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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훌리아 Apr 03. 2017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연보

문학동네 발췌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년 7월 3일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에 속한 보헤미아의 수도 프라하에서 독일어를 쓰는 유대인 중산층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 보헤미아 남부지망 보세크 출신, 어머니 '율리에' 뢰비 가문 출신이다.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사회적 신분 상승과 주류 사회로의 진입을 위해 프라하로 진출해 장신구 가게를 열었다.  남동생 2명은 영아기에 사망,  여동생 3면 엘리, 발리, 오틀라라고 불린 가브리엘레, 발레리, 오틸리에가 있었다.  카프카는 막내 오틀라와 친하게 지냈으며, 세 여동생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 사망했다.

1889~1893년 프라하 구시가지에 4년제 초등학교에 다녔다. 독일계 학교를 다닌 것은 당시 프라하의 상류층 사회에 들어가기 위한 부모님의 조치였다. 당시 프라하 상류층을 형성한 주류, 기독교 세계, 보혜미아계 독일인들과 프라하 주민의 대다수 체코인들 사이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카프카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이었다.

1893~1901년 프라하 구시가지에 있는 독일계 김나지움(유럽국가의 중등학교)에 다녔다. 이곳에서 평생지기 친구 루돌프 일로비, 후고 베르크만, 에발트 펠리스 프리브람, 오스카 폴라크를 만난다. 이 시기 카프카는 문학에 마음을 두고 몇 번의 습작을 했다. 이때 쓴 작품들은 일기와 함께 유실되었다.

1900 (카프카 17세 여름) 체코 동부 모라비아 지방 드리시의 시골의사인 외삼촌 지크프리트 뢰비의 집에서 방학을 보냈다.  외삼촌은 독신으로 살면서 탈무드에 정통했던 기인적인 인물이다. 후에 카프카의 단편<시골의사>를 집필하는 데 영감을 주었다. 카프카는 니체의 전작을 읽기 시작했다.

1901년 (카프카 18세 가을) 프라하의 독일계 대학인 카를페르디난트 대학에서 학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화학을 공부했다가 바로 법학으로 바꾸었다. 한 학기 동안은 독문학을 공부하면서 미술사를 수강하기도 했다.


카프카 동상




카프카 10대후반 ~ 20대
1902년 (카프카 19세 가을) 뭔헨 여행을 하면서 그곳에서 독문학을 전공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가족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프라하에서 법학 공부를 계속한다. 1902년 10월 23일 평생지기 막스 브로트를 만난다. 그는 카프카를 문단에 소개시켜 작품이 출판되는 것을 도와주었다. 아시다시피 그는 카프카 사후에도 유고들을 직접 출판한다. 대학시절 카프카는 헤르만 헤세와 플로베르의 작품에 감동하고,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에 매혹되어 문예지 <노이에 룬트샤우>에 실린 작품들에 관심을 갖는다.

1905년 (카프카 21세) 보존되어 있는 카프카의 첫 문학작품, 노벨레 <어느 투쟁의 기록>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그는 막스 브로트, 오스카 바움, 펠릭스 벨치와 정기적으로 교유하면서 프라하의 유대계 문인 그룹 '프라하 서클'을 형성한다.

1906년 6월 18일 (카프카 22세) 막스 베버의 동생인 알프레트 베버의 지도로 프라하 대학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가을 부터 프라하 민사법원과 형사법원에서 1년 간 법률 시보로 실습한다.

1907년 (카프카 23세) 미완성 단편 <시골에서의 혼례준비>를 집필 시작한다.
A형태 텍스트 : 1906~1907년 집핍 추측
B, C형태 텍스트 : 1908년 집필 추측

1907년 10월 첫 직장인 이탈리아계 민간 보험회사 '아시쿠라치오니 제네랄리'의 프라하 지점에 취직하여 9개월 정도 근무한다.

1908년 3월 (카프카 24세) 문예지 <히페리온>에 '관찰'이라는 제목으로 8편의 산문 소품을 발표한다.

1908년 7월 30일 프라하 소재 ' 보헤미아왕국 노동자재해보험공사'로 직장을 옮겼다. 1922년 7월 조기 퇴직할 때까지 14년 동안 법률가로서 근무한다. 당시 카프카는 직장에서 일에 열성적이고 성실하고 지적이며 유머있는 사람으로서 좋은 평판을 받았다. 그의 작품에서 풍기는 어두운 분위기는 그가 사회구조 속에서 경험한 관료기구의 무자비성, 산업체 노동자들의 위험하고 열악한 노동여건,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개인의 소외, 무력감을 통찰한데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유형지에서 (In der Strafkolonie)


꿈과 같은 나의 내면의 삶을 서술하는 것이
다른 모든 것을 부차적으로 만들었다.

- 프란츠 카프카 -


1909년 (카프카 25세) <어느 투쟁의 기록>의 일부인 <기도하는 자와의 대화>와 <취한자와의 대화>가 '히페리온'에 게재된다.

1910년 (카프카 26세) 본격적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방대한 분량을 남긴다. 카프카에게 일기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형상과 비유, 이야기 형태의 문학이었고, 문학적  착상을 기록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1910년 5월 직장에서 중간 법률 고문으로 승진하였다. 선거 집회 및 사회주의 대중 집회에 참석하고, 동유럽 유대인 순회극단의 연극을 자주 관람하였다.

1911년 10월 (카프카 27세) 프라하 시내 카페 '사보이'에서 동유럽 유대인 극단의 공연 <배교자>를 관람하고 유대인 극단 배우 이차크 뢰비와 친밀하게 지내며 동유럽 유대인들이 공유된 정신, 종교, 문학세계, 카발라 등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 해 가을 아버지의 자금으로 여동생 남편의 석면공장 사업에 동업자로 참여하지만, 유보적인 태도를 보여 가족들과 갈등을 빚었다. 한편 그는 첫 장편 소설 <실종자> 집필에 들어갔다. 이 작품은 막스 브로트가 1927년 '아메리카'라는 제목으로 첫출간한다.

실종자, 아메리카(브로트판 실종자) / 심판



카프카 20대 후반 ~ 30대
1912년 2월 (카프카 28세) 카프카는 이차크 뢰비와 프라에서 유대인 독일어(이디시어)에 관한 강연을 하며, '소수민족 문학론을 설파한다. 8월 13일 막스 브로트의 소개로 베를린 출신 '펠리체 바우어'를 처음 만난다. 9월 20일부터 활발히 편지를 주고받는다. 이후 5년간 3백여 통의 편지가 오고갔고, 몇 차례 만났으며, 두 번의 약혼과 파혼을 했다. 카프카는 사업도 결혼 정착하려는 어떤 시도가 일어날때마다 내면의 브레이크를 걸린다. 시민적인 생활, 이 구조에 들어갈 수록 문학을 위협할? 것으로 생각되어 평생 주저하게 된다.

이 해는 카프카가 작가로서의 인생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맞은 해다.

9월22일 - 23일 하룻밤 사이에 카프카의 문학 열정에서 '돌파구'로 평가받는 <선고>를 집필하고, <실종자>집필을 계속하여 연말까지 첫 장인 '회부'에 이어 이후 다섯 장을 완성했다.
11월-12월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 <변신>을 집필한다.
http://roh222.blog.me/220796040364



12월 카프카의 첫번째 작품집 <관찰>이 에르스트 로볼트 출판사에서 출간된다.
12월 4일 프라하 작가 모임에서 <선고>를 낭독하여 재능 있는 작가의 출현을 알린다.

1913년 3월 (카프카 29세) 베를린에 있는 펠리체의 집을 처음으로 방문한다. 5월 <실종자>의 첫 장에 해당하는 <화부>가 별도로 출간되었다. 막스 브로트가 발행하는 문학 연감 <아르카디아>에 <선고>가 실렸다. 11월 펠리체의 친구 그레테 블로흐와 만나 서신 교환을 시작한다. 키에르케고르의 저작들에 관심을 갖는다.

선고(단편) / 변신 / 시골의사(단편)


1914년 3월 (카프카 30세) 6월 1일 베를린에서 펠리체 바우어와 약혼한다. 6주후 베를린의 호텔 '아스카니셔 호프'에서 파혼한다.  8월 1일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카프카는 노동자재해보험공사의 요청으로 징집에서 면제된다.
8월 장편소설 <소송>의 집필에 몰두한다.
10월 세계대전의 암울한 분위기에서 단편 <유형지에서>와 <실종자>의 '오클라하마' 장을 집필한다.
12월 <소송>에 삽입될 핵심적인 비유담 <법 앞에서>를 집필해 별도로 출간한다.

1915년 1월 (카프카 31세) <소송> 집필을 중단한다. 파혼후 펠리체와 재회한다. 3월 서른 한 살의 나이에 프라하 시내에 처음으로 자기 방을 얻어 독립한다. 10월-11월 중편 <변신>이 잡지 <디 바이센 블래터>에 발표되고 뒤이어 쿠르트 볼프 출판사에서 '최후의 심판일' 시리즈의 하나로 출간된다. 독일 작가 카를 슈테른하임이 카프카의 문학적 자질을 인정하여 폰타네상을 양보한다. 카프카는 1913년 출판된 <화부>로 이 문학상을 수상한다.

1916년 4월 (카프카 32세) 오스트리아 작가 로베르트 무질이 프라하에 와서 카프카를 방문한다. 7월 펠리체와의 관계가 회복되어 체코 휴양지 마리엔바트에서 열흘간 함께 휴가를 보낸다. 10월 <선고>가 쿠르트 볼프 출판사의 <최후의 심판일> 시리즈로 출간된다. 11월 펠리체와 뮌헨을 여행하면서 그곳에서 작품 <유형지에서> 두번째 낭독회를 가진다. 11월 여동생 오틀라가 제공한 프라하의 작은 집에서 6개월 정도 머물면서 작품집 <시골의사>에 수록될 단편들 <회랑에서> <이웃 마을> <황제의 전언> 등을 집필한다.

카프카 작품 수집(표지이미지) / 학술원에 보내는 보고서



1917년 3월 (카프카 33세) 히브리어 공부를 시작한다. 7월 펠리체와 함께 부다페스트를 여행하고 프라하로 돌아와 두 번째 약혼을 한다. 8월 9일-10일 처음으로 각혈을 하면서 폐결핵 증세를 보인다. 9월 4일 카프카는 결국 당시로서는 불치병인 폐결행 진단을 받고 펠리치와 파혼하기로 결심한다. 9월 요양을 위해 막내 여동생 오틀라가 작은 농장을 경영하는 북구 보헤미아의 취라우에서 이듬해 5월까지 8개월간 머물면서 <세이렌의 침묵>과 다수의 '잠언'을 쓰는데, 이 시기에 나온 잠언들에는 죄와 고통, 희망, 참된 길 등 종교적 주제가 강하게 나타난다. 12월 25일 프라하에서 펠리체와 만나 두번째 파혼을 한다. '오스트리아 조간신문'에 인간이 되는 길을 걸어온 원숭이 '빨간 피터'의 이야기 <학술원에 보내는 보고서>가 게재된다.

1918년 5월 (카프카 34세) 다시 프라하로 돌아와 직장생활을 계속한다. 10월 1차 대전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해체되면서 체코공화국(10월 28일)이 탄생한다. 12월 프라하 북쪽에 있는 셸리젠에서 4개월간 요양한다.

1919년 5월 (카프카 35세) <유형지>에서 가 쿠르트 볼프 출판사에서 출간된다. 9월 중순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요양지 셸레전에서 만난 유대인 수공업자 집안의 딸 율리에 보리체크와 약혼을 한다. 이 역시 아버지의 반대로 1920년 7월 약혼 취소하게 된다. 이러한 갈등을 계기로 카프카가 1919년 쓴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는 개인적으로 안고 있었던 '부자갈등'에 관한 장문의 기록물로서 카프카 문학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http://roh222.blog.me/220696326491



1920년 3월 (카프카 36세) 직장 동료 아들 구스타프 야누흐가 카프카를 자주 찾아와 함께 산책하고 대화를 나눈다. 야누흐는 나중에 회상형식으로 <카프카와의 대화(1951)>라는 중요한 자료를 출간한다. 체코 출신의 여기자이자 카프카의 작품을 체코어로 번역한 밀레나 예젠스카와 서신 왕래를 시작한다. 5월 두 번째 단편집 <시골의사>가 쿠르트 볼프 출판사에서 출간된다.
12월 슬로바키아 타트라 산지의 마틀리아리 요양소에서 9개월간 지낸다. 이 시기에 우화적 단편 <귀향> <작은 우화> 집필한다. 이곳에서 동료환자이자 의대생이던 로베르트 클롭슈토크를 알게 되어 친교를 맺는다.

1921년 (카프카 37세) 8월 말 다시 프라하의 생활로 돌아가 두 달 정도 직장에 근무하다가 다음 해 은퇴할 때까지 장기가 휴가를 얻는다. 10월초 밀레나 예젠스카에게 10년간의 일기를 모두 건네준다. 일기를 새로 쓰기 시작한다. 이어 막스 브로트에게 자신의 사후에 발견되는 모든 원고를 불태울 것을 부탁한다. 1922년 11월에도 같은 사안을 재차 부탁한다.

마지막 장편소설 <성> / 카프카의 연인들 / 막스 브로트



1922년 1월 (카프카 38세) 불면과 절망으로 신경쇠약 증세를 보인다고 일기에 토로한다. 1월 27일 체코 북부 리젠 산맥의 슈핀델뭘레에서 3주간 요양하면서 마지막 장편소설 <성>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2월 17일 요양에서 돌아와 단편 <첫 고통> <단식광대> <어느 개의 연구> 등을 집필한다. 7월 1일 14년간 재직한 회사를 그만두고 연금생활을 시작한다. 8월 말 다시 신경쇠약 증세가 나타나 여름에 프라하 서쪽의 플라나에서 요양생활을 하면서 그곡에 있는 여동생 오틀라의 여름별장에서 거주한다. 10월 밀레나 예젠스키를 만나 <성>의 원고를 넘겨준다.

1923년 (카프카 39세) 병상 생활이 잦아진 상황에서 시오니즘에 더욱 열의를 보이며 히브리어 공부에 집중한다. 4월 학창시절의 친구 후고 베르크만의 방문을 받고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7~8월 여동생 엘리의 네 가족과 함께 발트 해 뮈리츠로 여행을 떠나는데, 이 여행에서 열다섯 살 연하의 마지막 연인인 유대계 폴란드인 도라 디아만트를 만난다. 그녀와 함께 텔아비브로 이주해 식당을 운영할 계획까지 세우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9월 24일 도라 디아만트와의 동거를 위해 거의 평생을 머물렀던 프라하를 떠나 베를린으로 이사하고, 단편 <작은 여인>과 <굴>을 집필한다.

1924년 3월 17일 (카프카 40세) 건강상태가 악화되어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를 프라하로 데려온다. 카프카는 마지막 작품 <여가수 요제피네>를 집필한다. 4월 폐결핵이 후두 부위까지 진전되었다는 진단을 받는다. 카프카는 점차 말하는 능력과 음식물 섭취 능력을 상실했다. 남부 오스트리아의 비너발트 요양소를 거쳐 4월 19일에 빈 북쪽 키얼링 시의 호프만 요양소로 옮겨져 생애 마지막 시간을 보낸다. 마지막 연인 도라 디아만트와 1920년부터 친교를 가졌던 의사 로베르트 클롭슈토크가 카프카를 간호한다. 요양소에서 마지막 작품집 <단식 광대>의 원고를 교정한다. 이 작품집엔 <첫 고통> <작은 여인> <단식 광대> <여가수 요제피네> 등이 수록되었고, 그 해 8월에 디 슈미데 출판사에서 출간된다. 6월 3일 호프만 요양소에서 마흔 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6월 11일 프라하의 신유대인공동묘지에 안장된다.



P.S <소송> 문학동네 프란츠 카프카 연보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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