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와 새우깡
17살 S에게 술이란 어른의 한숨과 한계의 탄식, 현실로부터의 도주와 같은 의미였다. 대개의 아버지들은 후천적인 술꾼들이었고 취기가 오르면 더 다정해지거나, 더 매정해지거나, 혹은 더 잔인해졌다.
고등학교 진학하고도 변함없이 특별활동으로 미술을 선택한 S는 2학년이 되자 미술실 열쇠를 받게 되었다. 미술실 당번이 된 것. 입학 당시 학교는 본관 신축을 마치고 후관 정비를 앞두고 있었다. 본관 신축 시 임시 교무실, 교실로 사용했던 조립식 건축물이 본관과 후관 사이에 남아있었고, 그곳은 미술실이나 음악실 등으로 이용되었다.
1학년 반편성을 마치고 등교한 첫날, 반 석차 순으로 다섯 명이 각자 요일을 맡아 아침 자습을 진행했는데 그때 선발된 인연으로 S와 A는 가까워졌다. S와 A는 2학년이 되어서 이과와 문과로 나뉘었다. S는 이과였고 A는 문과여서 교실 층이 달라 평소 복도에서는 만날 수 없었고 특별반 통합 수업 시 만날 수 있었다. A와 헤어져 2학년이 된 S는 부쩍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독서를 하거나 시선을 창가에 두곤 했다. 주변에 맴도는 반 친구는 많았지만 단짝은 없었다. 그에 비해 A는 모든 면에서 단연 돋보이는 대중 속의 문과 일인자였다.
1학기 자율학습과 특별반 수업이 밤까지 이루어지는 가운데 모의고사를 치른 날에는 S와 A의 1학년 담임선생님이었던 특별반 영어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미술실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날 역시 모의고사를 마치고 S와 A는 미술실로 향했다. A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 술 마시자.”
학교 앞 가게에서 진로 소주 한 병과 새우깡 한 봉지 샀다. 값을 치르고 병뚜껑을 딴 사람은 A였다. 불이 꺼진 미술실에 책상을 붙여놓고 평상에 앉듯 S와 A는 올라앉았다.
A가 한 모금 마시고 건네준 술병을 들고 S 역시 한 모금 마셨다. 목을 타고 흐르는 술의 독하며 역한 단맛. 당시의 A는 불교 학생회장과 열애 중이었다. S도 교회를 다니고 있었지만 이성에 관심이 있는 타입은 아니었다. S는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대여하고 읽거나 녹음테이프의 노래를 워크맨으로 듣는 것 외엔 외부의 그 무엇에도 흥미가 없었다. 일주일 전 빌린 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회색 노트’를 읽고 있었고 내내 ‘자크’를 생각했다. A는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고 그 특유의 발랄함과 영리함으로 동급생이나 선생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S와 A가 가깝게 된 것은 순전히 A의 적극성과 의리 때문이었다. S는 독립적이면서도 외로움이 많았고 A는 의존적이면서도 활기가 넘쳤다. S의 독서는 학습과는 상관없는 방식이었고 A의 독서는 학습을 위한 것이었다. 고전에 관해 A는 참고서에서 안내하는 바 그대로 이해했고 S는 달리 읽고 달리 이해했으므로 감동의 폭과 이해의 넓이가 A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A가 힘겨워하며 이야기하는 모든 것들이 S에게는 그저 파랑새의 노래와 같았다.
두어 모금을 연달아 마신 A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S야, 우리 아빠가 오늘 아침에 욕실에서 나오더니('우리 집은 화장실이 집 밖에 멀리 있지.') 엄청 화를 내는 거야. 욕조에('우리 식구는 엄청 큰 고무 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 씻어야 하지.') 내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었대. 매일 아침('세상에! 매일 아침 머리를 감을 수 있다니!') 끝없이 잔소리를 해.”
S는 '모든 집이 다 그렇지.' 정도의 느낌으로 빙긋 웃어주었다. S는 그간 A의 이야기를 통해 아버지의 직업과 어머니의 성품, 남동생의 단점과 남자 친구의 주특기를 알게 되었다. S가 A에게 말했다.
”아침마다 피곤한 게 자주 깨어서 그런 것 같아. 이불 밖으로 발이 빠져나가서 깜짝 놀라서 깨고."
"왜?"
"왜냐면 발을 누군가가 잘라갈 것 같아서."
"아…"
"그리고 천장에 쥐들이 뛰어다니는 소리에 깨지."
"집에 쥐가 있어?"
"응. 그러다 무심코 눈을 뜨기도 하는데 어둠이 너무 까맣고 무서워서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는 거야. 학교 오는 길에 논이 나타나면서 한동안 계속 한 사람만 걸을 수 있는 좁은 외길인데 우리 동네 애들 좀 유치하거든. 멀리 뒤에 있었는데 어느새 내 뒤에 바짝 따라오다 툭 치며 앞으로 지나가는 거야."
"걔 누군데?"
"있어."
"학교 어디 다니는 데?"
"있어. 오늘은 그래서 내가 일부러 길가로 바짝 물러났는데 또 일부러 툭 치며 지나가더라고. 논에 빠질 뻔했어. 일찍 일어나 걔보다 아주 먼저 그 길을 지나고 싶은데 항상 집에서 나오는 시간이 똑같아. “
S는 A를 위해 내키진 않았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 들려주었다. A는 1학년 때부터 S를 좋아하고 소중히 여겼다. S가 평소 들려주는 책에 관한 이야기나 함께 좋아했던 과목, 철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뇌가 똘똘해지는 느낌이었다. S는 간혹 A의 마음을 읽어 냈고, 한 번은 A가 거짓말을 한 적이 있는데 ‘알고 있었던 것이어서 사과는 필요 없다.’고 S가 말해주어 더욱 A가 S를 좋아하게 되었다.
미술실의 시간은 빨리 지나갔고 어둠이 깊어지며 그들의 취기도 조금 올랐다. 맑고 예쁜 목소리의 A에게 S가 노래를 불러달라 부탁했다. 평소 S가 좋아하는 가곡, 이은상의 사랑이었다.
탈대로 -다-타시-시오-
타다말진-부대마소-
타-고- 마-시-라-서-
재될 법-은-하거니와-
타다가- 남은 동-강은-
쓰을 곳--이 없느니다-
반타고- 꺼-질-진-대-
애제타지- 말으시오-
차라니- 아-니-타-고-
생낙으-로- 잊으시오-
탈진댄- 재 그것-조차-
마자 탐--이 옳으니다-
A의 나지막한 노래가 시작되고 그 노래는 미술실의 어두운 바닥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려앉았다. S는 병째 소주 한 모금 마신 후 새우깡을 집어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회색 노트. 나에게도 그런 비밀 노트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철학 선생님이 그 사람이었으면….’
S는 대화를 할 사람이 없었고, 그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S가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는 가족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가족과의 대화는 이를테면 이랬다. 언 땅이 녹으면 호박을 심기 위해 깊은 구덩이를 파고 인분을 듬뿍 들이부어 한동안 방치하는데 인분의 표면이 바싹 말라 흙처럼 보일 때 잘못 헛디뎌 쑥 빠진 발을 들어 올리는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친구들과의 대화는 대체로 공중에 떠도는 먼지처럼 의미 없게 여겨졌다. S는 그렇게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그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대화가 거의 없었다. 익숙한 내용의 이야기들을 다시 들어주거나 홀로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S는 깊은 구덩이를 파고 연신 토해내지 못한 많은 사념과 상념들을 묻었다.
노래를 마친 A가 깜짝 놀라며 S에게 말했다.
”너 술을 혼자서 다…. “
S는 소리 없이 웃으며 책상 위에 누웠다. 아무렴 어떠랴! 기분이 한껏 이유 없이 들뜨고 철학 선생님과 회색 노트를 주고받는 상상을 하니 세상이 다 내 것 같이 느껴졌다. '아버지도 그러시는 것일까? 이런 홀가분한 기분을 느끼려고 술을 마시고 또 마시며, 또 마시는 건가? 어차피 안될 일들, 변하지 않는 모든 것을 두려워하며. 이런 식의 위안을 받는다는 게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S는 어느새 취기가 가시고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S를 따라 옆에 나란히 누운 A가 웃으며 S에게 말했다.
"S야, 우리 정말 친구지?"
'정말 친구? 그게 뭐지?'
"우리 대학가서도 꼭 연락하자."
'그럴 수 있을까?'
"아니, 나랑 과는 다르더라도 같은 대학가자!"
'그럴 수가 있을까?'
듣기만 하던 S가 A의 반들거리는 단발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가자. 미술실에서 나갈 시간이야."
미술실을 나오며 S는 뒤를 돌아보았다. 쥴리앙, 비너스 옆으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아그리파가 무채색으로 희미하게 S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