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듣고 있는가?

감자탕과 참이슬

by 홍경

1. 시골 쥐와 서울 쥐

지방에서 상경한 나와 서울 토박이 Z는 사뭇 달랐다. 인정하기는 싫어도 말씨가 달랐고 담겨있는 취향이 서로 섞일 수 없었다. Z가 입사한 후 사수인 내가 그와 나눌 수 있는 대화는 한정적이었고 내밀함으로의 첫발은 조심스러웠다. 내게 커피를 건네주며 “어젯밤에 파티가 있었는데 와인을 너무 많이 마셔서 컨디션이 좋질 않네요.”라고 말하는 Z. 피곤한 모습의 Z를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 “나도 어제 퇴근하고 친구들을 만났어. 종로에서 술을 마시기 시작해서 자정 즈음 노래방에 갔고, 이태원으로 넘어갈까 하다 근처 뼈해장국 집에 갔지. 소주를 이어 마셨고, 새벽 네시 경 자주 가는 포장마차에서 일출을 보았어. 흐흐흐!” Z는 그 곱고 시원한 눈을 옆으로 펼치며 방긋 웃었다. “와! 뼈해장국 집에서 술을 마신다고요?” 나는 대답 대신 Z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딱히 서울 토박이인 Z를 좋게 말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시골내기 친구들과 후배들에 비해 순수하고 예의 바르며 함부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Z의 기품 있고 온화한 모습을 좋게 보아왔고, 가까운 사람에게서 느끼는 뉘앙스가 이런 종류의 것이라면 기꺼이 진솔할 수 있다. 감춤 없이 편히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니까. “Z 씨, 언제 기회 되면 우리 뼈해장국 집에서 참이슬 한 잔 해.”라고 말은 했지만 그렇게 함께 할 기회는 Z가 퇴사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이유를 굳이 말한다면 술과 분위기에 대한 취향 차이 정도가 될 것 같다.

90년대 서울. 낮과 밤에 따라 주인공이 다르며, 인간의 형식과 종류에 따라 들어가는 장소가 다르고, 직업군에 따라 걸어 다니는 길이 달랐다. 여기서 '다르다'는 것은 되고 안 되고의 의미가 아니다. 하고 안 하고의 의미다. 이들은 아주 오랫동안 다양성을 인정한 채 공존하며 나름의 패턴을 지니게 되었고 그 편안함에 정형화를 이룬 것으로 생각됐다. 신분증의 지역번호 ‘1’과 거주지로서의 서울을 명예처럼 생각하는 이를 본 적이 있는데 그 마음을 이해하기엔 참으로 역부족이었다. 지방에서 태어나 인천에 거주하며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나로서는 쉬는 곳이 내 집이고, 다니는 곳이 직장이며, 술잔을 기울이는 곳이 놀이터이니 그 지역이 어디든 별 상관이 없었다. 집안 대대로 살아온 곳, 혹은 부모님이 계신 곳을 고향이라 부른다면 나에겐 그것마저 이미 모호했다. 지연(地緣)으로 소속감을 가질 수 없는 완벽한 아웃사이더로서 거주 지역이 자긍심이 되는 심리의 흐름을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는가?



2.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어머니는 10년 전부터 고향을 떠나 전국 뜨내기들이 모여드는 인천지역에서 경제활동을 하며 살고 있었고, 나는 지방에서 자취 생활하며 대학을 졸업하고 그 후로도 그곳에서 2년이 넘도록 서울까지 통근했다. 편도 2시간 반이 걸리는 통근을 하면서 소화기관이 모두 망가졌고, 피로감이 누적되면서 개인적인 모든 일상에 활기가 없었다. 내 건강을 걱정하는 어머니를 두고 계속 상경을 망설이는 동안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이어 이듬해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두 분이 돌아가신 마당에 이 지방에 대한 미련이 더 이상은 없기도 했고, 통근 시 오가면서 허비하는 시간 중 2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생각에 1년 전 덜컥 이사를 결정했다.

어머니와 함께 거주하는 사이 예견한 대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어머니는 성격이 급하고 무척 에너지가 많은 타입이었다. 그에 비해 느긋하고 조용한 성격의 나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엿보이는 소란스러움이 좀처럼 적응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무엇을 하든 소리가 났다. 잠들었을 때 조차도 숨소리가 커서 그 소리에 잠이 깨는가 하면 다시 잠들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 방울 너덧개를 목에 단 고양이처럼 항상 그렇게 소리가 났다. 어머니 역시 허깨비처럼 소리를 내지 않는 나를 곁에 두고 늘 불편해했다. 입을 꾹 다물고 소리 없이 뒤돌아 서는 내 등 뒤로 어머니의 욕 한 바가지가 쏟아져 내리곤 했다.

인천에서 서울로 통근 시작한 후 일 년쯤 지난봄, 기묘한 일을 경험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일곱 시 경 1호선 부천역에서 전철을 타고 신도림으로 향했다. 여성전용칸에 탑승해서 좀비의 형상으로 이어폰을 꼽고 창밖을 바라보다 S와 s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던 것이다. 충동적이고 호기심 많은 나, s. 그에 비해 관념적이고 통찰력을 지닌 사유하는 존재로서의 나, S. 이 둘의 대화를 들을 수 있게 된 후로 내 삶은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닌 3인칭 관찰자 시점이 되었다.

그날 아침, 알람 소리에 잠이 깼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젯밤 두 시경 어머니의 잠꼬대로 잠이 깬 후 다시 잠이 오지 않아 책을 읽다 네시가 조금 넘어 겨우 잠이 들었다. 퉁퉁 부은 얼굴로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언제나처럼 '방울소리를 울리며'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아침을 먹지 않는 오랜 습관이 있어 아침 식사를 하면 복통으로 하루 종일 고생한다고 이미 여러 차례 얘기했지만 어머니는 한결같이 무시했다. 급히 구두를 신는 나에게 어머니가 말했다.

"불편해서 못살겠다. 너는 자식이 아니라 상전이야. 내가 무슨 잘못을 그렇게 했어! 매일 화난 애처럼 왜 그러는 건데? 나가! 니 맘대로 해."

나는 조용히 어머니를 뒤돌아 보았고, 어머니는 아무렇게나 소반을 내려놓은 채 방바닥 한가운데 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잠깐 어머니를 바라보다 인사도 없이 집을 나선 후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생각보다 기운이 넘치는 이 도시의 봄바람이 내 짧은 랩스커트의 자락을 폴락하며 들췄다. 상큼하고 들큼한 봄이었다.

전철 안의 모든 사람들은 부드러운 파도를 만난 나뭇조각처럼 울렁울렁 몸이 흔들렸다. 이대로 흘러 흘러 어디론가 영영 가버렸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사이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목덜미로 땀이 솟고, 눈앞이 아득해져 침을 계속 삼키며 쇠기둥을 더욱 세게 손으로 그러 쥐었다. 손에 땀이 흥건 해지며 진해진 쇠 냄새가 진동할 때쯤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s: 이 집에서 나가야겠어. 더 이상은 어려워. (s는 무척 흥분한 상태로 S에게 말했다.)

S: 어디로 갈 건데?

s: 몰라.

S: 어머니에게 이제 그만 좀 하지 그래?

s: 뭘?

S: 어머니가 니 눈치를 자꾸 보시잖아.

s: 어우, 내가 눈치 보면 얹혀 사는데 무슨 소리야!

S: 사실 어머니는 항상 너에게 모든 걸 맞추려고 하신다고. 너도 알잖아.

s: 그게 더 싫다고.

S: 정말 너무 못났네. 못 봐주겠어.

s: 나가야겠어. 더 이상은 어려워.

S: 어디로 갈 건데? 갈 곳은 있고?

s:...

S: 나가서 살 집을 진지하게 알아보던지, 어머니와 함께 잘 지내려고 노력을 하던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좋을 거야.

s: 아, 잠깐 조용히 해봐.

S: 적금, 거의 만기 되지 않았어? 그걸로 월세 보증금 정도는 될 것 같은데. 보증금이 높아질수록 월세가 낮아지는 것은 알고 있지? 어머니와 잘 지내며 돈을 좀 더 모으는 게 낫잖아. 너, 그 보증금이면 월세 내다가 이십 대가 다 가버릴걸? 너는 집주인을 위해 일하는 거나 다름없는 시간을 보내게 될 거야.

s: 어머니와 잘 지내기는 틀렸어. 난 더 이상은 못해.

S: 흠...

이들이 갑자기 나타나기 전까지 나는 홀로 너무 긴 시간을 스스로 상처 내고 치유하는 시간을 보내왔다.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구멍으로 드나들던 찬 바람이 조금 얕고 부드러워진 것을 느꼈다.



3. 해와 달이 된 오누이

Z와 헤어져 R&D실로 이동하면서 만난 해외영업부장이 '자넨 아예 그냥 링거를 꼽고 다니지 그래?"라고 한마디 하며 지나갔다. 어쩌면 술 냄새가 나는지도 모르겠다. 화장실 가서 거울을 보니 안색이 좋지 않았다. 몸무게도 많이 줄었고, 눈이 조금 안으로 꺼져 들어가 상대적으로 콧대는 더 높이 솟아 날카로웠다. 외로움을 모르는 차가움이 얼굴에 자욱하고 나라고 할 수 없는 인간이 서 있었다.

몇 주 전에 s와 S, 그리고 한쪽 구석에 그 둘을 잠자코 지켜만 보는 형태가 없는 녀석 하나를 또 발견했다. 도대체 나의 머릿속엔 몇 놈이 사는 것인가? 몹시 두렵기도 했고 외로움이 한 녀석 분량만큼 줄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머릿속의 녀석들도 느끼지 못한 채 며칠을 보냈는데 최근 나는 거의 매일 정시 퇴근 후 친구들을 만났다. 저녁에 만나 다음 날 새벽 서너 시경 헤어져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가 잠시 누웠다 다시 출근했다. 집에 머무는 시간은 많이 줄어들었고, 택시비 지출과 어머니의 잔소리가 늘어났다. 1년만 잘 버티자는 마음으로 주말엔 어머니와 마늘을 까며 이런저런 싱거운 얘기를 하거나, 끓여 준 육개장을 맛있게 먹었다. 주안 지하상가에 놀러 가거나 얼마 전엔 월미도에도 다녀왔다. 어머니는 요즘 보통의 어머니들처럼 기분 좋은 잔소리나, 밝고 즐거운 방울소리를 냈다, 또르릉~ 또르릉~.


퇴근 후 당연한 듯 집으로 가지 않고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 그들이 좋아하는 농담을 건네며 웃고, 공연히 다리를 떠는가 하면 몸을 가로로 휘휘 저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밤 한시가 조금 넘어 뼈해장국집으로 향했다. 노래방에 들르지 않아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심야의 뼈해장국집주인은 대개 너그러웠다. 취기 어린 손님도 적당히 받아주고, 언제 가냐고 재촉하는 눈길도 주지 않으며, 술을 주문하면 한 병, 한 병 진심을 담아 가져다주었다. 감자탕 냄비의 뜨겁게 오르는 흰 김 사이로 작고 찬 소주잔을 들어 올리면 나름의 운치가 있다. 적당한 취기와 몰려드는 피곤함에 따뜻한 바닥에 눕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 그것이 참 좋았다.

오늘은 오랜만에 K가 늦게 까지 남았다. K는 요즘 한창 뜨고 있는 3D 애니메이션을 시작했는데 역시 멋진 녀석이란 생각이 들었다. 쥐고 있는 것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려고 하는 나와는 전혀 다른 녀석인 것이다. K가 어머니의 안부를 물었고 s가 톡 나서며 말했다.

"내 마음이 데워지기까지 어머니는 살아 있는 동안 계속해서 장작을 던져 넣어야 할 거야. 언제 끓어오를지도 모를 솥의 물을 위해 계속해서 장작을 넣을 사람은 아니지만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막연히 기대가 돼. 자식이란 이런 것일까? 이렇게 미련할 수가 있느냔 말이야. 영영 용서 못할 것 같던 아버지, 돌아가시니 세상 그리 그리울 수가 없다. 끓어 넘쳐. 부모가 자식 용서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눈 감았다 뜨는 것보다 짧다던데. 나는 어머니가 장작을 던져 넣는 시늉이라도 해줬으면 하고 바라지."

K가 물었다.

"혹시, 이제 와서 어머니의 희생을 바라는 거니?"

S가 대답했다.

"어른의 세계엔 어른의 룰이 있을 거라 생각했어. 어렸을 땐 그래서 그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 하지만 나도 이젠 성인이야. 내 나이 때 어머니는 나를 낳았으니까. 어머니와 아버지가 남긴 행적에 관한 모든 퍼즐의 조각이 맞춰지질 않아. 보통 우린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사슬로 이어지고 그 사슬이 다시 엮이며 면을 이루고 확대되어 한 인간의 역사가 되잖아. 아버지의 퍼즐 조각은 너무나 많이 훼손되고 없어졌어. 형태를 이루지 못한 역사의 결과로 내가 있는 것인데 그게 참을 수가 없는 거야. 단서는 어머니의 모습인데 어머니마저 조각의 상당수가 자신의 것이 아니고 자신의 것은 잃어버린 것 같아. 이렇게 주체로서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면 그 자식들에 관해선 말해서 뭘 하겠어. 나는 계속해서 돌아갈 수 없는 그 영토를 찾아 헤매고 있어. 원래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진 대륙 같은 거지. 죽을 때까지 내 마음의 구멍이 그 영토를 그리워할 거야."

K가 말했다.

"영토가 사라졌다는 것은 무척, 지나치게 자유롭다는 뜻이겠지? 무엇엔가 귀속되지 않고 구속받지 않는 것. 모든 것을 본인이 결정하고 이룰 거야. 평가도 받지 않고, 그것에 대한 손해 역시 모두 본인 몫이지. 그렇다 보니 신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애착이 깃들어 있지 않다면, 아버지의 생애가 좀 이해도 될 것 같은데. 너를 돌아봐. 상당 부분 비슷해, 너랑. 네가 지금까지 친구들을 대하는 태도가 별 다르지 않거든. 너무나 다정하면서도 매우 차갑지. 관계에 대한 집착이나 욕심이 없어 보여."

S가 앞 접시에 등뼈를 덜어 살을 발라냈다. 두툼한 고깃덩이를 입에 넣은 채 말했다.

"어떻게 살든, 어떤 사슬을 엮었든 그 본디 형상은 본인만 알 수 있겠지? 퍼즐 조각을 생성해 나갈 때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남의 조각이 섞이기도 하겠고, 누군가 내 것을 가져갈 수도 있겠지. 의도하지 않은 조각을 남길 수도 있고, 버리고 싶은 조각마저도 숙명처럼 달고 살게 될 수도 있을 거야.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어떤 상황이든, 어떤 기분이든 기본적인 형태를 이루고 유지해야 하는데 당신들은 그것에 대해 간과하고 말았어. 나는 그야말로 무책임하고 잔인한 어른들의 뒷모습을 보며 자란 거지. 그런데 그렇게 자식을 등지고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다 하기엔 현재 그녀의 모든 것이 엉망인 거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아침에 눈뜨고 밤에 잠들 때까지 하는 일상적인 별거 없는 행위 하나, 하나가 형태를 이루고 그것은 온전히 유지되어야만 해. 그것을 덮어두고 도망치는 인생은 그 이상의 알맹이를 담지 못해. 단 한 개의 입구가 있는 동굴 같은 건데 그 입구를 절대 열 수 없도록 막아버리는 것이라고. 결국 빈껍데기인 거지. 외롭고 처량하고 분한 패자의 기분으로 계속 살아가는 거야.

이제는 어머니에 대해 아무런 감정을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 생각해보면 그녀와 나 역시 각자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니까. 투덜거리며 남을 위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으니 나는 싫으면 하지 않을 것이고, 하려면 진심으로 할 거야."

K가 허공을 잠시 바라보다 나를 바라보았다.

"너는 싫으면 하지 않고 하려면 진심으로 하는 애지. 그래서 난 널 좋아해.

나는 엄마에게 항상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사는데 엄마의 퍼즐은 너무나 단출하고 조각 수도 적어. 복잡하지 않고 이해가 쉽지. 하지만 그것이 엄마 인생의 전부일까? 우리 엄마야 말로 많은 부분의 조각을 떼내어 버리고 추리고 추리며 얼마나 힘들었을까? 홀로 아이를 키운다는 것, 책임을 진다는 것, 네가 말한 형태를 유지하기 위한 그 인생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어, 나에겐."

"K야, 우리 할머니는 막내가 젖먹이 일 때 혼자되셔서 밤에는 삯바느질하고, 낮에는 떡장사를 하셨대. 떡을 이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파셨는데 섬돌에 남자의 신이 있으면 그냥 나오셨다고 해. 그러다 어느 해 어느 날, 정말 멋진 신사를 만나셨다는 거야. 재가하면 아이들도 배곯지 않겠지 그런 생각으로 만나시려고 했대. 약속이 있는 날 밤 아이들을 씻겨 눕히고 당신도 누웠는데 깜박 잠이 드셨다지. 깜짝 놀라 일어나 나가려는데 어린 막내 작은 아버지의 발과 할머니 발에 끈이 묶여 있었대. 할머니가 그 끈을 보고 밤새 우셨다잖아. 그리곤 내내 남정네라면 시선도 주지 않으셨대.

그것이 누구이든 가족 전체를 위해 한 명이 희생하는 상황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 강요해서도 안 되는 것이지. 중요한 것은 이 대목이야. 우리 할머니는 그런 당신의 삶과 자세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계셨어. 노년의 자부심은 대단한 것에서 오는 것은 아닐 거라 생각해. 스스로 떳떳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사람마다 잣대가 다르고 항목이 다르겠지만 대개 비슷할 거야. 희생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는 것은 대가를 바라지 않기에 가능한 것이겠지.

어머니와 함께 지내게 되면서 의도적으로 괴롭힐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어머니가 불편해야 공평하다고 생각했어. 단시간에 죄책감을 씻어 낸 듯한 모습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았거든.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 어머니가 더 이상 나를 보며 죄책감이나 자격지심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러긴 쉽지 않을 거야.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어머니는 어머니의 인생을 사는 중이니까. 이쯤에서 어머니를 진짜 놓아주려고 해. 일 년 후 독립하면 모든 게 달라질 거야, 아마도."

이슬이 지상이 내려앉을 시간에 우리는 참이슬 네 병을 비우고 있었다. 가게 주인은 주방 쪽 한편에 앉아 꼬박꼬박 졸고 있었고, 손님은 더 이상 없었다. 할 말이 더 남은 듯이 보이는 s를 S가 꼭 끌어안고 있었고, 곁에 선 형태 없는 녀석은 그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습관처럼 명치께를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여러모로 외롭지 않은 밤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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