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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훌리아 Sep 27. 2015

옛날에 대하여 - 마지막 왕국2

Dernier royaume, Tome 2 : Sur le jadis

옛날에 대하여 - 마지막 왕국2
Dernier royaume, Tome 2 : Sur le jadis



파스칼 키냐르의 글은 느껴지는 데로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것이었다. 내가 옛날에 대해서 무심결에 꺼내놓은 이야기가 언제를 가리키는 옛날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가 말해주는 과거-옛날-신화-시간에 대한 진실을 조각내어서 읽었다. 이해할 듯 못 할 듯 그렇게 머릿속에서 떠돌았다. 이런 책의 장르는 어디에 속하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인류의 언어-사회-소설-예술은 과거-옛날-신화-시간이었고 퇴적하듯 하나의 의미를 반복해서 알게 했다. 우리에게 잊혔던 것들의 기원에 대해 알려주는 듯했다. 어려웠다. 이 책을 잃어버린 듯이 읽었지만 끝이 없는 책이었다.

여기가 어디인가? 다른 세계에 온 것일까? 다른 세계에 닿았는가? 알몸을 힘들게 밀어내며 느끼는 단순한 옛날. 앞으로 나아가는 그곳을 더럽히지나 않을까 살핀다. 신이 거기 있다는 느낌. 공기가 너무 순수해서 고통스럽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완전히 새로워진 아주 오래된 것, 천연 상태의 습관성, 갓 부화해서 헝클어진 기원 같은 것이다.(p144)                                    



                                                                                                                                   

#1 과거여인의 발견, 접촉, 쾌락, 욕망, 수태, 찢어내는 영원.... 사랑에 빠질 때마다 우리의 과거는 바뀐다. 과거란 그런 것이다. 과거는 바꿀 수 있지만 옛날은 바꾸지 못한다. 과거는 우리가 태어나면서 배운 언어에서 생겨난 새로운 기관이다. 과거는 현재라는 눈을 가진 거대한 육체이다. 과거의 사건들 모두가 그 안에 깃든 낯선 이타성과 동시대적이다. 발자취가 계속 늘어난다고 말해야 한다. 행복-연륜, 쾌락의 반복, 쾌감의 재생산-이 높아진다고 말해야 한다. 현재는 과거를 취한다. 과거는 꿈의 시간이다. 자궁 속의 삶처럼 지나간다.#2 옛질료, 하늘, 땅, 생명은 영원토록 옛날을 구성한다. 사람은 누구나 옛날 Autrefois에서 왔으며, 선행하는 다른 한 번이 이미 다른 한 번이라는 사실로 인해 다시 한번 그리로 되돌아간다. 옛날이란 완결될 수 없는 출발이다. 오직 옛날만이 과거를 으깨서 그 질료를 원래의 유동성으로 환원시킨다. 우리는 낙원의 여파 속에서 일어나는데, 그 낙원의 이름이 옛날이다. 자궁 속의 세계 이전의 다른 절대 세계, 태아로서 어린애가 체험했던 세계보다 앞선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 환각이 아닌 상상의 세계, 원초적 이성애적 장면의 세계가 있다. 즉 옛날이다. 옛날은 비시간적인 무엇, 시작하는 '만물-보다-앞선-것'으로서 끝이 없는 것이다. 최초의 왕국.#3 신화인류의 시원始原에 있는 바위 근처에 있었다. 그저 글자 형태에 불과한 것에서 추억이 떠오른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쪽으로 가는 거다. 신화야말로 사회의, 생식의, 시조의, 번식의, 순환의, 책력의, 계절의 목적에 맞춰 끊임없이 사람들을 재조직하게 만드는 귀속의 증거이다. 신화의 시간은 지나갔고, 제우스의 정원처럼 고요하고 회의적이다. 모든 신화가 시작 이전의 그날 밤과 관련된다.

과거는 짝 잃은 것을 짝짓게 한다. 동화처럼, 동화에서 얻는 기쁨처럼, 옛날이 현재로 귀환한다. "그러했다'가 여기 존재한다. 모든 것을 밝혀주는 '옛날', 그런 게 신화이다.(p46)  행복은 과거에 속하고, 기쁨은 옛날에 속한다 (중략) 행복이 증가한다. 기쁨이 솟아오른다.(p83)  하나의 방향만을 지닌 것은 모두 회귀를 상정한다. 옛날의 안식처(p85) 이브와 아담이 알몸으로 나무숲 속에서, 뱀들 옆에서, 열매를 고르면서, 나뭇잎들을 어루만지며 느꼈던 최초의 행복.(p119) 죽은 자들은 과거를 규정한다. 신들은 기원을 규정한다.(p169)   



                                                                                          

#4 시간시간은 수직의 선이 아닌 타원이었다. 죽은 자가 고인이 되게 돕고, 고인이 조상이 되게 돕고, 조상이 비 개인화되고 신의 질료로 환원되어 귀환할 때까지 도울 필요가 있다. 비로소 지워진 그 이름이 새로운 이름의 원천에서 태어날 것이다. 시간이란 사계절로 이루어진 하나의 원이었다. 가장 오래된, 기억할 수 없는, 사고의 빈칸들인 흔적들의 하얀 초시간성. 시간이 하얘진다. 시간 자체가 겨울의 색깔을 고백한다. 시간의 매 순간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장소이다. 시간은 '이곳'을 찢으러 올 뿐 가져다 주지 못한다. 시간은 밀려드는 본래의 무엇이다. 아무도 볼 수 없지만 어디에나 있는 그것은 시간이다.#5 기원 진실의 근원은 알몸이다. 기원에 근접하는 기쁨을 느끼려면 기원의 기억이 있어야 한다. 자연은 우리 내면에 원천을 재현한다. 숲과 산은 전前 언어적으로, 전 문화적으로, 전 인류적으로 문득문득 알아보는 어머니이다. 그것은 알아봄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해체된 음절 그대로 다시-함께-태어남이다. 발견을 반복하기. 출생 이전에, 삶 이전에, 존재들 이전에도 태양빛이 솟았다. 그날에 앞선 하루, 시간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어떤 하루가 있었다. 원천이 되는 빈칸.#6 언어우리는 태어나기도 전에 살았고, 보기도 전에 꿈꾸었다. 대기의 존재가 되기 전에 들었다. 호흡하기 전에 언어와 접했다. 언어는 사라진 것의 유일한 부활이다. 언어는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의 집이다. 타고난 상상력(꿈)은 언어의 기초가 된다. 언어는 모든 면에서 혁명적이다. 언어의 영향권에 있는 것은 모두 지겨운 것이다. 언어를 버리고 시간에 합류할 수 없으므로.. 언어의 개입으로 영혼에는 더 이상의 순수 현재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죽은 자들이 말을 하는 곳인 언어.#7 사회사회란 동물적 형태 그리고 사회의 재생산을 위한 끊임없는 분리의 잔혹성을 가리는 얇은 베일에 불과하다. 사라진 시간에게 기별하는 것은 사라진 시간이다. 여자와 남자들은 성에 의한 단락에 의해 아오리스트-그리스어 동사 시제로서 명확한 시점을 밝히지 않는 과거-적 삶을 살게 된다. 무한한 탄식과 더불어 언어로 인해 상실된 것의 노래를 부르게 된다. 끝없는 지배의 쾌락을 좋아하고 이득의 뿌리칠 수 없는 유혹에 굴복하고 온갖 쾌락의 무한한 추구를 탐하고 죽음의 영원한 침묵에 매혹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증오, 모방, 허구, 종교, 역사, 학살, 야수성 등을 목격한다.

인간의 '언어-사회'에 의해 구축된 시간은 죽음 또는 원천源泉-천체, 식물, 동물, 사회, 총체-의 효과다. 인간의 존재 내부에서 시간이 주기를 버리고 그것을 계보가 드리운 그림자 같은 선, 개인의 죽음의 수평선 같은 선으로 대체한다는 것이다(p86) 모든 계절은 시간을 돌아오게 하는 데 쓰였다. 즉 어둠 속에서 태양이, 겨울 안에 식물이, 하늘에 지지를 나타내는 별자리가, 이주에 철새들이, 소생하는 식물 속에 작은 곤충들이, 죽음 속에 조상의 재생이 나타나게 하는데 쓰였다(p114)                                      



                                                                                                                             

#8 소설소설을 읽을 때마다 우리의 과거는 바뀐다. 무아의 경지에서 쾌락을 느끼게 하는 것이 바로 소설의 힘이다. 시간과 관련된 황홀경 중 하나다. 솟구치는 옛날로 돌아가는 것이다. 기쁨을 느끼는 자는 범람하는 시간의 원천 속에 완전히 다시 잠기고 있는 자이다. 학식 있는 자는 오랜 세월이 흘러도 고대인들의 작품을 읽는다. 그렇게 해서 개인의 삶은 기원 고유의 힘으로 보강된다. 책은 말을 하는 죽은 자이다. 독창적이라는 것은 기원에 가깝다는 의미이다. 더 이상 바라보지 않으면서 바라보기'라는 게 있는데, 그것이 독서이다.#9 예술예술이란 이미 존재했던 거의 메아리로 정의된다. 선배를 불러들여 그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죄다 창조하게 만든다. 과거의 대가들은 후배들을 두려워한다. 후배들이 자신들보다 더욱 기원적이리라 예감한다. 예술은 끊임없이 다시 자라는 발톱을 깎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술은 절대로 습득된 언어에 속하지 않는다. 예술은 비의미론적이다. 예술은 옛날 같은 것이다. 수천 년 혹은 수 세기 전에 사라진 것을 다시 솟아나게 하는 기쁨, 사라진 것의 화신과 다시 만나는 느낌, 존재를 멈춰버린 것에 대한 향수, 옛날의 현현顯現.#10 자신의 왕국우리는 꺼져버린 아궁이에서 꺼낸 재 같은 존재이다. 어떤 열매도 꽃들을 본 적이 없는 법이다. 얼굴의 예전이 사람들의 세대들을 누비며 떠돌고 있다. 사고는 연속적이 것, 삶, 끝없는 옛날을 되찾고자 솟아 나온다. 어머니는 우리를 태어나게 하고 죽는다. 어머니는 모든 출현에 앞선 존재이다. 우리는 육신에서 태어난 육신에서 태어난 육신에서 태어난...... 육신에서 태어났다.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우리 모두의 기원인 까마득한 심연.... 충동, 박동, 이 두 가지가 멈추면 삶도 멈추게 된다. 노인-어린애의 왕국. 마지막 왕국.

나는 지금 세월에 묻히고 시대가 변해 구식이 된 문장들을 베끼고 있다.(p23) 그런 이야기들을 내가 지금 다시 베껴 쓰면서 왜 이토록 마음이 기쁜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p27) 예술 안에는 이 세계에서 끌어낼 수 없는 무엇이 떠돌고 있다. 그것은 순수한 새것으로 피어나는 유일한 개화이다.'계절과 무관한 개화'-인간의 성이 계절성을 떨쳐버린 것과 마찬가지이다.(p146)                                    


        

                                                                                                                      

현재는 과거이다. 우리는 과거이며 옛날로 환원되어간다.  모태로의 회귀는 진실을 말하고 있지만 발화 내용이 꿈, 환영-시간 안에서 불가능한 현실-이다. 사실이 되지 못하는 절대 옛날. 우리의 내면에 어둠과 하늘의 한복판에 도무지 알 수 없는 시간, 너무 오래된 시간이 있는 탓에 그것을 드러낼 도리가 없다.  생명력(혼)은 옛날이 산으로, 깎아지른 암석으로, 돌풍으로, 고목으로, 절벽으로, 시선으로, 책으로 변해서 경계를 넘나들며 떠도는 힘이다. 우리를 만들어낸 힘이다. 끊임없는 나가기, 리비도, 에로스, 밀쳐 냄, 외출하기, 분출하기, 솟구치기.... 우주 자체도 하나의 미는 힘이다. 완전히 사라진 것이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다. 어둠이 먼저이고, 빛은 나중이다. 별들의 공간에서 아오리스트-명확한 시점을 밝히지 않는 과거-적이다.

오직 하나의 원천이 있다. 동물들보다 선행했던 생명에 선행하는 하나의 태양이 있을 따름이다. 그것이 내가 옛날이라 부르는 것이다.(P299)




18개월 동안 죽음에 가까운 병마와 싸우면서 저술한 <떠도는 그림자들>로 2002년 콩쿠르 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연작소설 형태로 발표한 <마지막 왕국> 시리즈 첫 번째 작품 <떠도는 그림자들>이다. 아직 만나보지 못 했다... <옛날에 대하여> <심연들>을 먼저 읽게 되었다. 키냐르는 삶의 근원을 향한 집요한 탐색으로 일관하고 있다. 바닥없는 심연으로 깊이 들어가서 끌어올린 것들은 내가 알 수 없었던 막연한 것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마지막 왕국> 시리즈는 그의 철학적 사유와 담론이었다.

'옛날'과 옛날 이후인 '과거'. '과거-현재-미래'라는 일정한 방향성을 지닌 시간개념은 사회가 우리를 안심시키려고 고안해낸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이 키냐르의 생각이다. 그가 제시하는 진짜 시간이란 방향성이 없이 양 끝만 있는, 흐르지 않고 제자리에서 돌며 수직으로 쌓여가는 그런 시간이다.(P368)




작가는 생존을 위해서 책을 읽고 글을 쓴다고 한다. 독서는 들숨이고 글쓰기는 날숨이다. 숨 쉬듯이 써내려온 글들은 그의 세월의 부피만큼 출간된 책들의 수도 늘어났다. 그의 작품 세계는 옛날에 대한 미세 담론이 모여 이루어진 옛날에 대한 거대 담론이라는 사실을 나도 어느 정도 느끼고 있다. 이 세계에 접속하고서야 아주 조금 가까이 다가갔음을 느낀다. 번역자 송의경씨는 그의 작품을 번역하다가 죽게 되리라고 믿은 적도 있었다-란 말이 짠해져왔다... 옛날 옛적에...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했다. 다만 내가 읽었다는 기록(메모)에 지나지 않았다. 단락을 나눌수도 없이 이어붙여야만 했다... 다음에 꼭 다시 새롭게 이해하고 싶다.    




By 훌리아

보리차를 유리글라스에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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