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사리 떼

청하와 두부김치

by 홍경

90년대 초,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나만 잘하면 뭐든 이룰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의 시대이다.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걸쳐 한숨 돌릴 수 있을 만큼 손보아 둔 상태인 것이다. S와 그의 친구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전기대, 후기대, 전문대 재학생 혹은 고졸 사회 생활자로 흩어져 다양한 신분과 다른 환경에 싸여 생활하고 있었다.


지난 3년 간 반 석차, 학년 석차로 공개적 줄 세우기를 경험했고, 그 차별적 분위기로 묵시적인 상하관계를 인정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각자 다른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다른 이야기를 공유한다. 더 이상 동일한 기준으로 그들을 서열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S는 고향에서 한 시간 거리의 도시에서 C와 함께 자취하며 같은 국립대를 다니고 있었다. 이 대학은 출신 고등학교 지원자 수에 비해 합격자가 많지 않아 동문 선배도 몇 명 되지 않았고 같은 학년에서도 S와 C, 단 두명만 합격했다. C는 A와 3년 내내 같은 반이었고, S와는 1학년 같은 반이었다. 작은 키에 곱슬머리, 보이시한 외모, 무엇보다 자존감이 남달랐다. 이성에게 크게 매력을 어필할 것으로 보이지 않았는데 보기와는 달리 여러 이성 사이에서 고민을 하곤 했다. 아버지가 그 마을 유지(有志)여서 같은 마을 출신 아이들은 C를 조심스럽게 대했다. 현재도 고향의 옛 연인과 과네 새로운 연인과의 3각관계로 고민 중이다. 모든 면에서 이성적이고 많은 것을 고려하는 신중함은 없으며 시원시원한 성격이었으나 연애에 관해서는 무척 우유부단했다.


A는 우수한 성적으로 'In Seoul'에 성공했고 여대생이 되었다. 동창들 사이에 A의 영향력은 아직도 유효하고 앞으로도 영원할 것처럼 보인다. 졸업 후 첫 봄의 모임을 주최하는 A의 성화에 S는 마음에 없는 결정을 했다. 이미 C에게서 모임에 관한 얘기는 들었지만 내내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터에 A가 B를 반드시 데리고 나오겠다고 약속하면서 S가 그 이상 버티지 못한 것이다.

S의 고3 짝꿍이었던 B. 가지런하고 단정한 외모에 가늘고 긴 손가락이 매력적이다. 누가 봐도 문과 적성인데 왜 이과를 선택했는지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냥, 아니, 뭐, 그게,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라고 싱겁게 대답했다. 성적은 중간 정도, 무난한 성격에 적이 없었다. B는 이승환의 팬이었고 그에게 보낼 학을 접거나, 학알을 접거나, 엽서를 쓰거나, 혹은 편지를 썼다. 고등학교 졸업 후 유통업을 하고 계신 아버지의 회사에 입사했고 경리 업무를 보고 있다.

S와 B는 3학년 내내 짝꿍이었는데 1학기 말 무렵부터 B가 S에게 거리를 두었다. 크게 불편함이 없는 가운데 S는 안개 낀 항로를 달리는 배처럼 조용히 배회하며 머물렀다. B는 이어폰을 꽂고 종이를 접었고 S는 엎드려자거나 창밖을 보거나 B를 지켜보았다. 왜 그러느냐고 묻기에는 너무나 평온하고 건조했다. S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익숙해졌고 서로 인사 정도는 나누었다. 그럼에도 S는 B의 말줄임표를 이해하고 싶었고 졸업 후 다시 만난다면 꼭 묻고 싶었다.


약속한 날, 약속한 광장에서 8명이 모두 모였다. 교복을 벗고 사복을 입은 그들은 티 나게 화장을 했고, 불편하지만 힐을 신었고, 끌어내려야 할 만큼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었다. 립스틱 색조도 비슷하고 누가 보아도 세련됨과는 거리가 먼 어색함이 서로 닮은 애송이들이었다.

장소를 딱히 정하고 만나지 않았다. 광장이나 우체국, 기차역, 버스 터미널 앞과 같은 공공장소 혹은 야외에서 일단 모였다. 모인 후 그곳에 선채 안부를 묻고 서로 수다를 쏟아놓는다. 시끄럽고 유쾌해서 지나는 행인들이 그들을 힐끗 바라보곤 했다. 8명 모두 중심가 인파에 섞여 거리를 전전하며 숨어들 둥지를 찾았다. 호객하고 있는 20대 초반 남성들이 길가에 서서 빙긋 웃으며 연신 손짓을 해댔다. 왔던 길 돌아 다시 걷던 차에 호객꾼 한 사람이 B에게 말을 건넸다.

"몇 학번이세요?"

"..."

"몇 학번이세요?"

다시 묻는 질문에 당황하는 B옆으로 C가 나서며 대답했다.

B가 당황하는 모습을 본 S는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들었다.'학번, 과사, OT, MT' 이런 별것 아닌 단어가 누군가에게는 생경할 수 있다. 생경하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주는 차별적인 분위기, 기죽는 분위기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S다.

그들은 묵직한 조명의 호프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들뜬 분위기에 서로 듣기보다 말하는 것에 열중인 가운데 S는 B의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잘 지냈어? 몇 달 안되긴 했는데..."

"응, 그렇지 뭐." B가 싱겁게 웃으며 대답한다.

"일은 어때?"

"아직은 모르는 게 많아서 배우고 있어. 근무하기 힘들거나 그렇지는 않아. 아빠 회사니까." 긴 얘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 모습이다.

"B야."

"뭐?"

"너 2학기에 무슨 일 있었니?"

B가 난처해하며 "다음에 얘기하자."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B가 A에게 자리를 내어 주며 일어섰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A가 S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잔을 내밀었다.

"잔들고 다니면서 술 마시는 거 아니다. 우리 아버지가 그러셨어." 말을 마친 S가 잔을 들어 함께 건배했다.

D에게 시선이 닿자 A가 물었다.

"D, 담임선생님이 학원 추천해 주셨다며?"

D는 눈을 아래로 내리뜨며 대답한다. "응."

"그럼 간호원 되는 건가?"

"간호조무원이 되는 거지."

D는 A, C, S와 함께 1학년 같은 반이었다. S의 앞자리에 앉았고 시내에 아주 큰 교회를 다녔는데 목소리 울림이 크고 아름다웠다. 교회에서는 성가대, 교내에서는 합창부 활동을 했는데 대회를 나가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얼굴이 작고 몸이 가냘픈 데다 소프라노 솔로의 소름 돋는 음색은 그 노래를 듣는 모든 영혼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졸업 후 서울에서 간호학원을 등록, 수강하고 있다. 당시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졸업생에게 담임교사가 대학 진학이 아닌 취업을 위한 추천서나 진로에 관한 조언을 해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D의 경우 담임교사가 간호학원을 소개해주었다고 해서 졸업생들 사이에 말이 많았다. 그 내용은 대단한 것은 아니고 'D의 담임선생님 하는 것을 보니 나이가 많아도 남자는 남자구나!', '공부를 못해도 여자는 일단, 예쁘고 봐야 한다.'는 류의 말들이었다. 표정으로 보아 D 역시 흘러 다니는 얘기들을 들어 알고 있는 듯하다. A와 D를 번갈아 바라보던 C가 머쓱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분위기 왜 이래! 마셔! 마셔!!"

모두 말을 멈추고 잔을 들어 올리자 C가 선창 했고, 나머지 사람들도 따라 외쳤다.


C : 이상은!

모두(잔을 머리 위로 높게 올리며) : 높게!

C : 우정은!

모두(잔을 가슴 위치 끌어내려 앞으로 내밀며) : 평등하게!

C : 사랑은!

모두(잔을 당겨 테이블 가까이 아래로 내리며) : 기~~잎~~게!!


요즘 어디서나 통용되는 건배사로 S는 이 퍼포먼스를 신입생 OT 뒤풀이에서 처음 보았다. 졸업 후 모든 게 신선하지만 특히 이 거대하고 생기 있는 외침은 가슴에 큰 울림을 남겼다. 담고 있는 의미는 또한 어떠한가!


조금 달아 오른 분위기, 다들 마음 맞는 이들끼리 앉은자리에서 둘, 셋으로 나누어졌다. A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S는 B를 서너 번 바라보았고 결국 B는 S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분위기가 서서히 시들어 갈 때 즈음 A가 다음 정모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추석 전날 고향 읍내에서 만나기로 결정하고 모두 호프집을 나섰다. 나이트, 노래방, 혹은 주점, 2차의 목적지는 세 곳으로 나누어졌고 A와 S, B와 D는 주점으로 가서 술을 좀 더 마시기로 했다. 서로 요란하게 부둥켜안고 인사를 나눈 후 일행과 헤어진 넷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으며 주변 상가를 살폈다. A가 말했다.

"우리 청하 마시러 갈래?"

누구 하나 대답하지 않은 채 A가 이끄는 대로 초가집 지붕에 표주박이 둘러진 주점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김현식의 '추억 만들기'가 흐르고 막걸리와 담배 냄새가 뒤엉켜 낙담한 영혼의 동굴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새끼손가락 걸며 영원하자던 그대는 지금 어디에

그대를 사랑하며 잊어야 하는 내 맘은 너무 아파요

...

뜨거운 내 마음은 나도 모르게 천천히 식어갑니다


S는 이 노래 입 속으로 따라 부르다 눈시울을 붉히며 생각했다.

'뜨거운 내 마음은 나도 모르게 천천히 식어갑니다, 이 가사는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싫다. 어떻게 해도 잊히거나 지워질 것 같지 않던 감정이 어느새 사라져 버린다. 미움도 사랑도 이 가사 앞에서는 초라하다. 그 감정에 온전히 담가져 있던 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다르다. 식는 것이다. 식을 것을 알거나 모르거나 상관없다. 어쨌든 식어간다. 도대체 변함없는 것이 있는가, 있다면 무엇이지?'

수염을 기른 중년의 사내가 주문한 청하와 두부김치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물러났다. 하얗고 작은 잔에 술을 따르며 A가 S에게 청하 어떠냐고 물었을 때 노래는 김현식의 '사랑했어요'로 바뀌었다. S가 노래를 들으며 잠자코 잔을 비우고 말했다.

"청하는 취기가 잘 오르지 않아 취하는 맛은 없지만 대신 말을 많이 하게 하는 것 같아. 우리 과에 친해진 친구 한 명이 있는데 그 친구는 서울에서 통학하거든. 대학 졸업하면 유학을 가거나 대학원을 갈 거래. 아마 졸업하면 나와는 다른 삶을 살게 될 거라고 그러더군. 태생이 다르고, 지금은 같은 과 친구이긴 하지만 아무튼 졸업하면 다시 만나긴 힘들 거라고 그랬어. '너와는 잠깐이다.' 한시적인 친구. 난 뭐, 어떻든 상관없긴 한데 오히려 더 진심이 곤 하지. 저번 주 금요일에 그 친구와 둘이 밤새 청하를 마시고 새벽에 헤어졌어. 언젠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말에 마음이 편해진 탓인지 청하 탓인지 오랜만에 정말 많은 이야기를 했어."

S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A는 C와 어깨동무를 한채 어깨를 들썩이며 화장실로 사라졌다. S는 그 모습에 이마를 찌그러뜨리며 B를 바라보았고 B는 세상 싱거운 미소를 지으며 끝까지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B가 S의 빈 잔에 청하를 따르며 말했다.

"여자애들은 왜 저렇게 화장실을 같이 가는 거야? 송사리들처럼 떼 지어 다닌단 말이야. 화장실 갈 때, 문구점 갈 때, 매점 갈 때 혼자 다니면 안 된다는 신의 계시라도 받은 듯이."

이어 S가 말했다.

"여자들은 동성 간 관계에서 독립적이길 바라지 않는 것 같아. 독립적이다 보면 어느새 적이 엄청 많아지는 안 좋은 경험 우리 모두 해봤잖아. 결속력으로 안심되는 그런 존재들이지. 물론 안 그런 사람도 있긴 해. 송사리 떼가 헤엄쳐 다니는 교실에서 너는 학을 접고 나는 책을 읽지. 너는 엽서를 쓰고 나는 창 밖을 보잖아. 또 있다. 넌 학알을 접고 난 엎드려 잠을 자. 교실에서 우리 둘은 색이 다른 완벽한 아웃 사이 더면서 또다시 둘 사이에도 줄곧 아웃사이더였어."

B는 S에게 술을 권하고 마신 후 다시 채우며 말했다.

"너는 너 외에 그 누구도 믿지 않아. 속 깊은 대화도 나눌 마음이 없고, 친해지길 바라는 것 같지도 않았어. 기억하겠지만 난 1학기 중 쉬는 시간마다 공부를 했어. 전문대라도 가고 싶었으니까. 아빠가 졸업하면 대학 가지 말고 곧장 취직을 하라고 한 얘기도 있고, 난 장학금을 받고 대학을 가야겠다 마음먹었어. 근데 시험 끝나고 석차 공개를 할 때마다 너무 기분이 나빴어. 너는 쉬는 시간에 항상 자거나, 창밖을 보며 멍하니 있거나, 고전 따위의 책을 읽는데 항상 성적이 좋았어. 성적이나 석차 따위 관심도 없어 보이는데 석차는 언제나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였지. 너의 책상 서랍엔 아이들이 넣어 놓는 쪽지로 가득 차고 너에게 관심 있어하는 애들이 너에 대해 별것도 아닌 걸 자꾸 내게 물었어. 너 때문에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어서 담임에게 짝꿍을 바꿔달라고도 했는데 안된다는 거야. 고민거리나 힘든 일 있으면 너에게 말하라고 도움이 될 거라고 오히려 친하게 지내라 하시더라고. 그때 생각했어. 너에게 우리 반 친구들은 그저 유치한 송사리 떼였던 거야. 고민을 들어주거나 쪽지에 대한 짧은 답글을 적는 너의 표정은 너무나 지루해 보였고 업신여기는 것 같았어. 너와 우리들이 다른 게 무얼까? 너는 뭐 대단한 것도 없는데, 뭘까?"

S의 얼굴에 엷은 분홍빛 물이 번지고 조금 피곤한 표정으로 B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B는 두부 위에 김치를 얹은 후 집어 먹었다. S가 B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나는 고등학교 입학한 후 많은 것을 잃었어. 중학교 다닐 때 이미 잃을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막상 잃고 난 후 그 허무함에 묻혀버린 것 같아. 자기 마음대로 왔다가 자기 마음대로 떠나가던 어머니가 아주 갔어. 다시 오지 않겠다고 간 거지. 다시가 없다는 게 뭔지 알아? 원래 바람 든 자리에 계속 바람이 불어. 그 자리가 스멀스멀 아리고 시려. 막을 길이 없어. 그냥 바람이 불어오는 대로 맞는 거야. 그게 다시 오지 않는다는 의미야. 어머니 대신 누군가의 손에 자라는 게 익숙하긴 하지만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은 다르지. 나는 어린아이도 아니고 많은 걸 알 나이야. 하지만 그러면서도 모르는 게 너무 많거든. 혼돈스러운 가운데 난 공부를 하고 책을 읽고 집에 가서 집안일을 하고, 도시락을 싸지.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음식을 만들어. 학교에 와선 수많은 고민의 쪽지를 읽고 답신을 해. 그 고민은 타당하고 바람직하고 온전해. 고민이 시작된 곳이 적어도 허공은 아니야. 나는 그 고민들을 부러워하고, 질투하며, 슬퍼하고, 억울해해. 나의 고민은 주소가 없고, 뿌리내릴 땅이 없으며, 신을 신발이 없어. 그런 내가 대단하다는 거야?."

B가 흔들리는 눈으로 S를 바라보았다. 서투른 위로 같은 것을 건네기에는 너무 멀고, 깊다. B가 술잔을 내밀었다. 청하의 잔은 담백한 모양과 색을 가지고 있으며 담고 있는 술을 지킨다. S 역시 잔을 내밀어 맞대자 짧고 다정한 음을 뱉어냈다.

손을 잡은 A와 C가 화장실에서 돌아왔다. 입술이 더욱 붉어졌고, 그만큼 볼도 발그레해져 있었다. 음악은 돌고 돌아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가 흐르고, 맞은편 긴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던 일행이 송사리 떼가 되어 화장실로 우르르 몰려가고 있었다.


저 여린 가지 사이로 혼자인 날 느낄 때

이렇게 아픈 그대 기억이 날까

내 사랑 그대 내 곁에 있어줘

이 세상 하나뿐인

오직 그대만이

힘겨운 날에 너마저 떠나면

비틀거릴 내가 안길 곳은 어디에...

이전 12화마르쿠스 비프사니우스 아그리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