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파게티 혼술
모든 면에서 완전히 독립을 이룬 S. 그가 살게 된 이곳은 작고 깨끗한 원룸으로 맨 윗 층에 주인이 살고 있어 비교적 깨끗이 관리되어 있었다. 단열이나 방음, 방범이 잘 되어있는 다세대 주택으로 창밖에 나무가 보이는 것이 좋았다. 창을 열고 누워 음악을 듣고 책을 읽는 기분은 느긋하고 평화로웠다.
밥을 챙겨 먹을 때, 세탁을 할 때, 화장실에 갈 때 좀 외로운 기분이 들었지만 그때 말고는 대개 평온한 마음이었다. 혼자 산다는 것은 무척 자유롭고 문득 외로우며 대개 차분한 것이구나!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나쁘지 않지만 술을 마시는 것은 예외였다. 술이 좋아서 마시는 사람은 혼자서도 자주 한다고 알고 있는데 S는 그런 타입이 아니었다. 사람이 좋아서 술을 마시는 것에 가까웠다. 그런 그에게도 예외는 있었다.
종일 뚱하던 하늘이 저녁 무렵부터 비를 사납게 흩뿌리기 시작했다. 창밖을 보니 빌딩 사이로 우산을 방패 삼아 바람과 비에 맞서는 용사들이 여럿 보였다. 의미 없는 싸움이었다. 저들은 모두 허리께부터 이미 다 젖었고, 어느 원더우먼의 긴 머리칼은 바닷물에 휩쓸린 미역줄기처럼 전의를 잃은 채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도 묵묵히 한발 한발 앞으로 내딛는 그들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S는 조용히 되뇌었다. "파이팅!"
마감일이 임박해서 작업량이 많아 평소보다 늦게 퇴근하는 S에게 영업팀 홍대리가 가는 길에 내려주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비가 험히 오는 날의 대중교통은 여러모로 곤란하기도 하고 평소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의 호의여서 별 고민 없이 S는 그의 차에 동승했다.
하늘 아래 비는 방울이 아닌 줄기가 되어 쏟아졌다. 그들이 함께 타고 있는 소형 자동차의 가녀린 와이퍼가 흘러내리는 거대한 빗줄기에 묻혀 힘겹게 좌우로 움직였다.
S는 침착하게 팔짱을 낀 채 와이퍼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외부에 부착된 부속품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가는 상상을 했다. 도로는 이미 물이 차올라 차선을 식별하기 어려웠고, 쏟아지는 비에 전방의 시야마저 불투명했다. 별자리로 방향을 감지하며 망망대해를 지나는 두 명의 외로운 노르웨이 바이킹이었다.
홍대리는 단신의 상체를 핸들 앞으로 바짝 붙여 앉아 양손으로 핸들을 뽑아낼 듯 꽉 쥔 채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고, S의 존재를 잊은 지 오래였다.
홍대리로 말하자면 사장의 조카로 170cm가 조금 안 되는 키에 희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살집이 없는 호리호리한 몸매를 지니고 있어 하얀 와이셔츠에 감색 슈트 차림이 꽤 멋지게 어울렸다. 또한 말재간이 좋아 함께 대화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운 사람이었다. S와는 회식자리에서 처음 술을 마셨고 옆자리에 앉게 되어 대화를 나누며 가까워졌다. S가 홍대리를 관찰하고 분석하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진솔하고 그야말로 나이브한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S에게 호감을 보이며 자주 말했었다. "팀장님은 제 이상형이에요. 목소리, 체형, 손가락 모양, 이마 모양, 성격, 취향, 모두요."라고.
중간에 가다 서고, 가다 서길 반복하며 한 시간 거리를 세 시간 걸려 S의 집에 도착했다. 홍대리는 오십 살이 된 듯 늙어버린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팀장님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아직 초보인데 이런 때는 무리죠, 무리. 여기서 가까운 곳에 모텔 잡고 자렵니다. 이렇게 인천까지는 못 가겠어요.”
“미안하게 됐어요. 인천으로 빠져나가는 외곽 도로는 사정이 좀 나을 것 같기도 한데 이미 시간이 너무 늦어서 그렇게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고마워요.”
S는 쏟아지는 빗속에 서서 그의 차를 아득히 멀어지도록 바라보았다. 집 나온 강아지를 버려두는 것 같아 짠한 마음이 들었다.
집에 들어가 시간을 보니 두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씻고 누워 잠을 청하려 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이런 때 속절없이 눈감고 누워있을 S가 아니었다. 주석과 범례에 실을 원고를 보며 영문 타이핑을 시작했다. 눈은 원고를 훑고 손가락은 자판 위를 구르며 생각은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1 꼭지 타이핑을 마치고 짜파게티를 끓였다. 그리고 지난 주말에 친구들과 함께 마시고 남은 참이슬 한 병을 꺼냈다. 짜파게티와 소주는 나쁘지 않았다. 집에 김치가 없으니 짜파게티라도!
참이슬 한잔을 홀짝 마시고 짜파게티를 먹으며 생각했다.
'사장이 웅덩이를 파 놓았어. 나에게 의견을 묻지 않고 많은 꼭지들을 수락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다니! 그것도 클라이언트가 말해주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치과의 광고는 의사인 그가 원하는 대로 모두 들어주어선 안될 것이다. 마무리가 되지 않을뿐더러 시안은 볼품없이 바뀔 것이다. 의사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정확히 모르고 있다. 자신이 말한 대로 충실히 작업된 최종 시안을 확인한다면 분명히 화를 낼 것이다. 클라이언트의 주장을 완벽히 반영한 세련된 시안 따윈 이 세상에 없다는 걸 알려주어야 한다. 사장은 함께 있지 않은 사람에게 책임을 떠밀며, 모든 공은 자신의 것으로 당겨 쓴다. 눈앞에서 진솔한, 다정한, 그 무엇보다 능력을 위대하게 여긴다는 그 뉘앙스를 꾸며낼 줄 안다. 사장은 돈을 잘 벌고, 잘 쓰는 사기꾼이다. 의뢰인인 치과 의사를 직접 만나야겠다. 직접 얘기를 나눠보면 쉽게 해결될 수도 있다. 그가 원하는 것을 듣고 디자인의 방향을 정한 뒤 어떤 부분을 손대서는 안 되는지 알려주면 된다. 의사는 디자이너가 아니다.'
그리고 또 한잔을 마시며 생각했다.
'홍대리는 생각보다 내성적이고 조심성이 많구나. 모든 수를 다 내보이는 상대는 너무 싱겁지. 이기고 싶지도 않고. 대개의 좋은 남자는 홍대리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어디에나 있고 모든 수가 다 비쳐 보이는 좋은 남자는 내 상대가 아니다. 나보다 한 수 위에 말수가 적으며 침착하고 다정하지만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 좋다. 그리고 생활 패턴이나 동선이 복잡하지 않고 단정해야 한다. 남자는 패턴이나 동선으로 도덕성을 증명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단정한 사람, 많지는 않지만 있다. 함께 있을 땐 무척 다정하고 집중력도 좋지만 헤어져 있을 때 깜깜한 사람, 주말 스케줄이 복잡한 사람은 피해야 한다.
함께 있어도 즐겁거나 다정하지 않고 헤어져서도 깜깜하다면 그런 사람은 정말 최악이지 않나? A는 그런 류의 사람에게 끌리는 듯한데 무슨 이유일까? 공부를 잘한다 해서 연애를 잘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이 A에겐 더 나았다. 그때의 남자 친구는 무척 매력적이고 다정했고 공부도 참 잘했었다. 같은 교회를 다니는 학생회 여학생들은 모두 그를 좋아했었다고 알고 있다.
그렇게 좋은 사람을 너무 일찍 만나는 것 또한 애석한 일이다. 지금 우리 나이쯤 그들이 만났다면 더없이 좋았을 텐데. 그들은 이제 서로 각자 다른 상대와 다른 인생을 꿈꾼다.'
음악을 틀며 또 한잔을 마셨다.
'화양연화. 아름다운 양조위. 그의 담배연기가 머리 위로 피어오른다. 꼬깃한 흰색 셔츠를 입고 기사를 쓰는 그의 뒷모습이 기억에 남아있다. 양조위는 어디에나 있을 외모이지만 어디에서나 볼 수 없는 찬연한 외로움이 엿보인다. 아무에게나 다정할 것 같지만 누구에게나 다정하지 않을 것 같은 조심스러움, 조심스러움, 말없이 조심스러움. 다정함과 조심스러움은 너무나 마음을 울렁거리게 한다. 그 조심스러움으로 인해 외로움이 마음에 가득 차올라 나의 눈에, 그 누군가의 눈에 보이는 그것. 완벽한 이마와 눈과 코와 입. 양조위와 같은 사람과 결혼할 것이다, 나는.'
S가 참이슬 반 병을 비우고 짜파게티를 먹고 있을 때 유키 구라모토는 이 심야에도 완벽한 연주를 하고 있었다. 짜파게티와 유키 구라모토는 참 잘 어울린다 생각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은 다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진심으로 이루고자 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쉽게 다가갈 수도, 만질 수도, 가지기는 더욱 어렵다. 진심이 하는 모든 일은 쉬운 일도 어렵게 만들고 가까운 것도 멀어지게 한다.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모든 것은 저절로 아주 손쉽게 내 곁에 머물며 내 마음을 얻으려 애쓴다. 실로 인간의 삶이란 웃기지 않은가!'
S는 유키 구라모토를 끄고 앙드레 가뇽을 플레이했다.
'마음이 하는 일은 언제나 의심스럽고 산만하며 후에 불투명한 사실을 남긴다. 그렇다 하여 마음을 지켜보며 바로 잡으려 들면 모든 일이 인위적으로 배열되면서 결괏값이 자연스럽지 않다. 계속 연기하듯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우연에 기대어 좀 더 기품 있고 세련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그냥 살자. 살아보자. 사랑도 우정도, 그 무엇도 다 정해지지 않은 채로 정해져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진심이라면 결국 그 안에 내가 포함될 것이다.'
빈 잔에 술을 따르고 홀로, "건배!"라며 허공에 잔을 들어 올린 S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번져있었다. 그 미소는 양조위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소리 없이 주름진 미소였다. 바로 그때 빗소리는 그쳤고, 홍대리에게서 전화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