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제프 크네히트의 삶과 죽음
헤르만 헤세_유리알 유희 Das Glasperlenspiel
1946년에 유리알 유희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1962년 8월 제2의 고향인 몬타뇰라에서 영면했다. 욕망과 금욕, 혼돈과 질서, 삶과 죽음, 동양과 서양, 선과 악 등 자신이 평생 고민해 온 문제들을 해결해 가는 과정이자 해답을 담은 헤세 문학의 총체... 10여 년에 걸쳐 집필한 마지막 역작이자 대표작이다. 사색과 성찰, 즉 "생각의 유희"인 유리알 유희를 통해, 그가 끊임없이 고민했던 '존재의 양극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잃지 않고 조화로움을 지켜 갈 수 있는가'를 상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20세기 중반(역사상 유래 없는 전 지구적 혼돈을 맞은)에 스위스 산간지방에 '카스탈리엔'이라는 정신적 이상향이 세워졌다. 어떤 정치적, 사회적 영향도 받지 않고 오로지 엄격한 절제와 자기 수양으로 교육된 인재들을 교사로 파견해 사회가 바르게 돌아가도록 돕는 기관이다. 요제프는 이곳에서 영재로 교육받고 점차 유리알 유희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다가 마침내 명인으로 추대된다. 25세기로 추정되는 미래의 어느 시기, 한 전기 작가가 200년 전에 살았던 전설적인 유리알 유희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의 자료를 모아 그의 일대기를 쓰기 시작한다.
요제프 크네히트, 자신의 사명에 지치고 녹초가 되어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던 때, 음악명인은 자신의 오래전 경험담을 풀어놓는다.. 요제프. 우리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고, 또 그때그때의 과제가 우리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을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명상이라는 힘의 원천에, 정신과 영혼의 끝없이 새로워지는 화해에 의지하게 되는 것이지.
우리가 어떤 과제에 몰두하게 되어 흥분하고 격앙되고 피로해지고 압박받는 정도가 심할수록, 그만큼 더 우리는 이원천을 소홀히 하기 쉬운 법이라네. 어떤 정신적인 일에 깊이 빠져들게 되면 육신과 그것을 돌보는 일에 소홀해지기 쉬운 것과도 같지. 세계 역사에 진실로 위대하였던 인물들은 모두 명상할 줄 알고 있었거나 혹은 명상을 통해 우리가 이르게 되는 그곳으로 가는 길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네. 그렇지 못한 자들은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힘이 있었다 해도 결국은 모두 실패하고 패배했지.
과제나 야망의 포로가 되어 이성을 잃고, 눈앞의 현실적인 것에서 벗어나 늘 그것에 거리를 둘 수 있는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야. 자네도 이미 알겠지. 그런 건 처음 연습할 때 배우는 것이니까. 피할 수 없는 사실이야.
그것이 얼마나 엄연한 사실인가 하는 것은 한번 길을 잃어 보면 그때 비로소 알게 되지.
신부 : "당신네 카스탈리엔 사람들은 대단한 미학자들이요. 당신들은 옛 시 한편에서 모음(母音)의 비중을 재고 그 공식을 어느 별의 궤도에 연관시키기도 하지. 그런 일은 매혹적이긴 하지만 유희에 지나지 않소. 유희야말로 당신네들 최고의 비밀이자 상징이지. 저 유리알 유희 말이오. 당신들이 이 멋진 유희를 성사나 혹은 최소한 교화의 수단으로까지 끌어올리려고 애쓴다는 사실은 나도 인정하오. 그러나 성사란 그런 식의 노력에서 생겨나는 게 아니오. 유희는 그저 유희일 뿐이지."
요제프 : "우리에겐 신학의 기반이 결여되어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신부님?"
훗날 그에게 특히 사랑받았던 제자들은 하나같이 그가 얼마나 자주 또 얼마나 즐거워하면서 야코부스 신부의 이야기를 했는지 말하고 있다. 크네히트는 신부게 당시 카스탈리엔에서는 거의 배울 수 없었던 것들을 배웠다. 그는 역사 인식 및 역사 연구의 방법과 수단에 대한 개관, 그리고 그것들을 응용하는 기초훈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 훨씬 더 나아가 역사를 지식의 영역으로서 가 아니라 현실로, 삶으로 얻고 체험했으며, 자신의 고유한 개인적 생에 있어서의 변화와 상승을 역사에 맞추어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것을 그저 단순한 역사학자에게서는 배울 수 없었으리라. 야코부스 신부는 학식을 훌쩍 넘어서서 역사를 통찰하는 자, 현자에 그치지 않고 거기서 더 나아가 체험하는 자요 함께 창조하는 자였으니, 그는 운명이 자신에게 부여한 자리를 이용해 관찰자의 안락함을 누리는 게 아니라, 세계의 바람을 자기 서재로 불어 들어오게 하고 그 시대의 고난과 예감을 자신의 가슴속으로 흘러들도록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 시대의 사건들에 동참하여 일했고, 그 짐을 나누어 지고, 함께 책임졌다. 그러면서도 벌써 오래전에 일어난 사건들을 개관하고 정리하고 해석하는 일에 또 이념에 관여하는 일에만 그치지 않고, 그 이상으로 물질과 인간의 다루기 힘든 일에 끼어들었다. 그의 동료이자 적수로서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예수외의 한 신부와 나란히 그는 로마 교회가 체념과 극심한 곤궁을 겪은 후 다시 찾은 저 외교적이고도 도덕적인 권력과 상당한 정치적 명망의 기반을 닦은 인물로 여겨지고 있었다.
로마와 카스탈리엔의 친선 관계과 호의적인 중립과 이따금 있는 학문적 교류로 시작되어 진정한 협력과 동맹으로까지 발전해서 오늘날까지 존속하는 것은 이 두 사람 덕택인 것이다. 신부는 심지어 처음엔 웃으면서 물리쳤던 유리알 유희의 이론까지도 나중에는 배우고 싶어 했다. 그것을 통해서 수도회의 비밀과 어느 정도까지는 그 신앙이나 종교를 찾아볼 수 있으리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는 그저 전해 듣고서 알 뿐이고 거의 공감할 수 없었던 이 세계를 한번 캐 보고 싶은 생각이 들자 그는 특유의 힘차고도 빈틈없는 방식으로 대담하게 중심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비록 신부가 유리알 유희자가 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 그러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다. - 유희와 수도회의 정신이 카스탈리엔 밖에서 이 위대한 베네딕투스 수도회 신부보다 더 진지하고 귀중한 벗을 얻은 일은 일찍이 없었다.
요제프 그의 은인이자 친구인 노명인과의 만남에 대해 친구 카를로에게 들려준 이야기
난 오늘 반년이나 뵙지 못했던 전 음악 명인을 뵈러 왔고, 그분의 조수가 암시한 것 때문에 이 방문에 대해 거의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네. 다만 존경하는 노인께서 머지않아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고, 최소한 그러기 전에 그분을 한번 뵈어야겠기에 서둘렀던 거지.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실 때 그분은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긴 했지만 내 이름을 불렀을 뿐 아무 말씀도 없으셨고, 내게 손을 내미셨는데 이 동작이, 또 그의 손이 내게는 빛을 발하는 듯했네. 그분 전체가, 아니면 그분의 눈이나 흰 머리카락이나 옅은 장밎빛 피부가 엷고 차가운 빛을 뿜는 것 같았어. 내가 앞에 앉자 그분은 눈짓으로 학생을 내보냈는데, 그때부터 내가 지금까지 겪어 본 중에서 가장 기묘한 대화가 시작되었네.
처음에는 아주 낯설고 억눌리는 기분이 들고 무안했지. 계속 말을 걸고 질문을 해도 노인은 그저 시선을 줄 뿐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네. 내가 하는 말이나 질문이 그분께는 그저 성가신 소음으로 가 닿는 것인지 어떤지 분간할 수가 없었어. 그것이 나를 당황하게 했고 실망시켰으며 지치게 했지. 나 자신이 참 보잘것없고 부담스러운 존재로 느껴지더군. 명인께 무슨 말씀을 드리든 돌아오는 것은 그저 미소나 잠깐의 시선뿐이었어. 그래, 이 시선이 그토록 호의와 다정함을 담고 있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나는 노인이 속으로 나를, 내 이야기나 질문을, 거기까지 쓸데없이 찾아와 그분을 뵙고 있는 것을 비웃고 있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런데 결국 그분의 침묵과 미소는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거라네. 그 침묵이며 미소는 실제로 거절이고 질책이었지만, 조롱의 말 따위와는 다른 방식, 다른 차원, 다른 의미층에서 행해진 것이었지. 완전히 지친 후에야, 대화의 실마리를 이끌어내 보려는 나름의 끈기 있고 정중한 노력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간 후에야 비로소 나는 노인이 나보다 백배는 더 인내심을 가지고 끈기 있고 예의 바르게 나를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네.
기껏해야 십오 분이나 삼십 분 정도였을 텐데 족히 반나절은 걸린 것 같은 느낌이었어. 나는 슬프고 지치고 화가 나서 여행을 떠나온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고, 입안이 바싹 말랐다네. 거기 존경하는 그분, 나의 은인이자 친구인 그분, 내가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게 된 이래 진심으로 마음을 기울이고 신뢰해 왔으며 내가 묻는 말에 한 번도 대답 없이 지나간 일이 없던 그분이 앉아 내 얘기를 듣고 계셨어. 아니면 내 말을 듣지 않고 계셨는지도 모르겠네. 밝음과 미소 뒤에, 금빛으로 빛나는 가면 뒤에 완전히 몸을 감추어 보루를 쌓고는, 다른 법칙이 지배하는 다른 세계로 가서 내가 다다를 수 없이 거기 앉아 계셨다네. 그리고 내가 하는 말, 이쪽 세계에서 그쪽 세계로 전하려는 말은 모두 돌 위에 빗방울이 떨어지듯 그분에게서 흘러내릴 뿐이었어. 그런데 마침내, 내가 모든 희망을 포기했을 때 그분이 마법의 벽을 허물고 나와 나를 도와주셨네. 드디어 말씀하신 거야!
오늘 내가 그분으로부터 들었던 유일한 말이었네.
'자네 지쳤군, 요제프'
'자네 지쳤군, 요제프'라고 낮은 소리로, 자네도 잘 알다시피 저 가슴 뭉클한 다정함과 염려 가득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지. 그게 전부였어. '자네 지쳤군, 요제프'. 너무 오랫동안 애쓰며 힘들어하는 것을 지켜보다 못해 내게 주의를 주시려는 것 같았네. 흡사 오랫동안 말하는 데 입술을 써 본 일이 없는 것처럼 조금 힘들게 그렇게 말씀하셨다네. 그러면서 내 팔에 손을 얹으셨는데, 나비처럼 가벼웠어. 그러고는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미소를 지으셨지. 그 순간 난 그만 지고 말았어. 그분의 맑고 밝고 고요함, 인내와 평온에서 무언가 내게로 옮아 오는 것이 있었네. 갑자기 그 노인이 이해되고, 그의 전 존재를 차지해 버린 변화를, 인간에게서 고요함으로, 언어에서 음악으로, 생각에서 전일성(하나의 전체로서 통일을 이루는 성질)으로 돌아선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어.
그분을 뵙는 동안 그 자리에서 내게 베풀어진 것이 무엇인지, 그제야 그분의 미소와 밝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지. 내게 한 시간 동안 당신의 밝음 속에 함께 있도록 허락해 주신 그분은 바로 성자요 완성을 이룬 분이었던 거야. 그런 분께 난 미련하게도 말을 걸고, 이것저것 질문하고, 어떻게든 대화를 이끌어 보려 했던 거지.
다행히도 너무 늦지 않게 그걸 깨달았던 걸세. 그분은 나를 돌려보낼 수도 있었고, 그럼으로써 영원히 거절할 수도 있었어. 그랬다면 나는 이제까지 겪어 온 중에 가장 진기하고도 멋진 체험을 놓쳐 버리고 말았겠지.
모든 시작에는 이상한 힘이 깃들어 있어
우리를 지켜 주고 살아가도록 도와준다.
그러면 좋아, 마음이여, 작별을 고하고 건강하여라!
우린 흔쾌히 소중한 나날이 사라져 감을 보나니.
더욱 소중한 것이 자라나는 것을 보기 위함이다.
우리가 뜰에서 키우는 진귀한 식물.
우리가 가르치는 어린아이. 우리가 쓰는 작은 책 같은 것.
티토 : 소년은 크네히트 명인이 대단히 마음에 들었다. 그는 학교 선생들이 흔히 그러듯이 고상한 말을 동원하여 학문이니 덕이니 정신의 고귀함 따위를 말하지 않았다. 명랑하면서도 다정한 이 인물은 그 인품과 말 속에 의무를 느끼게 하고 고귀하고 훌륭하며 기사적인 동시에 보다 높은 노력과 힘을 불러내는 무엇을 가지고 있었다.학교 선생이라면 누구든 골려먹고 속여 넘기는 일을 재미로 알고 재주로 삼아 왔지만, 이 사람앞에서는 그럴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 사람은 정말 누구이며 어떤 사람일까?
티토는 이 낯선 사람에게 있는 무엇이 그처럼 자기 마음에 들고 존경할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결국 그것은 이 사람의 고귀함과 탁월함과 신사다운 기질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요소가 무엇보다 그의 마음을 끌었다. 크네히트라는 인물은, 비록 아무도 그의 가족에 대해 알지 못하고 그의 아버지가 구두 수선공이었다고 한다 해도 고귀하고 신사이며 귀족이었다. 그는 티토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고귀하고 고상한 인물이었으며, 아버지보다도 나았다. 가문의 귀족적인 본성과 전통을 중요시하는 소년은 자기 아버지가 그러한 것에서 벗어난 사실을 용서할 수 없었지만, 이제야 비로소 정신적인, 교양에 의해 키워진 귀족을 만난 것이었다.
오랜 조상이나 세대의 열을 뛰어넘어 오로지 한 인간의 인생을 통해, 평민의 아이를 고귀한 귀족으로 만드는 기적을, 행운의 조건들이 맞았을 때 드물게 일어날 수 있는 힘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자존심이 불처럼 강한 이 소년의 마음속에는, 이런 종류의 귀족이 되고 거기에 봉사하는 것은 자신에게 의무이자 명예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토록 부드럽고도 다정한, 그러면서도 철저하게 신사인 이 인물 속에 자기 인생의 의미가 구체적인 모습을 띠고 나타나 자기에게 다가와서 삶의 목적을 정해 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크네히트 : 티토 "빨리 헤엄치면 해보다 먼저 저편 기슭에 닿을 수 있어요. "크네히트는 이곳으로 나오면서 목욕이나 수영을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기엔 너무 추웠고, 반쯤 앓으면서 밤을 지샜기 때문에 몸 상태가 영 좋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아름다운 햇살을 받고 바로 눈앞에서 벌어졌던 광경에 들떠 있는 상태에서, 제자가 친구처럼 자신을 유혹하며 부르는 소리를 듣자 그 모험이 별로 두렵지 않게 여겨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지금 자기가 어른의 냉정한 분별심으로 이 힘겨루기를 거절하고 소년을 혼자 헤엄치게 해 실망시킨다면, 기껏 이 아침의 한순간이 길을 열어 주고 약속해 준 것이 다시 가라앉고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웠다. 갑작스런 산악여행으로 인해 불안정하고 쇠약한 느낌이 안에서 경고를 보내왔지만, 어쩌면 이 불쾌감도 강제로 거칠게 다잡으면 빨리 극복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부르는 소리가 경고보다 강했고, 의지가 본능보다 강했다.
(크네히트의 죽음)
티토 : 이 빚이 자신과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그가 이제껏 자신에게 요구했던 것보다 훨씬더 위대한 것을 요구하게 되리라는 예감이 밀려왔던 것이다...
이 책은 2012년도에 읽은 헤세의 마지막 책이었다. 노년에 그의 전 작품을 읽을 계획을 세웠다. 이 작품은 재독할 예정이다. 리뷰조차 남기지 못하고 발췌만 해뒀었다.... 요제프 크네히트를 아직도 가슴속 깊은 곳에 남겨두었다...
by 훌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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