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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훌리아 Aug 12. 2021

<문학이란 무엇인가> 장 폴 사르트르

우리는 이 시점에서 과연 무엇을 위한 문학인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1.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화가, 음악가


모든 예술에 동류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색채와 소리를 가지고 작업하는 것과 말로 표현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음조와 색채와 형태는 기호가 아니어서, 외부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지향하지 않는다.

순수한 소리라는 개념은 하나의 추상에 불과하다.

의미가 전혀 배어 있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순수한 성질이나 감각이란 없다.

그러나 어떤 성질이나 감각에 깃들여 있는 어렴풋한 작은 의미, 가령 가벼운 기쁨이나 수줍은 슬픔 따위는 그것에 내재해 있거나 또는 그 주위에서 마치 아지랑이처럼 바르르 떨고 있는 것이다.

그 작은 의미가 바로 색채나 소리 <그 자체>인 것이다.

누가 풋사과의 빛과 그 새콤한 기쁨을 구별할 수 있겠는가?

<풋사과 빛의 새콤한 기쁨>이라고 이름 붙인다면, 그것이 벌써 지나친 표현이 아니겠는가?

오직 초록색이 있고 붉은색이 있을 뿐이며, 그것이 전부이다.

그것들은 사물이며,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

예술가에게는 색채도 꽃다발도 찻잔 받침에 부딪히는 스푼의 소리도 최고도로 <사물>이다.

예술가가 색채와 소리를 <언어>로 생각한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것이다.

화가는 그의 캔버스에 기호를 그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물을 창조하려는 것이다.

어떤 영혼, 어떤 동기로 창조된 물체들이 화가의 분노나 고뇌나 기쁨을, 말이나 얼굴의 표정처럼 나타내는 것은 결코 아니다.

거기에는 도리어 그런 감정들이 배어들어 가 있는 것이다.

그 감정들은 뒤섞이고 흐려져서 이미 아무도 그것을 알아낼 수 없게 된다.

한 선율의 의미 역시 선율 그 자체를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상념들과는 다르다.

선율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을 항상 넘어서거나 또는 그것에 못 미친다.

창조된 테마의 근원을 이루었을 그의 정념이 음조에 녹아들어서 그만 변질되고 흐려졌기 때문이다.

고통의 외침은 그 외침을 자아내는 고통의 기호이다.

그러나 고통의 노래는 고통 그 자체인 동시에 고통과는 다른 어떤 것이다.

실존주의적 용어를 빌려 쓰자면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고통이 아니라, <있는> 고통이다.


피카소의 <게르니카의 학살>


피카소의 기다란 어릿광대들, 아리송하고 영원하고, 해독할 수 없는 뜻이 배어 있고, 구부정한 그 체구와도 또 그 운동복의 색 바랜 마름모골과도 떼어놓을 수 없는 그 모습은, 육체화된 감정, 압지가 잉크를 빨아먹듯이 육체가 빨아먹은 감정이다.

그것은 이제 알아볼 수 없게 되고 행방불명이 되고 스스로 낯설게 되고 사방으로 찢겨 있으면서도 여전히 거기에 현존하고 있는 감정이다.


화가의 자비심이나 분노는 다른 대상들을 만들어낼 수도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감정은 여전히 대상 속으로 녹아들어 이름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며, 우리 눈앞에 남는 것은 오직 정체불명의 영혼이 깃든 사물들뿐일 것이다.
우리는 의미를 그림으로 그릴 수도, 음악으로 꾸밀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 이상 감히 화가나 음악가에게 참여하기를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 ,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p17




시인과 작가



화가나 음악가와 다르게 작가가 다루는 것은 <의미>이다.

기호의 왕국은 산문이며, 시詩는 회화, 조각, 음악과 같은 편이다.

시는 산문과 똑같은 방식으로 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시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보다는 차라리 시는 말을 섬긴다고 하고 싶다.

시인은 언어를 <이용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시인은 진실을 가려내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으며, 세계를 명명命名하려고도 생각지 않는다.

시인은 단번에 도구로서의 언어와 인연을 끊은 사람이다.

기호로서가 아니라 시인은 말을 사물로서 본다는 시적 태도를 단호하게 선택한 사람이다.

말에는 양면성이 있어서, 우리는 마치 유리를 투시하듯 우리의 마음대로 말을 가로질러 의미되는 사물을 쫓아갈 수 있다.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대상 가까이 있으며, 말에 길들여져 있다.

말은 유용한 관례이고, 차츰 소모되는 도구, 쓸모없게 될 때는 내던져버리는 그런 도구이다.



인간의 세계 & 사물의 세계


시인은 말을 거꾸로 본다.
마치 자기는 인간 조건에 속하지 않는 존재인데, 인간세계로 다가오니 우선 말이라는 장애물을 마주쳤다는 듯이... 시인은 먼저 이름을 통해서 사물을 인식하는 대신에, 우선 사물들과 무언의 접촉을 하고, 그다음으로 말이라는 하나의 사물 쪽으로 돌아서서는 그 말들을 건드리고 더듬고 만져보는 것 같다.
그리고 거기에서 어떤 고유의 작은 광채를 찾아내고, 또 땅과 하늘과 물과 창조된 모든 것과의 독특한 유사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말들은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자생적인 것이기 때문에, 말들이 사물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방대로 사물들이 말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시인으로서는 그 판정이 불가능하다.

사르트르 <시인의 말>



말에 언어적 통일성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의미밖에 없다.

시에서는 의미도 역시 자연적인 것이 된다.

말속으로 흘러들고 말의 음색이나 모습에 의해서 흡수되어 어두워지고 흐려진 의미는 그것 역시 자생적이며 영원한 사물이다.

시인에게는 언어는 외적 세계의 구조이다.

시인은 언어 밖에 있다.

시인에게는 언어가 온통 세계의 거울인 것이다.

언어는 사물들 그 자체가 되었다.

사물들의 어두운 핵심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다.

시인이 그러한 소우주의 몇몇을 함께 엮을 때 그는 화폭 위에서 여러 색깔을 배합하는 화가와 똑같은 일을 하는 것이다.

시인이 진실로 하는 일은 한 대상의 창조이다.

시인은 시 속으로 정념을 흘러들게 하고 그 정념을 확인하기를 멈춘다.

시인 자신이 보기에도 말들은 정념을 <의미>하지 않는다.

감동은 사물이 되었고, 이제는 사물과 같은 불투명성을 지닌다.

산문은 본질적으로 실용적인 것이다.

작가란 <발언을 하는 사람>이다.

말들은 애초에 대상이 아니라 대상의 지시 자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세상의 어떤 사물이나 관념을 정확하게 지시할 수 있는지 아닌지를 아는 것이다.

산문은 정신의 한 가지 태도이다.

발레리 식으로 말하자면, 햇빛이 유리를 거쳐 통과하듯이, 말이 우리의 시선을 스쳐서 지나갈 때에 산문이 있는 것이다.

언어도 우리의 껍질이며 촉각이고, 우리의 감각의 연장이다.

우리의 신체 속에 있듯이 우리는 언어 속에 있다.

말한다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이름이 붙여지자마자 이미 그 이전의 것과는 완전히 똑같은 것이 아니며, 그 순결성을 상실한다.


당신은 무슨 할 말이 있는가?

남에게 전달할 만한 그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전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세계의 어떤 모습을 드러내려는 것인가?


작가란, 아직도 이름 지어지지 않은 것 혹은 감히 이름 지을 수 없는 것에 이름을 붙이는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

작가란, 세계와 특히 인간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기를 선택한 사람인데, 그 목적은 이렇게 드러낸 대상 앞에서 그들이 전적인 책임을 짓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작가의 기능은 아무도 이 세계를 모를 수 없게 만들고, 아무도 이 세계에 대해서 "나는 책임이 없다"라고 말할 수 없도록 만드는 데 있다.

한 사람이 작가가 되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기를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어떤 방법으로 말하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글쓰기란 하나의 기도이다.

작가는 죽기에 앞서 살아 있는 인간이다.

작가는 자신의 악덕과 불행과 약점을 전면에 내세우는 그런 비루한 수동적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결연한 의지와 선택과 저마다 삶을 추구하는 전체적 기도의 인간으로서,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렇게 때문에 문제를 시초부터 재검토하고 우리 나름대로 이렇게 물어야 마땅한 것이다.

무엇을 위한 글쓰기인가?라고.


『문학이란 무엇인가』 ,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p11-48





#2. 무엇을 위한 글쓰기인가



작가는 자기가 쓴 것을 스스로 읽을 수 없다.

독자는 한 문장의 끝을, 다음에 올 문장을 다음에 계속될 페이지를 예측한다.

책 읽기는 숱한 가정, 꿈과 그 뒤에 오는 각성, 그리고 희망과 실망으로 이루어진다.

문학적 사물의 움직이는 지평선이 형성되고 기대와 미래와 미지가 없다면 객관성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책에 늘어놓은 수천 개의 낱말들을 하나하나 모두 읽는다 해도 작품의 의의가 나타난다는 보장은 없다. 의의는 낱말들의 총화가 아니라 그것의 유기적 전체이다.

무엇을 위한 글쓰기인가 - 사르트르



작가가 말하지 않는 것이 있다.

『몬 대장』의 초자연성, 『아르망스』의 웅대함 , 카프카의 신화에서 볼 수 있는 리얼리즘과 진실의 경지, 이러한 모든 것은 결코 미리부터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 스스로가 씌어진 것을 부단히 초월하면서 발명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읽기란 인도引導된 창조이다.

작가의 인도는 몇몇 푯말을 세워놓는 것에 불과하고 그 사이에는 빈터가 깔려 있다.

독자는 그 푯말들을 따라가고 또 그 너머로 나가야 하는 것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 무엇을 위한 글쓰기인가 p57-66




사르트르



#3.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



영원한 가치란 뼈만 앙상한 것이다.

자유 그 자체도 , <영원의 상相 밑에서> 볼 때는 메마른 곁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자유란 바다처럼 항상 새로 시작되는 것이다.

자유는 인간이 끊임없이 자신으로부터 초탈하고 자신을 해방시키는 움직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이미 주어진 자유란 있을 수 없다.


정신의 작품은 본래가 <암시적>인 것이다.

언어란 원래가 <생략적>인 것이다.

같은 시대와 같은 집단의 사람들, 같은 사건을 겪고 같은 문제를 지니거나 회피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열쇠가 되는 말>들이 있다.

모든 책은 제각기 특정한 소외로부터 출발해서 구체적 해방을 제시한다.

작가가 그의 자유로서 생동시키고 뚫어보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낯익은 세계이며, 독자 역시 그 세계에서 시작해서 자신의 구체적 해방을 시도한다.

그 세계는 소외이며 상황이며 역사이다.

작가와 독자의 자유는 하나의 세계를 통해서 서로 찾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므로, 세계의 어떤 모습을 들어올리느냐 하는 작가의 선택이 그 독자를 결정하며, 거꾸로 어떤 독자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작가의 주제가 결정되는 것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 p95-100


우리는 최초의 소설을 쓰기도 전에 벌써 문학에 익숙해진다.
나무가 뜰에서 자라듯, 책이 문명화된 사회에서 자라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 온 것이다.
가령 우리가 열네 살의 나이에, 저녁 공부를 하다가, 혹은 학교 운동장에서 뛰어놀다가, 갑자기 작가로서의 천직을 발견하게 된 것은 라신이나 베를렌을 너무나 좋아했기 때문이다.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자못 지겹고 예측할 수 없고, 우리의 체액이 찐득찐득 묻은 괴물과 씨름하는 것인데, 그런 작업에 미처 손을 대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완성된 문학을 먹고 자랐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미래의 글들이, 이미 나온 남들의 글처럼 완결된 상태에서 우리 머리에서 솟아나와, 당당히 사회의 인정을 받고 세간의 축성이라는 영예를 지녀, 요컨대 국가의 보물처럼 대접받으리라는 소박한 생각을 품어왔다.
우리에게는 한편의 시의 종국적인 변신은, 영원한 생명을 위한 그 마지막 치장은, 삽화가 들어 었는 호화판으로 나오는 것, 그러고 나서는 펄프와 잉크의 산뜻한 냄새를 마치 시신의 향기인 양 풍기고, 녹색 천의 등을 지닌 장정판의 책에 작은 활자로 인쇄되는 것, 그리하여 손가락에 잉크를 묻힌 꿈꾸는 자식들, 미래의 부르주아지가 될 그 자식들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문화를 불사지르겠다고 나선 브르통 자신도, 어느 날 교실에서 선생이 말라르메의 시를 읽어주었을 때 최초의 문학적 충격을 느꼈다.
한마디로 해서 우리의 작품의 최종 목적은 1980년대의 프랑스 문학의 강의를 위한 텍스트를 공급한는 데 있다고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 그리고 처녀작을 내고 넉넉히 5년만 지나면 모든 동료 작가와 악수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 1947년의 작가의 상황 p226-227





사르트르는 문학의 참여를 공공연히 천명했다. 작가는 이제 초월적 가치, 보편적 진리, 사후의 영예와 같은 것을 추구하려는 종래의 태로를 버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에 어떤 변혁을 가져오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는 것, 개인의 자유와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동시에 겨낭하는 작업을 당장 오늘날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좌우 양진영으로 부터 비난과 공격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문학이란 무엇이가』는 바로 이런 양극단의 비판에 대답하려는 사르트르의 논조는 교만하기까지 하다. - 작품해설 - p418




아무것도 문학이 불멸이라는 것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문학의 가능성, 오늘날의 그 유일한 가능성은 곧 유럽과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와 평화의 가능성과 결부되어 있다.
그 가능성에 걸어야 한다.
만일 이 내기에 진다면 우리들 작가로서는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또한 사회로서도 유감스러운 일이다.
내가 지적한 것처럼 한 집단은 문학을 통해서 반성과 사유의 길로 들어서며, 불행 의식을 갖추고 자신의 불안정한 모습을 알게 되어, 부단히 그것을 바꾸고 개선해 나가려고 하는 것이다.
요컨대 글쓰기의 예술은 어떤 변함없는 신의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며, 인간은 자신을 선택하면서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만일 글쓰기가 단순히 선전이나 오락으로 전락하게 된다면, 사회는 무매개적인 것의 소굴 속으로, 다시 말해서 날파리나 연체동물과 같은 기억 없는 삶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하기야 이런 것은 별로 중요한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세계는 문학이 없어도 넉넉히 존속할 테니 말이다.
아니, 인간이 없으면 더욱더 존속할 테니 말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 1947년의 작가의 상황 p338




<문학이란 무엇인가> 저자 장 폴 사르트르 출판 민음사발매 1998.08.05.



"우리는 이 시점에서 과연 무엇을 위한 문학인가 하고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사르트르처럼 문학의 본질을 전적으로 사회적, 정치적 실천과 결부시켜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며, 문학이 겨냥하는 것은 도리어 인간 존재의 현실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더 합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의 현실이 사회적 차원의 인간의 모습과 무관하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그 현실을 밝히는 행위가 제도와 관행에 대한 이의제기와 고발과 반항을 떠나서, 그리고 한 걸음 더 나가서 착취와 억압이 없는 유토피아의 환상을 떠나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사르트르의『문학이란 무엇인가』는 단순히 문학이 사라진 시간에 대한 노스탤지어나, 현실에 대한 절망이나 또는 대상적인 만족에만 머무를 수 없으며, 여전히 미래로의 투기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물음을 우리들 자신에게 새삼스럽게 던지게 해준다. "


- 작품해설 정명환 - (p437-438)




나만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대한 생각으로 마무리....



문학이란 무엇인가? 책이라는 사물에서 벗어난 정신, 조금 더 갖추어진 그 테두리 안의 '그것'은 점점이 끊이지 않고 확장 없이 어쩌면 소멸할지도 모를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쥐어진 상태, 손안에 꼭 쥐어진 상태이기도 하지만 어느 날 느닷없이 놓치면 날아가거나 사라질 것처럼 위태롭기도 하다. 더 이상 내가 의심하지 않고 의문을 하지 않으면 그대로 마침표를 찍게 될 그런 것...


나에게 책이란 사랑하는 대상이지만, 문학이란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는가 되묻게 한다.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니었는데 처음부터 그것은 나에게 원했던 것 마냥 그래서 알게 될수록 나도 모르게 원망하는 마음이 그득 차게 된다. 차라리 백지상태가 나았을까 총천연색이 뭐란 말인가 그것은 실제 하지 않는 것일 텐데 그런 생각이 들어서 더욱 허무하고 회의적이게 한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파헤치다 보면 가장 반짝이고 아름다운 것을 발견한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일수록 기쁨은 배가 된다. 작가의 결정체, 언어의 파도, 그것이 나아가는 방향, 도달하는 지평선 너머, 그 너머에 아무것이 없을지라도... 우리를 상상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면 되었다는 생각이 잘못도 아니고 끝도 아니다. 모든 게 시작이라고 출발이라고 말하는 그것이 나는 언제나 좋았다.







p.s 작품 해설이 신랄하여서 제가 무엇을 잘못 읽었나 생각했고, 사실 절반은 넘겨읽는 바람에 사르트르의 생각을 전혀 부정하지 않고 읽었는데 작품 해설 보고 아! 그렇군! 급 깨달음과...... 이렇든 저렇든 잘 읽지는 못했습니다. 문학이란 이렇게 심오하다는 사실.. 2021년 여름은 이렇게 보내는 듯하네요... 어제는 백신예약을 했어요. 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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