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탐미소설의 대가 <미시마 유키오>
지금까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의혹의 눈, 삶을 견디는 다른 방법은 광기나 죽음 뿐, 무언가 이 시간, 이 시간에 있어서의 세계를 잠시 비웠다는 생각, 타인의 세계가 용해된다. 지금도 지상의 불안은 종말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용서할 수 있게 된다. 금각을 불태운다는 결단은 자신의 자유의 근거였다.
금빛의 작은 방에 도달하기만 하면 된다. 그는 완전히 무효로 만드는 행위를 모방하려 한다. 최후의 인식은 그 행위를 하지 않아도 좋은 것이였을까. 무명無明의 긴 밤에 세운 금각인지, 금각을 에워싼 허무의 밤인지, 미美는 그 모두이리라. 마지막 이별을 고할 생각으로 금각을 바라보았고, 금각이 보이지 않아서야 '살아야지' 생각했다....
밤하늘의 달처럼,
금각은 암흑 시대의 상징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아름다운 금각은 잠자코
주위의 어둠을 참고 견디어야 한다.
시간의 바다를 건너 온 아름다운 배,
금각은 수많은 밤을 노 저어 왔다.
금각사 / 저자 미시마 유키오
아름다운 미美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자신을 숨기고, 다른 사물로 둔갑하였다. 눈에 보이는 미美만 믿고 있었다면, 더 접근하여 장애물을 제거하고 핵심을 보아야 한다. 훨씬 작고 완전한 금각, 실제의 금각보다도 무한히 커다란, 마치 세계를 감쌀 듯한 금각을 보아야 한다...
네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면,
어째서 그토록 아름다운가,
어째서 아름다워야 하는가를 말해 다오...
금각사 방문은 그의 오랜 꿈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금각은 아름다워야만 했다!) 금각의 미를 상상할 수 있는 마음의 능력, 그는 금각을 상상하였다... 유별나게 눈부신 곳, 아침 햇살 속에서 금각이 하늘에 솟아 있는 것처럼, 석양을 받아 벌판 한복판에 금병풍을 세워 놓은 것처럼, 금각은 곳곳에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 금각처럼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없었고, 또한 금각이라는 글자, 그 음운으로부터 자신의 마음에 그려 낸 금각은 터무니없이 멋진 것이었다.
눈앞에 금각이 드러났을 때 아무런 감동도 일지 않았다. 아름답기는 커녕 부조화하고 불안정한 느낌마저 들었다. 미美라는 것은 이토록 아름답지 않은 것일까. 그는 배신당한 고통을 느낀다. 그는 몽상하여 현실의 금각을 수정하였다. 전보다 훨씬 아름다운 금각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으로 그리는 금각보다도, 실물이 훨씬 아름답게 보이길 바랐다.
더이상 풍경이나 사물에서 금각의 환상을 쫓지 않았다. 실재하는 금각을 견고하고 선명하게 눈 앞에 떠올렸다. 한 부분을 보아도 전체가 흘러 금각의 섬세한 세부와 복잡한 전모가 드러났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금각을 보러가지만, 금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웠다. 금각은 홀연히 사라져 없어졌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라는 존재는
이 아름다운 미美로 부터 소외된 것이다.
공통되는 위험(전쟁,암흑)은
미美와 나를 연결시키는 매체고 다리다.
내 육체의 속, 내 조직 속에
금각을 숨겨 갖고
도망칠 수도 있을 듯한 느낌이다.
절간의 아이, 열등감을 지닌 소년, 미조구치. 그의 말더듬 증세는 자신을 가로막는 문의 자물쇠며 순순히 열린 적이 없었다. 관여할 틈도 없이 현실은 이미 부여되어 있었고, 무의미하고 큰 어두운 현실은 그에게 다가와 있었다. 어둠의 세계를 향하여 팔을 크게 벌린 채 기다리면 된다는 것, 세상을 바닥으로부터 쥐어짜서 움켜쥐고 있다는 자각을 지녀야 한다는 것,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무게로, 긍지가 되기엔 너무도 무거웠다.
죽은 사람의 얼굴은 존재의 표면으로부터 무한히 함몰되어, 두 번 다시 끌어올리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곳이다. 본다고 하는 것, 의식도 없이 있는 대로 본다는 것은 살아 있는 자의 권리, 잔혹함의 표시며 생을 확인하는 방법이다. 눈부신 모멸이다. 슬픔이라는 것이 있다면, 동기없이, 돌발적으로 엄습할 것이다.
1944년 전쟁말기, 시골 절간의 스님이었던 아버지의 유언대로 미조구치는 금각사의 도제가 되었다. 미국이 사이판에 상륙하였고, 연합군이 노르망디의 벌판을 질주하고 있었다. 전란과 불안, 수많은 시체와 엄청난 피가, 금각의 미美를 풍족하게 만드는 것은 당연하였다. 재로 변할 것이 확실시 될수록 비극적인 아름다움을 더하여 갔다. 금각 또한 같은 생을 살고 있는 듯이 여겨졌다.
우리들을 결코 혼자 내버려 두지 않고,
자신하여 우리들의 공범이 되며 증인이되는 타인의 세계,
타인은 모두의 증인이다.
타인의 아픔은 우리들에게는 느껴지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참회를 하지 않는다면,
아주 조그만 악이라도, 악은 이미 가능해진 것이다.
나는 잃어버린 낮, 잃어버린 빛, 잃어버린 여름 때문에 울었다.
언젠가는 금각을 뒤흔들어, 잠에서 깨어나게 하여,
붕괴의 순간에 금각의 오만한 존재 의미를 뺏앗아 갈 것이다.
17살 미조구치는 암흑의 세계를 그린다. 말살시킬 커다란 암흑에 사로잡혔다. 그리하여 봉황이 불사조처럼 되살아나 날아가길, 금각이 형태에 속박에서 벗어나 도처에 모습을 나타내어 자유로이 떠다니길 바란다. 전쟁말기의 무의미한 시간이 마치 통렬한 쾌락의 기억처럼 선명하다. 이 세상의 최악의 감정도 최선의 감정도 차이가 없이, 살의도 자비도 다를 바 없이, 사진의 음화가 양화가 되기도 했다. 돌아갈 곳이 없는, 자신을 맞이 할 곳 없는 해방을 갈망한다.
현실적인 감각과 야망을 증오한다. 정신의 내부를 꽃잎처럼 유연하게 뒤집어 감아서 육체의 내부 밖으로 드러나도록 할 수 있다면, 그는 자신의 추함을 무無로 돌릴 생각을 한다. 그러나 자신의 뜨겁고 답답한 세계가 사라져갔다. 8월 15일 패전은 미조구치와 금각의 사이를 변화시켰다. 금각은 터무니없이 방대한 허무, 공허한 형태를 쌓고 견고한 미美를 보여주었다.
강요당하여 맛본, 타인의 육체는 감미로웠다. 조금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던 행위였으며, 악의 광채였고, 기억속에서 빛을 발하였다. 자발적인 참회?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그날그날을 보내며 참회가 필요가 없는 나날을 완전히 모방하면 그뿐이었다. 내부로 부터 무너뜨린 내적인 불구자는 사랑받지 못하리라는 안락하고 평화로운 확신에 사로잡힌다. 정신적 불구는 불치가 된다....
<금각의 눈目>
꿀벌을 받아들인 국화꽃은,
그 자신이 노란색의 화려한 갑옷을 입은 벌처럼 되어,
지금이라도 줄기로부터 벗어나 비상할 듯이 격렬하게 몸부림친다.
<나는 금각을 향하여 거칠게 외쳤다>
언젠가 반드시 너를 지배할 테다.
두 번 다시 방해하지 못하도록,
언젠가는 반드시 너를 내 것으로 만들 테다!
하루살이와 같은 단명의 생물처럼, 음악은 꿈과 생명과 유사한 것이며 완전한 추상이며, 창조다. 어떠한 사물에도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는 미조구치는 자신의 체험에 대하여도 친근감을 품지 못하였다. 이전에 금각의 정원에서 창녀를 밟은 이후로, 쓰루카와가 급사한 이후로.... 휩쓸리지 않고 함몰되지 않는 어두운 시간, 무의미한 반복의 작은 연속에서 그려진 불길한 그림을 완성한다.
'과연 악은 가능할까?' 삶-나-금각 사이에서의 줄다리기다. 망막한 물질세계, 얼어붙은 세계는 상대성 속에 내버려져, 시간만이 움직이고 있다. 그는 되돌릴수 없다면 내계의 악에 가능한한 깊숙히 가라앉으려 한다. 밤의 암흑과 동등하게 불빛들 감싸도록, 악이 불어나 광채를 발하도록 할 것이다. 미움을 기대하며 쓸모없는 짓을 했고 금각에 대한 집착마저도 잊었다. 광적인 기쁨을 부추긴 힘은 지나친 절망의 후유증이었다. 그 누적된 결과는 무위無爲 뿐이었다.
무력한 냄새로부터 멀어지고 싶다는 통렬한 느낌, 오로지 (자신의 모습이 갑작스레 사라지는) 출발에 대하여만 생각했다. 금각은 모든 무력의 근원, 금각에게 작별을 고하지 않았다. 새벽별이 보였다. 무의미함에 운명을 걸 생각으로 온 것이다. 이별과 출발의 통일적인 감정을 향하여, 최대한으로 집결하여 미지의 세계로 간다....
밤 11시부터 아침 10시경까지, 규칙적으로,
안개는 쉬지 않고 유동하였기에, 끊기는 일이 거의 없었다.
잇달아 안 개 속에서 나타는 모습은, 나무들의 유령처럼 보였다.
사랑받기 쉬운 모습을 한 죽은 사람만을 인간으로서 사랑할 수 있었다.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다정한 느낌을 내 마음에 불러일으켰다.
미조구치의 내면을 타고 책은 끝마친다. 그의 내면이 얼마나 어두운지 내기라도 하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흐른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과 겹쳐지기도 했다. 전후 일본문학에서 빠질 수 없는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는 음울한 청춘소설이다. 읽는 것 마저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다. 그것도 작가의 능력치 중에 하나 일지도 모른다. 젊음이 지닌 어두움과 초조함과 불안과 허무감이 온통 뒤덮여 있었다...
금각사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놀라웠다. 소설 <금각사>는 실제의 사건을 취재하여 모방하여 쓴 시사소설이라 한다. 역자는 현실 사건을 얼마나 모방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기도 한다. 그만큼 치밀하게? 짜여진 소설이라고 설명하는 것일까. 작품해설은 눈으로 띄엄띄엄 읽어내렸다.
<작가 미시마 유키오 관한 이야기>
병약한 몸으로 금각사를 쓸 때만 해도 우익적인 성향은 커녕 인간의 내면 자체에만 관심을 두었고, 권력이나 집단은 인간의 섬세한 가치를 단순화, 사물화하여 훼손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다. 이랬던 사람이, 헬스를 시작하고 몸이 건강해지자 초극렬 우익이 돼버렸다. 미시마의 표변이 어찌나 심했던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도대체 어떤 게 미시마의 진짜 모습인지 몹시 혼란스러워했다.
미시마가 꿈꾸던 일본은 천황이 군의 통수권을 지니고,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였다. 한 사람의 독재자가 누군가를 강제 수용소에 보내거나 처형을 시키는 짓은 안되는 것이다. 당시의 미시마는 오히려 우익으로부터 극좌라고 까이는 신세였다고 단순한 군국주의자로 표현하기엔 좀 이질적인 면이 많은 편이다. 거의 중2병 수준이다.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우익사상에 찬동하는 건 아니다. 다만 기득권 세력과 결탁한 기존의 우익 세력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좌익 학생들과 단신으로 토론을 벌이는 등의 기개나 논리의 치밀함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출처 - 나무위키>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유년시절의 사진이 좋았다. 모든 사람들이 유년시절의 얼굴을 잃어버리는 듯하다. 나또한 그렇지만... 순결과 순수 잃어버려서 그런 걸까, 그저 부피의 차이일지 모르겠지만.. 있는 그대로 옮겨지면 좋을텐데.. 우스운 생각을 했다. 연륜의 멋도 나쁘지 않다.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기도 하다.. 눈빛은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작가의 이력을 써볼 마음은 들지 않았지만 찾아보고야 말았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함께 있는 사진은 참 대조적으로 비춰졌다.
미美라는 것은 충치와 같다는 가시와기(소설속 등장인물)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 피투성이의 자그마한 갈색의 더러운 이빨을 자신의 손바닥에 올려 놓고 본다. '이건가? 고작 이런 거였나? 나에게 통증을 주고, 나를 끊임없이 그 존재 때문에 고민하게 만들며, 또한 나의 내부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던 것이, 지금은 죽어 버린 물질에 불과하군.' /
사랑니를 뽑았다. 뽑기 전에 무척 긴장되었는데... 실제로 뽑아낼땐 마취로 느낌조차 없었다. 그 자리는 텅비었지만 계속 있었던 그 느낌은 남아있다.... 갑자기 사라져버리고... 모든 사람이 그렇게 갑자기 사라져버리고... 남은 사람들은 살아가지만 자신 또한 갑자기 사라져버리고... 텅 빈자리의 그 느낌을 모두가 간직하고 있다면... /생명 그 자체의 장미가 장미의 원리 속에 파묻히듯이 불후의 물질이 되어 영원히 이어지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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