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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훌리아 Sep 30. 2015

그 밤, 그 달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상태...

벽지는 젖어 색이 바랬다.

난 저 자국을 평생 잊지 않을 생각이다.

내가 그렇게 마음을 먹었으니깐 내 기억에 영원히 남아 있을 거다.

어릴 적엔 누구도 모르게 집에서 몰래 나와 내 강아지 해피와 그 밤, 그 달을 보며 잊지 않겠다고 속으로 되뇐 적이 있다.

그렇게 난 그 밤, 그 달을 잊지 않고 있다.

내가 잊지 않겠다고 마음먹으면 이렇게 잊히지 않고 내게 남아있다.

하지만 이렇게 마음 먹지 않는 것들은 이내 사라지고 만다.

난 대부분의 것들이 내게 사소하고 중요할 것이 없다.

그냥 잡으면 잡히지 않는 그런 것들이다.

의미를 두려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의미가 없는 것일 뿐이다.



나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저 달 너머에서 왔을까? 아니다. 난 어디에서도 오고 간 것이 아니다.

난 처음부터 여기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난 여기 있던 걸 까맣게 잊은 건 아닐까.

왜 꼭 어디에서 왔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누가 그렇게 가르쳐 주고 배웠던 것처럼 앵무새같이 따라 읊을까.

난 예전부터 꼭 여기 붙어 있었던  것처럼 느낀다. 느껴진다.

이제 와서 기억할 뿐이란 생각이 든다.

아니라고 말한다면 난 단 몇 초의 생각도 없이 그렇다고 대답해 줄 것이다.

이런 생각은 우스운 것이니까.

금방 사라지도록 난 내버려둘 것이다.




어릴 적에 별 희한한 시험을 다 했다. 저 구석, 저 귀퉁이, 저 벽지의 얼룩, 저 녹슨 담벼락, 저 하수구... 내가 기억해 둬야지.... 나는 어릴 때 정말 내가 잊는 지, 잊지 않는 지  시험했다. 그 시험은 아직도 유효하다. 내 기억력이 대단한 건 아니다.. 잘 잊어버린다. 심각하게 잊을 때도 많다. 심히 걱정이 될 정도라 누군가는 걱정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릴 적부터 쓸데없는 것들을 기억하려고 애를 썼을까? 왜?


500원 동전을 하수구 빠트린 날 엄마에게 혼꾸멍이 났었다. 친구 집에서 늦게까지 밤하늘을 달을 보다 엄마에게 혼꾸멍이 났었다. 친구의 미술 숙제를 도와주다가 결국 학교에 지각해서 혼꾸멍이 났다. 굴욕적이지만 동네 개들에 쫓긴 적도 여러 번이다. 이런 기억들은 좀 채 잊히지가 않는다. 


내가 기억하려는 자잘한 것들이 가끔 날 우습게 만든다. 너 그렇게 살았던 거냐?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요즘 들어서 느끼는 감정 중에 하나는 '나'라는 존재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거다. 적당히 만족하며 살겠구나 하는 정도다. 그렇게 늙겠구나 하는 정도다.. 그렇게 지나온 생들이 눈에 너무도 많이 보인다.... 슬픈 일이기도 하다. 부인할 수는 없다... 이런 것들은 내가 조금 알았다고 코웃음 칠 노릇이지만... 내 이런 생각은 순간일 뿐 사라질 것도 안다. 


이 습작시는 그런 류이지 않을까 싶다. '나'라는 존재가 있기는 한 건지? 혹시 있어 온 것은 아닌지? 부질없는 생각이었다는 걸 안다는 그런 식의 답으로 끝마친다...



By 훌리아

보리차를 유리글라스에 담아..

http://roh222.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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