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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훌리아 Aug 19. 2016

얼어붙은 불꽃,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

에세이


시계는 '떠남'을 가리키고 있다.
여기를 떠나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내 삶에 있어 여기는 이제 너를 통해서만 체험할 수 있게 되어버렸어.
그건 연애감정이나 로맨틱한 감상 따위와는 정말
아무 관계도 없는 사실이야.

며칠전에 샀던 장남감들을 펼쳐놓고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그녀는 매우 즐거워했다.
그 와중에 나는 눈물을 참으려 애를 써야했다.

1927년 2월 1일
- 발터 벤야민-

모스크바 일기  / 저자   발터 벤야민                                                 




# 도착

<모스크바 일기>는 두 달 동안 모스크바에 체류한 벤야민의 기록이다. 그의 어떤 고민이 모스크바로 떠나게 했다. 그 고민의 한가운데엔 아샤, 독일 공산당, 사회주의 국가 모스크바 도시의 이미지와 그 삶이 놓여있었다. 벤야민은 러시아 영화, 연극, 그림, 전시, 발레 등 예술의 모든 것들을 찾아다니며 감상한다. 

그가 모스크바의 문학계와 관계를 맺어보려던 기대, 스스로 만들어냈던 모든 환상들은 결국 갈 곳을 잃어버린다. 또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아샤 라치스와의 관계마저도 비슷한 결말을 맞게 된다. 

혹독한 기후, 언어의 무지, 라이히의 존재, 제한된 삶을 사는 아샤. 그 하나하나가 모두 성벽이며 나아가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 일기엔 그가 느꼈을 씁쓸하고도 좌절된 구애의 이야기로 채워져있다. 







<유물사관>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 사회 또는 사유재산제를 생각할 때에도 그것은 인간사회에서 떼어낼 수 없는 제도가 아니라 어느 시기에 역사적으로 성립하고 변화하고 발전되어 온 것으로서 언젠가는 소멸한다고 보았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견해를 인간사회의 역사에 입각해서 고찰한 것이 ‘사적 유물론’이다. 그리고 이 이론은 실증적 연구와 상호관계를 맺으면서, 인류의 사회가 아직 계급 차별이나 빈부 차별이 없었던 원시공동체 시기로부터 빈부의 차, 사유재산제가 조금씩 생긴 고대노예제로 나아가 여기에 비로소 계급사회가 성립한 것, 또한 봉건제 사회가 생기고 이를 이어서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실증적·이론적으로 분명히 규명하려고 하였다. 그뿐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를 계급적인 대립이나 차별이 없는 사회주의 사회로 전환시키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힘이며, 특히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 및 그 전위인 정당의 힘에 의해 새로운 사회가 출현할 것을 예언하였다.(위키백과 발췌)




1926년 12월 6일 몹시 피곤한 상태에서 
(또한 아마도 슬픔에 차서)

- 발터 벤야민 -




모스크바의 중심에 위치한 건축 예술의 기념비 <크렘린> / 모스크바의 중심 거리 , 트베르스카야 거리(1895-1900)




게르체나 거리를 거쳐 크렘린까지, 완전한 실패작인 레닌 묘를 지나 
이삭 성당이 보이는 곳까지, 
트베르스카야 거리를 거쳐 트베르스코이 대로를 통해 
프롤레타리아 작가 조합이 위치한 게르체나 돔으로 되돌아옴.

-벤야민 12월 7일-




러시아 모스크바 중심부의 붉은 광장에 있는 <블라디미르 레닌의 무덤> / 웅장한 금빛의 둥근 지붕이 특징인 <성 이사악 성당>은 현재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모스크바를 그리워하게 하는 건 
눈뿐만 아니라 이곳의 하늘이기도 하다.

다른 어떤 대도시도 도시 위에 
이렇게 많은 하늘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이 도시의 삶과 사물들의 아름다움을 표현 앞에서
어떤 결론도 이끌어내지 않았다.



한 장소를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방에서 그 장소를 향해, 또한 그 장소로부터 동서남북 사방으로 다시 가보아야 한다.

한 단계 더 나아가면 우리는 그 장소를 방향을 찾는 기준으로 활용한다.

*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해 보아야만 비로소 어떤 상황에 대한 하나의 그림이 그려 질 수 있다.


# 모스크바


모스크바라는 도시 이름은 모스크바 강에서 따왔다.  1월 평균기온은 영하 32.5도. 끔찍한 추위다. 창문에 성에가 잔뜩 낀 난방이 되지 않는 작은 전차, 완전히 얼음판인 길 위를 적응하는 일, 눈과 얼음으로 죄다 덮여 인도와 차도가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농가 아낙네들이 수건 위에다 창문에 서린 얼음꽃 모양을 수놓는다. 

여기 썰매들은 먼저 말들을 생각한다. 모든 것들이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도록 고려되어 있다. 또 좁은 인도에 넘쳐나는 사람들 때문에 이곳에서는 '지그재그로' 걷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모스크바 거리의 불빛들. 거리의 가로등을 강하게 반사하고 있는 눈 때문에 거의 모든 거리가 밝아 보인다.

레닌 초상을 통한 의식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일반화되어 있으면서 가난에 찌들어 신음하는 이 도시에 병난 입속의 치석처럼 사치가 쌓여가고 있다. 초콜릿 상점, 고급 패션상가 사이 차갑고도 섬뜻하게 서 있는 곳. 일말의 생명감도 없는 구걸 행위는 다 죽어가는 자들의 집합체다. 동정보다 더 크게 지갑을 열게 만드는 사회적 양심의 가책이라는 토대를 상실했다. 모든 대도시들 중 가장 고요한 도시다. 변두리의 느낌을 준다.


<혁명이 실패할 가능성 VS 혁명이 성공할 가능성> 이 두 경우 모두 예측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조직의 변화-
<혁명적 작업>을 <기술적 작업>으로 변화시키는 것, 러시아에서 지금 이 시간의 혁명적 작업이란 투쟁이나 내전이 아니라, 전력화와 운하건설, 공장설비다.

사적인 삶을 위한 시간이 없다.




# 사회주의 국가 <레닌과 스탈린>


1922년 12월 말에 작성한 레닌의 유서에서 자신이 죽은 후에는 집단지도체제를 택해야 하며, 스탈린은 지나치게 무자비하므로 권력을 독점하게 할 수 없고 지금의 서기장직에서도 해임해야 한다고 밝혔다. 레닌 사후 정치적으로는 유명한 스탈린의 숙청이 진행되었다. 

스탈린의 독재체제는 숙청으로서 완성된 것이었다. 1933년부터 1938년 사이에 숙청된 사람의 수는 수백만 명 이상이라고 추정된다. 여기에 급격한 농업 체제 개편의 와중에 천만 명이 굶어 죽었다고 하며, 3천만 명 이상의 주민이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는데 이 중 절반 가량이 질병이나 굶주림으로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세워졌고, 70여년 동안의 장대한 실험이 시작되었다.  그는 한국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1953년 3월 1일, 스탈린은 모스크바 근교의 별장에서 잠을 자다가 뇌졸중을 일으켰다. 오른쪽 반신이 마비된 상태로 나흘을 더 버티고, 그는 숨을 거두었다. (네이버 인물 세계사 발췌)




# 프롤레타리아 구역


프롤레타리아 구역의 중심은 아이들이다. 코뮤니스트적 위계질서가 있다. 모든 도시에 그들의 클럽이 있는, 교육받은 당의 후진들이다. 붉은 색 목도리 자랑스럽게 두르고 레닌 초상을 손으로 가리킨다. 모스크바의 모든 구역에는 '아동광장'이 설치되었다. 교사 한 명이 잘만 관리하면 수백 명의 아이들이 그곳을 채울 수 있다. 집단적 슬로건들에 최대한 밀착해 분명하게 따른다. 8시간 동안 아이들을 감독, 관리, 먹이고, 돌본다. 이 일을 하는 교사의 사적인 삶은 없고 아이들 또한 비참한 모습이다.

러시아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 문화 유산들에 대한 사실상의 소유자가 되기 시작했다. 장난감 박물관의 가공산업 도구, 자료, 모형 수천점은 아이들에게뿐만 아니라 연구자들에도 기여하고 있다. 인형극, 미술관 이곳에서 자신들의 운동역사에서 나온 테마들을 발견한다. '모반자가 경관들을 보고 놀라다', '시베리아에서 돌아온 추방자', '가난한 여교사가 부유한 상인의 집에 고용되다' 

아이들은 이제 막 자기 자신을 형성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거장들의 작품을 인식한다. 그들의 노동, 계급의 척도, 의미는 동시대 작품들에만 요구된다. 모스크바의 힘겨운 일상, 그 속에는 특징짓는 두 좌표가 있다. 저녁 시간의 연극이라는 수평선, 그리고 그것과 교차하는 식사 시간이라는 수직선이다. 



우리 사이에서 '너'라는 호칭이 유지되고 있고, 
그녀가 오랫동안 날 바라볼 때의 눈빛-
그렇게 오랜 시선과 긴 키스를 허락했던 여자를 나는 알지 못한다.
-도 나에 대한 지배력을 하나도 잃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그녀를 향한 충동이 장애물에 부딪힌다.
이 어둠은 우리가 모스크바에서 함께 보았던 유일한 어둠이었다.




연극 한 장면<라이히, 아샤, 벤야민 역>  

# 아샤 라치스
너무도 집중해서 그녀를 바라보느라 그녀가 말하는 건 거의 듣지 않고 있다. 감정은 사랑하는 육체의 그늘진 주름살, 투박한 몸짓, 그리고 눈에 잘 띄지 않는 결점을 찾아 그 안에 숨어 들어가 안전하게 은신처 안에서 몸을 움츠린다.

벤야민이 아샤를 만날 당시 그는 아내 도라와의 사이에서 아들 스테판을 두고 있던 유뷰남이었고, 아샤는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해 혼자 다가를 키우며 오스트리아 출신 연극 비평가 겸 연출가 라이히와 동거 중이었다. 벤야민은 이전 부터 아내와의 관계가 힘들어져 아샤를 만나면서 이혼을 굳혔지만, 그녀는 라이히와의 관계를 지속했다. 벤야민은 라이히와 지적교류를 나누던 사이었다. 이들 세 사람의 미묘한 관계는 곧 익숙해져버린 것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아샤와 벤야민>  

<모든 건 나의 탓...>
나는 서너 번 정도 그녀와 함께 하는 미래를 회피했다. 카프리에서 그녀와 함께 '도망가지' 않았을 때. 로마에서 아시시와 오르비에토로 그녀를 데려가는 걸 거절했을 때, 1925년 여름 그녀와 함께 라트비아로 가지 않았을 때, 그리고 베를린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일에 얽매이기를 원치 않았을 때. 그것은 그녀 내부에 있는 어떤 적대적 요소에 대한 나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난 내가 그것에 대처할 만큼 성숙했음을 느낀다.






# 지식인들의 만남


벤야민은 WAPP(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작가조합 약칭 VAPP이나 벤야민은 독일식 표기 따름)에서 많은 스탈린 일화 등을 전해듣는다. 사람들은 엄격하고도 미묘한 정치적 입장을 가장 중요시한다. 20세기 초 그들의 집필 방법은 자료들을 폭넓게 제시하고 가능한 한 그 이상 나아가지 않아야 한다. 대중들의 교양 수준이 너무 낮아 많은 표현들이 이해되지 않은 채 넘어간다. 반면 독일에서의 집필 방법은 단 하나만을, 곧 결론만을 요구한다. 그리고 어떻게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여기에서의 삶은 고립되어 있지만 다사다난하고, 결핍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수많은 전망들로 가득 차 있는, 마치 클론다이크(사금 생산지로 유명한 캐나다 유콘州에 있는 지방)의 금광 채굴자의 삶과 같다. 아침 일찍부터 늦은 시간까지 권력이 발굴된다. 그는 러시아 체류를 통해 유럽을 관찰하고 판단하는 걸 배우게 된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글을 쓰고 있는 건가요?
이에 대해 대답하실 수 있습니까?



# 벤야민의 글쓰기


모든 언어적 본질은 표현과 전달이라는 양극성을 갖는다. 전달 기능만을 양성하다 보면 언어 파괴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반대로 언어의 표현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은 신비주의적 침묵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 두 길 가운데 당장 더 현실적인 경향은 전달이다. 그는 스스로의 글쓰기가 위기에 처해 있음을 고백한다. 

좌파 아웃사이더로서의 위치가 확실해지는 것이 집약적인 작업을 통해 가능할 것인가? 포괄적인 생산의 가능성을 계속 보장해 줄지하는 의문. 그리고 이 생산이 어떤 단절없이 새로운 단계로 이행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 등이 그의 고민이었다. 그는 무대 아래 관람석에서 견딜 것인지 아니면 무대 위에서 이러저러한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일 것인지를 택하라는 질문을 던지고는 무조건적으로 입장을 취하라고 강요하는 글쓰기를 하고있는 것이라 느낀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이미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다른 책들을 읽어왔다는 사실과 고전적 희곡 작품들에 대한 모든 지식이 독서 클럽 <독서의 밤>을 통해서란 걸 문득 발견한다. 나는 잠시 그가 비평가란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는 자주 쓰는 방식은 짧은 단상들로 나눠 '포괄적인' 글을 쓰는 것이다. 자신의 체험이 독자들에게 생생한 인상이라는 면에서 풍요롭게 전달되길 바란다.







한 편의 그림(나는 모스크바라고 생각했고 
책이라 생각했다)을 이해한다는 건
우리가 그 그림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 공간이 오히려 먼저 아주 특정하고도 다양한 곳들에서
돌진해 나오는 것이다.

이 공간은 우리가 아주 중요한 과거의 경험들을
찾을 수있다고 믿는 각도와 구석에서 
자신을 열어 보인다.



<마무리>


여전히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이다. 어떤 혁명도 성공할 수 없는 상태로 지속되는 걸까. 조금씩 보완하는 관계인지도 모르겠다. 혁명만이 모르는 '그것'이 참담하기만 하다. 모두가 기대하는 세상은 어디에서도  찾지말아야하는 걸까. 사랑하는 방법은 여기에서 찾아야 하는데... 문학과 예술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의 현실, 또 이어져 오는 세상을 비추어 보았다. 벤야민같은 에세이스트가 또 있을까. 

지명은 처음 몇 곳만 찾아서 확인했고 이후에 나오는 거리며 성당, 건물들은 비슷하게 떠올리고 말았다. 벤야민의 글을 읽으면서 꼭 영화처럼 그려졌다. 그가 이동한 거리, 아샤와의 만남, 그 시대의 풍경, 1820년대 파리 상점가를 가리키는 파사주Passage를 떠올리려 했다.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과하지 않게 토로한다는 점에서 좋았다. 그의 일기를 읽지만 전혀 일기같지 않았다. 기록에 치중한듯이도 느껴졌고 또 그가 번역하려 읽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처럼 이 일기도 그에게 사라질 시간들 같이 느껴졌다.

아샤는 신경쇠약으로 요양원에 있었다. 게스트 하우스나 호텔로 아샤와 라이히가 찾아오거나 그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다시 못 올 러시아라고 그는 생각했지만 다시 온다면 재정적으로 넉넉하게 또 언어를 마스터하고자 마음먹기도 했다. 닿지 못하는 아샤를 생각하며 외로워하지만 서로 다른 장소에 있더라도 같은 시간에 외로움을 서로 느끼고 있다면 벤야민은 어떤 외로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되었다고 말한다.

아샤는 체류하게 될 곳, 다른 도시로의 이주로 불안과 걱정이 쌓여 생긴 신경쇠약인듯 했다. 그녀가 바라는 조용하고 쾌적한 부르주아적 생활은 꿈이고 그 편에 벤야민을 두었을까 생각했다. 서로가 다른 방향에 서 있었다. 벤야민은 거의 대부분에서 아샤를 대처하지 못했고 불안해했다. 깊숙하게 자리잡은 고민 중 하나는 좌파 아웃사이더로서 삶을 살아낼 자신이 있는지 스스로 묻는듯하기도 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8월의 모스크바가 되어버렸다. 벤야민의 크리스마스, 러시아 숲의 축제, 그가 본 모스크바와 아샤.... 기대와 환상이 갈 곳 없이 되돌아왔다. 나도 되돌아왔다. 잊지못할 여름더위다. 2016년 8월을 기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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