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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훌리아 Oct 01. 2015

심연들 - 마지막 왕국3

Dernier royaume, Tome 3 : Abimes

심연들 - 마지막 왕국3
Dernier royaume, Tome 3 : Abimes



기록처럼 되어버렸다. 부분 부분 필사는 그림처럼 그려졌다.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했다.  앞서 읽은 <옛날에 대하여>는 하나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층층이 쌓아 올린 탑이었다면 <심연들>은 그 탑들이 하나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거슬러 올라가는 것, 뒤돌아 보는 것이었다.



키냐르 자신도 어디까지 해석할지 모르며 확실하게 말한 것은 없다고 한다. 세상을 후회한 적도 옛 시대에 살고 싶은 갈망도 없었다 한다. 다만 언어를, 언어 잔해들을 생기게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래서 더 나은 무형, 그래서 허기, 그래서 변형, 그래서 질문, 그래서 호기심, 그래서 대담, 그래서 탄력, 도약하다, 출발하다, 발생하다에 가까워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하늘처럼, 별들처럼, 물질처럼, 생生처럼, 자연처럼, 성性처럼, 계절처럼 의식하지 않았던 영혼의 순환을 느껴보는 시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심연A-byssos는 아오리스트aoriste다.
바닥 없음은 무한과 같다.



『 너무나 근원적인, 너무나 성적인, 너무나 치명적인 그의 생각을 관조하기 위해서는 극도의 노력을 해야한다. 독서하는 자는 더 옛날의 호숫가에 서있는 동물 같다. 라틴어 vis-힘, 몸에서 튀어나온다, 격렬함, 탄생 또는 웃음....-를 지극히 사랑했다. 프랑스에서 고어로 글을 쓰는 나이 든 작가들 대부분을 흠모했다. 읽으며 호흡의 박자를 미리 가다듬지 않고서는 일절 쓰지 않았다. 사랑을 잘 못하고, 감상을 선호한다. 』



여기서 그는 누구를 말하는 것이었을까? 키냐르 자신인가? 키냐르가 옛날을 읽듯이 내가 키냐르를 읽는다... 자신의 시선을 섬세하게 그려냈고 거기서 보았던 빛으로 나를 끌고 들어가는 듯했다.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과 우주, 생물계의 성장기와 노화, 죽음, 시간의 축적, 언어, 옛날, 과거, 사회, 미래 등을 이야기했다. 그는 기원전 116년 로마에서 태어난 바로 Varro 같은 사람이다. 읽고 쓰면서 불 쇠를 두드리듯 인생을 연마한다. 자신의 서재에서 늙어갈 것이고 여전히 살아있으면서 유령 같고 과거에 대한 애착이 깊다. 유언으로 검은 포플러 나뭇잎으로 덮은 벽돌관에 넣어달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어둠 속에서 서로를 탐하는 무의미한 행복보다는...
파도처럼 다시 나아갔다가 더는 못 참겠어서 다시 이는....
그 파도도 모래밭 끝을 축축이 적셨다가 힘이 쇠하여 물러가는....


         

암흑....
아무것도 빛나지 않는다.
소멸하는 음성사이로 둔탁하게 퍼지는 자간의 공명미
숨 막히는 기이한 빛
힘든 순간 찾아오는 새벽
불쑥 찾아든 희미한 빛
밤을 부르는 것인지, 낮을 부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광채
먹먹한 빛, 무엇조차 아닌 빛, 존재 이전의 빛
맑은 물에 반사되는 태양빛처럼 반짝이는
우리는 그 한줄기 반사광에 불과하다.  
길을 달려오는 소멸하는  빛......
태양 아래 살기 전, 우리가 살았을 그런 물
저먼 옛 자신과 혜후 하는 환희, 본성의 회귀
검은 물, 검은 우유, 태고의 수액


                                                                                                                 

키냐르는 아주 먼 태고를 그린다. 말하는 인간이 동굴 벽화를 그리기 이전을 그린다. 언어로 찢어놓기 이전의 것들을 보여준다. 그저 자연, 기상, 천체 일부분으로서 순환하고 있음을 느끼도록 해준다. 인류는 언어의 틀에 맞춘 듯 언제나 심연의 가장자리에 머물 뿐임을 느꼈다. 심연 그 자체로 통하는 길이 무엇인지 의미해야 했다. (1) 존재하지 않는 것을 그리는 것과 (2) 그릴 수 있는 것을 그릴 수 없는 것에 옮기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두 근원을 알아야 했다. 심연은 자아와 타자 사이에서, 고대와 근대 사이에서 벌어진다. 아찔한 심연.

                                        

(1) 태생 동물 : 보이지 않아야 비밀스러운 섹스
(2) 인간 : 보이지 않아야 비밀스러운 언어 (언어로 말해져 버리면 공시적일 수 있는 것을 잃는다)


진정한 질문자는 결코 답을 내어서는 안된다. 모든 이미지 밑, 태반 속, 그 상태에서 상상할 수 없는 우리가 재생산된다.  멈추지 않고 끝없이, 마감 없이, 경계 없이, 지평선 없이 새롭게 미분한다. 열정에 사로잡힌 자가 그를 사로잡는 것에 함몰되어 있는 지경이다. 독서에 함몰되어있는 독자다. 나다... 키냐르가 말하는 것을 나는 조각내어서 읽었지만 그것은 결국 심연으로 이어진다. 그가 방랑적 탐색한 것들이 서로가 서로를 넘나들도록 했다.




시간의 두 조각은 남과 여다. 시간은 축적되고 욕망은 증가한다. 시간은 왕복운동, 방향 없는 분열일 뿐이다. 우리는 '먹이'고 시간은 포식한다. 인간이 지각하는 방식으로서 인간 시간을 만들어낸다. 인간의 시간은 옛날이면서 지금이다. 시간의 본질은 무아지경 상태이다. 인간의 시간 회복은 밤이 낮을 돕고 죽음이 생을 돕는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사별의 고통을 겪는 기묘한 시간 구조다. 보이지 않는 시간인데, 우리는 저 심연 속에 벗은 채로 있다.

욕망이 다시 태어난다.
시간이 다시 태어난다.
봄이 다시 태어난다.
분리가 다시 태어난다.
차이가 다시 태어난다.
그 근원부터 역사는 시간의 상소인이었다.
탄생이라는 제1경험(어머니와 아들)이 재생되어 그러는 것.
모든 생명은 시간의 종말을 맞는다.
모든 탄생은 세계의 창조 이후부터다.
한쪽에서는 세대의 종말이, 한쪽에서는 세계의 기원이...
주기적 종말, 재생이 원천이다.



언어의 결과물은 주어진 것을 다 찢어서 구분시키고, 항 대 항으로 양립시킨다. 언어는 시간들의 선별 기구이며 신화이다. 시간의 기원은 그 어머의 아비가 있고 이름과 성이 있어야 한다. 과거, 현재, 미래 3분법 언어 자체에는 무의지적 자연언어가 결코 없다. 소리를 분절한 것에 불과하다. 글자로 소리를 적는 통에 산통이 깨진다. 신경성, 우울증, 브레이크 다운의 심연들은 언어 축에 따라 생긴다. 세계의 모든 이야기 주인공들은 도시를, 예술을, 관습을, 언어를, 도구를, 요리를 만든다. 에고포르들의 세계는 심연의 선 가장자리...

**

에고포르 egophore... 대화체에서 각자의 '나'의 증여는 각자의 '너'를 야기한다.

경험 속에서 끌어 들인 것
쾌락 그것은 몸에서 상실된 욕망을 발견하는 일
동물적 본성의 영역, 은밀한 영역, 소유욕의 영역을 언어가 슬쩍 건드린다.
듣고 싶어 찾는 단어들이 깨우는 이 틈 혹은 이 심연...
문장은 당장 한 세계가 된다.
밤은 하늘의 바닥이다.
별들이 낙하하는가 싶더니 검은 먹의 문자들이 낙하한다.
우주는 첫 책이다.
태양은 그것을 읽는 첫 눈이다.
엄마 음문 밖을 빠져나온 갓난아기처럼
인간 언어들에다 끝없이 먹은 것을 게운다.
오, 지난 것이여!



상실한 것들 침묵의 시간들은 땅 밑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 볼 수 없는 여기, 우리가 한때 있었던 거기, 무너져 내리는 모래처럼 모든 정체성을 잃고 마는 침울한 자들을 부르는 여기로 향한다. 자살 취향은 현대로 재귀(낭만주의자, 테러리스트, 종교인)한다. 귀환이 귀환 자체에서 파국을 맞듯.... 죽음의 구멍이 곧 생의 구멍으로....                                                                                                                               

칠흑은 밤을 말한다.
두개골은 죽음을 말한다.
깨진 벽돌은 시간을 말한다.
밤에서 태양을 엄습하는 주기적 종말을 보았다.
죽음에서 암수 생명체들을 엄습하는 종말을 보았다.
시간에서 존재를 해하는 파편을 보았다.
우리는 옛 희미한 빛 속에 몸을 말고 있다.
우리는 이름 모를 왕국에 우리가 꿈꿀 무아지경의 구멍을 판다.
우리의 유일한 나라는 멸국滅國이다.


                                                                                                                       

옛날의 힘은 반복의 힘이다. 시간의 맨 밑바닥에서 반복되는 힘... 모든 것이 온다. 옛날 결코 보이지 않는 첫 장면이다. 현재는 벌써 옛날이다. 처절한 상실이다. 첫 여행은 태어나기다. 자궁 속과 빛 속 사이 왕복, 옛날과 지금의 왕복. 옛날을 꿈이라 했다. 결코 늙을 수 없는 옛날. 파도 치게 만든 것은 절대 과거다. 태고이다. 태고는 무형의, 무정의 무한의 막막한 부정과거다. 그것은 시간의 밤이다.         

유적과 탐구는 같은 얼굴이다.
제 나온 구멍 앞에 있는 아이
자연 앞에 있는 물리학자
우리가 버리고 나온 것은 절대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
무궁한 유적을 앞에 둔 버릴 수 없는 탐구.
우리는 모태의 밤 속에서도 살 수 있는 자들에서 파생된 자들이다.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눈을 뜬다.
무슨 소리가 끊임없이 말하지만,
혼 중에 끊임없이 헤매는 것,
눈이 보지 않은 것,
귀가 듣지 않은 것,
인간의 심장에서부터 올라오지 않은 것이 몰려온다.
우리 육신이 그 유적이다.
우리 나신이 태고의 그 어떤 것을 기억한다.



과거란 인간사에 불과하다. 근대란 거세와 길들이길 정의한다. 사냥꾼이 신하가 되고, 늑대가 개가 되고, 들소가 소가 되고, 멧돼지가 돼지가 되었다. 새벽 지대, 과거라는 이름의 지대이다. 태양을 따르고 우리는 멈추고 먹이가 있는 곳 곰들과 순록 사이에서 살았다. 과거는 앞선 2~3세대와 공유된다. 그것은 살아남기의 삶이다. 생명과 재산을 후손에게 물려주고 후손은 보존한다. 탄생을, 성을, 이름을, 노래를, 노고를, 봄을, 발육을, 호칭을, 기도를 되돌아오게 하는 일이다. 우리에게 흘러들어오는 것을 거슬러 올라가면 태고이다.

만일 한 시대가 그 시대를 앞선 계절들과 거기서 퍼진 햇살을 받아 맺힌 열매로 평가되는 것이라며,
지금 계절이 최고로 아름답다 할 거이니, 세계 기원 이래 줄곧 무르익어와서다.

매 시대가 최고로 경이롭다.
매 시간이 최고로 깊다.
매 책이 최고로 고요하다.
매 과거가 최고로 흘러 넘친다.



역사는 항상 비열함을 선호했고 나쁜 것과 강렬한 것을 혼동한다. 인류를 흥분시키는 것, 살육! 맹수를 흉내 낸 극악. 사회는 해를, 자연순환을, 악순환을 계속한다. '악순환'이 역사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들이 보지 못하는 리듬을 반복해서 전개하고 있을 뿐이다. 점점 전쟁과 휴전이라는 주기를 따르게 되어 있다. 우리는 하늘에 눈길을 던지지만, 그 하늘은 이미 오래전부터 거기 없었다. 우리가 하늘을 본 이래로.. 모든 사회가 두려워하는 것은 사회의 해체이고 상시 가능 상태다.

더 종교적이고, 더 신화에 열광하는 사회, 과거의 반영에 자아 도취되는 사회.
시간을 넘나드는 텅 빈 외피 둘레를 끝없이 도는 양 떼, 뿔 짐승들, 꿈들.
예수의 집에서 아랍어, 히브리어, 그리스어가 아닌 개선문과 십자가로 대표되는 박해 언어에 불과한 로마인들의 언어가 말해질 자격을 얻었으니 대경실색할 노릇이었다.
왜 바이킹족드른 그들 역사와 아무 상관없는 사어에 덜미를 잡혔는가?
아스텍인들은 라틴어로 접어들었다.
중국인들은 인도 및 이방 문명을 퍼갔으며,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의 문명을 강탈했고 중국 동부 관문들의 상관을 털었다.

국가는 국민을, 어린이를 미래에 복종하게 만드는 의무 교육을 통해, 의무적 미래에 몸 바치게 한다.
지금 이런 것'에서 '한때 그랬던 것'을 바라보며 씨까지 다 말리고 싶은 증오.

세계는 역사로 말미암아 과거가 없어졌다.
그리고 과거로 말미암아 태고가 없어졌다.


                                                                                                                        

미래가 과거의 외양을 띠는 이유 자연환경 앞에서 물러나지 않지만 모든 사고 환각 앞에서는 자리를 양보하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해 바랄 수 있는 비 예견성의 최대치는 과거의 잔향이 얼마나 활성적인가에 달려있다. 탄생은 시간의 유일한 시원성이다. 단 하나의 날짜가 솟는다. 이 날짜로 시간이 찢어지고, 사후성이 생기고, 언어 한가운데서 보이지 않는 과거(고인)와 언어 없는 미래(어린이)가 양립한다. 미래란 다시 태어나는 일 그 이상은 아니다.


                                                                                                                   

오로지 신들만이 귀환을 완수한다.
그 바닥 없음(심연)에서...
그 정한데 없음(오리스트)에서...
그 보이지 않음(하데스)에서...




                                                                                                                     

키냐르는 생각했다. 땅의 존재에 다가올 무無, 이해할 수 없는 단 하나의 명사 '나라國', 수수께끼 같은 그 시대들 소리- 활, 바이올린, 한자어, 산스크리트어, 그리스어, 라틴어- 그는 현재를 파악하겠다는 생각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는 콩트 Conte에 더 많이 끌렸다. 우리한테는 유머 가득한 이야기 장르로 인식하지만 서양에서는 단편소설보다도 짧은 엽편 소설이다. 나뭇잎 위에 적어도 좋을 정도의 짧은 이야기를 뜻한다. 그가 바라는 늙지도 않고, 방향도 없고, 충동적이고, 발작적이고, 짧고, 간략하고, 상象만 던져진, 요약된, 검은, 튀는, 곡기가 되는, 묘연한 어떤 것이 콩트에 있다.



키냐르는 내가 생각해보지도 못한 곳을 넘나들었을게 분명하다. 모든 작가가 그럴 테지만... 그가 방대한 자료 앞에서 느낀 점이 인상 깊었다. 전문성이 늘어났고 한 대상에 대해 분명해지면 분명해질수록 그 영역은 더 제한되고, 실질적, 국제적 참고 자료들은 더 많아졌다고 한다. 학문은 갈수록 더 도덕적이고 동떨어지고 금기이고 비현실적인 어떤 형물이 되었다 한다. 과거의 사람들에겐 아무것도 아닌 것이 21세기의 지식은 컴퓨터 하드디스크 방에 나뉘어 들어가 서로 넘나들지 못한다고 느낀다. 자신의 고유의 호기심은 문이 이미 닫혀있고, 경계가 있고, 증가하면서 더 공고해지고, 벽이 생기는 머리들과 충돌했음을 말하며 자신의 실제 상태에 놀랐다고 한다.



그의 생각은 하늘 끝과 바다 끝에 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들을 가늠해보려고 애쓴 정도다. 무슨 이야기를 더 이어서 말하려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늘어나는 지식? 그런 것은 없다. 비례해 모르는 것이 더 생기면 생기었지... 지난 것, 지나진 것, 지나는 것의 끈을 약간 풀어주기... 우리를 우리로부터 해방시키기... 과거와의 관계로부터 본 것, 오묘하고도 가련하고도 힘든 일을 나도 이해했을까?



By 훌리아

보리차를 유리글라스에 담아...

http://roh222.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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