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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훌리아 Jun 25. 2016

벤야민 이미지 언어 퍼트리기....

발터 벤야민 1892~1940, 독일 출신의 유대계 언어철학자이자 비평가


우리가 이미지의 세계에 끌리는 것은 
지식에 대한 알 수 없는 어떤 은밀한 반항심 때문이 아닐까?



나는 풍경을 내다본다. 
거기 후미진 곳에 바다가 거울처럼 매끈하게 펼쳐져 있다.
숲이 산봉우리 쪽에 말없이 육중한 모습으로 솟아 있다.
그 위에 옛 성의 잔해가 수백 년 전 모습 그대로 서 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영원히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다.

꿈꾸는 자가 바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그 바다가 수십억 개의 파도로 일렁이고,
숲이 뿌리에서 잎 끝까지 매 순간 떨고 있으며,
성의 폐허에 있는 돌들이 쉼 없이 무너지고 흘러내리고 있고,
하늘에는 공기가 구름을 이루기 전에
눈에 보이지 않게 서로 싸우며 들끓고 있다는 것,
이 모든 사실을 잊어버려야만 그는 이미지의 세계에 잠길 수 있다.

그 이미지들에서 그는 평온과 영원함을 얻는다.


그를 스치는 모든 새들의 날갯짓,
그를 엄습하는 모든 바람의 일렁임, 
그가 맞닥뜨리는 모든 가까움은 
그가 거짓말 하고 있다는 걸 입증한다.

하지만 모든 멂은 그의 꿈을 다시 복구해준다.

구름조각들은 모두 그 꿈이 기대는 벽이 되고,
불빛이 비치는 창들만 보면 꿈은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꿈은 움직임 자체에서 모든 자극적인 가시를 제거하는 데 성공할 때,
바람을 살랑거림으로, 새들이 푸드덕거리며 날아가는 것을 
철새들의 떼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할 때, 
가장 완벽한 모습을 띤다.

이처럼 자연을 퇴색한 그림들의 액자 속에 집어 넣어 정지시키는 것이
바로 꿈꾸는 자의 쾌락이다.
그 이미지들을 다시 불러내어 사로잡는 것이 
바로 시인의 능력이다.


사유이미지 중 p223-224





# 내적인 이미지, 삶의 그림자


우리 자신은 대부분 내부가 가난하다. 자신의 내적인 이미지라는 것은 시시각각 만들어내는 순전한 즉흥이고 그 이미지 앞에 드러난 마스크 뿐이다. 세계는 그와 같은 마스크들의 저장고다. 이 마스크 놀이를 우리 모두는 도취되기 위해 그리워 한다. 우리는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삶의 그림자가 우리 내부에서 올라오는 느낌의 정도가 빈약하면 빈약할수록 그만큼 더 예언가를 믿는다. 



# 기억의 발굴


기억은 체험된 것의 매개물이다. 어두운 대지 속 파묻힌 자신의 과거에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이다. 발굴작업을 수행하는 그 사람과 같은 태도를 취해야 한다. 발굴할 때 흙을 흩뿌리는 것처럼 그 사태를 흩뿌리고, 땅을 헤집듯이 그 사태를 헤집어야 한다. 발굴의 목적은 '사태들'의 지층을 탐색하는 것이다. '사태들'의 이미지들은 냉정한 방에 놓인 귀중품이다. 좋은 고고학적 보고서는 넓은 대지에 발굴장소가 표시되어 있고, 발굴된 것들의 출처, 탐색 이전의 지층들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 소설의 뮤즈


모든 책이 똑같은 방식으로 읽히지 않는다. 소설들은 삼켜지기 위해 있다. 동화시키고자 하는 욕구다. 자신에게 부딪쳐오는 것을 동화시킨다. 소설의 기술은 위장의 생식과 같은 경험의 생식이 끝난 데서 비로소 시작한다. 만약 그 경험들을 실제로 마주칠 경우 사람들을 파멸시킬 것이다. 소설의 뮤즈는 세상을 날것의 상태에서 건져내어 거기서 먹을 만한 것을 만들어내고 그것의 맛을 추출해 낸다.



벤야민은 자신의 고유한 언어철학에 바탕을 둔 글쓰기, 자기성찰, 특유의 초현실주의적 사상, 철학을 이어간다.




숲이 끊기고 평지가 시작하는 곳에서 풍경이 나타났다.
흑단으로 된 옛날 사진틀 속에서처럼,
모든 게 선명한 색깔들로 빛났고,
무겁고 축축한 검은색이 지배적이다.

이제 막, 꿈 속에서, 다시 한 번 고통스럽게 갈아엎은 밭,
그 속에 나의 나중에 삶의 씨앗들이 다시 뿌려졌던 밭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꿈에서 내가 자랐던 하우빈다에 있었다.

-<다시 한 번> 벤야민 -




일방통행로 사유이미지 / 저자 발터 벤야민 / 출판 길 / 발매 2007.11.30.


발터 벤야민 선집 1권 중 사유이미지


 

벤야민의 짤막한 산문들은 수수께끼 그림들이고 사유를 움직이게 한다. 때론 충격과 탄식, 작은 한숨을 짓게 한다. 사고의 자발성과 에너지를 자극하고, 지적인 글을 통해 불꽃이 점화된다. 타성에 젖어 꼼짝도 하지 않던 사고에 불현듯 다른 각도를 비추어 준다.

벤야민의 꿈은 꿈들이 드러내는 진리, 꿈들이 깨어나 눈짓하는 것들을 포착하고 기록하는 것이다. 꿈은 경험의 매개체가 되며 굳어버린 사유와 맞서는 원천이다. 성찰은 작용하지 못하도록 떨어뜨려놓고, 사물들은 섬광이 비치는 순간 보이는 모습 그대로 내버려둔다. 그는 세계가 사람들에게서 추방시키려고 하는 그 사유 자체를 다시 복구하길 기대한다. 

(벤야민의 사유 이미지 성격,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말 요약과 함께 씀 p 51~53)






<마무리>


파스칼 키냐르의 비소설을 읽으며 필사를 겸해서 했다. 글자들 하나 하나가 디딤돌이라면 나는 그 디딤돌을 어떻게 딛고 지나왔는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해서였다. 반은 정신을 깨웠고 반은 정신이 없었다. 읽다가 도중에 기억이 전혀 다른 파도를 타고 있는 것 처럼 떠내려갔다. 다시 기어올라와서는 읽던 곳 짚어가며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벤야민은 더 원석같다고 느껴졌다. 우리말을 읽는데도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들, 어색한 문장들이 조금은 아쉬웠지만 그래서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를테지만 키냐르의 글이 오히려 더 세련되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키냐르 이전에 분명 더 사유 이미지에 가까운 글이 있다면 이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여겨졌다. 여기에 오류라면 내가 이 두 사람만 겨우 만났을 뿐이라는 거다.

21세기 현재에도 벤야민의 사유세계는 많은 사상가들에게 지적 자양분을 제공하고 있다. 그의 사상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친 당대의 거장들(테오도르 아도르노,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에른스트 블로흐로)도 궁금했다. 그들은 벤야민으로 부터 영향받기도 했다. 한 덩어리가 되어서 이동하는 것이라고 느껴지는 부분이다. 

선집의 의미... 분석과 설명과 이해 등등 중요하기도 하지만 좀 더 느껴지는 글을 제대로 느껴보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선집의 기획 의도, 집필의 배경, 번역자의 말이 도입부분에 빼곡하게 쌓여서 지나는 길이 험난했다. 분명 중요하고 이해에 도움이 되었지만, 이해를 좀 못하면 어떤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 보는 글의 주인을 각인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은 충분히 그 글은 느낄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읽지않고 점프해서 바로 지나칠 수도 있지만 타협없이 수순을 따라가고야 만다. 그러고보면 책을 만드는 사람은 그 부분에서 딱딱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벤야민을 벤자민으로 부를 만큼 처음 본 발터 벤야민이지만, 이제는 좋아하는 사람들 중 하나가 되었다. 철학가라고 부르기 아까울 만큼 그의 짧은 산문들이 좋았다. 방대한 사유 영역을 다 탐색할 자신은 없을 것만 같다... 간혹 조금씩 아주 조금씩만 만나기로 정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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