복하다. 피난처, 은신처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유대인들의 니스...로맹 가리의 니스...
작가는 어디까지 그녀의 중심으로 들어가서 보려고 했던 것일까? 소설속 이야기지만... 그녀는 사랑하는 알프렛이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 가장 그리운 사람이 아버지였다는 사실에 그녀 스스로도 깜짝 놀란다. 오랜 세월 단 한마디 소식도 듣지 못했는데.... 유년기, 과거의 추억, 어머니의 부재 속 변하지 않은 사랑, 유일했던 사랑이었기 때문일까....
희귀하고 짧은 희망의 순간이 이내 사라지는 것을 목격한다. 임박한 죽음 사이로 그녀만이 유예된 죽음을 맞는다. 샬로테는 자신의 육체에서 스스로 빠져나와 그림 속에서 산다. 처음부터 기기에 있기 위해서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이게 제 삶의 전부예요.
- 샬로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