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백의 어머니

코스모스의 기행(奇行)

by 홍경

아래의 이야기는 장기백이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장기백이 이미 알고 있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가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기백이 당시에 느꼈던 감정과 시간을 들여 무엇을 정리하고 무엇을 간직했는지에 대해서도 나로선 알 수가 없다. 장기백이 이야기를 듣는 나를 배려했다고 느낀다. 듣는 상대가 어떤 의무감도 느끼지 않도록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다. 하지만 장기백은 그것이 가능했다.


내가 여섯 살 먹은 해, 가을이었다. 수원에서 어머니가 돌아왔다. 나는 할아버지 집에서 아버지와 살고 있었다. 어머니가 왜 따로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고, 나도 그리 궁금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가 좋아할 만하다 싶은 장난감을 많이도 사 왔다. 하지만 나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 나이가 아니다. 어머니가 내민 상자 안에 내가 좋아하는 책'같은' 것은 단 두 권 밖에 없었다. 그림책이었다. 나는 그림책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최근에 할머니에게 어사 박문수를 읽어 드리고 있고, 한글 대사전을 읽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지금의 나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없어 보인다. 운동화와 티셔츠와 바지는 터무니없이 컸다. 작은 것보단 낫겠지란 마음으로 사지 않았을까? 내가 어머니였다면 어떤 것을 사 왔을까? 역시 잘 모르는 사람에 대한 선물은 섣부르고 쓸모가 없다.

"마음만 받을게요, 어머니."라고 말할 뻔했다. 그 말 대신 나는 웃었다. 이미 그녀는 미안해하고 있지 않은가?

나를 꼭 끌어안고 그녀가 두 밤을 잤다. 내가 어디로 사라져 버리기라도 할 듯이, 즙을 짜듯, 눌러 부수어 허공에 다 날려버리려는 듯이 그렇게 집요하게 날 끌어안고 잤다. 그녀의 보드라운 명치께의 평평함에 머리를 박고 숨이 좀 막혀도 참아주었다.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고 싶지만, 나 역시 어머니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어머니라는 것, 나의 어머니라는 것, 나를 낳은 어머니라는 것 밖에는.

어머니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고, 새벽 일찍 일어나 식구의 밥을 짓고 설거지를 했다. 점심을 지어 과수원으로 가져가고, 낮에는 개울에 가서 빨래를 했다. 탈수기에 탈수를 해서 빨래를 널어놓은 어머니는 나를 불러 자신의 허벅지를 베고 눕게 한 후 귀를 파주었다. 귀속에 들어와 소곤대는 귀이개의 소리를 듣고, 긁는 소리를 듣고, 귀에서 쏙 빠져나가는 느낌을 참아 주었다. 욕심을 내는 귀이개의 움직임, 내 귓속 끝까지 들이미는 주걱 같은 것의 존재, 눈물이 찔끔 날 만큼의 둔하고도 두려운 통증, 그 후 들리는 어머니의 환호성 같은 낮은 음성, "와! 크다!". 이것이 그녀의 기쁨이라니, 나는 한참 후 돌아누워 다른 쪽 귀를 내어주며 그녀의 허벅지에서 오후를 보냈다.

두 밤을 잔 오후, 어머니가 읍내에 가자고 옷을 입으라 한다. 손을 잡고 걷는다.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빈틈없이 벽을 만들어 바람에 흔들린다. 어머니는 자신이 코스모스를 좋아한다고 내게 알려준다. 어머니는 코스모스를 좋아하는구나, 기억해 둔다. 어머니는 걷는 내내 코스모스를 훑는다. 목적지 없는 걸음걸이다. 속도가 느리고 그저 길을 걷기 위한 걸음이다. 나도 어머니 손에 긁혔다 제자리로 흔들리며 돌아가는 색색의 코스모스를 바라본다. 상큼한 듯 시원한듯한 생채기 난 코스모스의 냄새를 맡는다. 바람이 머리에 쏟아진다. 평온하고 좋은 길이다. 이 길을 이렇게 느긋하게 걸어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좋은 길이다. 어머니가 어떤 마음인지 느껴진다. 코스모스가 벽을 만들어 주는 그 공간 안의 평온함, 내 작은 손이 그녀의 손안에 쥐어져 있고, 그녀는 더 이상의 것은 잠시 잊었거나 내려놓았구나 생각해본다. 어머니는 이미자의 노래를 부른다. 맑고 가늘고 청량한 음색이다. 하얀 피부, 손수건으로 묶은 까맣고 윤기 나는 머리칼, 그 아래 드러나 있는 흰 목덜미, 원피스에 가려진 가늘고 단정한 몸매. 젊은 그녀의 가을이다. 이미자와 젊은 어머니, 기억해 둔다.

저만치 앞에 공중전화가 보인다. 뭔가 생각난 듯 내 손을 놓고 아무 말 없이 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간다. 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다. 대화는 길게 이어진다. 어머니는 동전을 주머니에서 계속 꺼내 꽂는다. 나는 어머니의 대화를 의식적으로 흘린다. 바람에 흘린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으리라,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으리라. 어머니의 표정이 밝아지기도, 어두워지기도 한다. 하늘이 그렇게 하듯 한시도 같은 표정이 없다. 두 밤을 함께 잤고 세날을 함께 있지만 저렇게 풍부한 표정은 처음이다. 전화기 저편에 이어진 세상은 어머니에게 어떤 의미인가? 내가 있는 이곳과 저곳은 어떻게 다르며 어머니는 어떤 세계에서 존재하길 바라는 것인가? 어머니가 진심으로 바라고 갈망하는 세상은 이곳인가 저곳인가? 나는 아무래도 자신이 없어진다. 내가 있는 이 세계는 희망이 없어 보인다. 어머니의 표정으로 알 수 있다. 나여서, 나 때문에 그녀는 이 세계를 마지못해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머지않아 그녀는 발목의 붉은 실을 끊고 새처럼 홀연히 사라질 것이다. 나도 이곳에 그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 않는다. 꼭 그녀가 필요하거나 하지도 않다. 나 역시 많이 자랐고, 많이 알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하지만 몹시 억울한 기분이다. 유리창으로 넘어오는 더없이 밝은 표정의 어머니를 바라보며 어쩔 수 없이 기분이 나빠진다. 아무 때나 자신이 원하는 때 나를 볼 수 없게 하겠다. 순진하고 약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다. 내 귀를 파고 싶어 죽을 것 같아 하라지! 내 선물을 사고 싶어 밤새 울어보라지! 나를 안아주고 싶어 피멍 들어보라지! 나는 아무것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정말 괜찮거든.

읍내 슈퍼에서 라면 10개와 무 2개를 산다. 검은 봉지 두 개에 나누어 담아도 빵빵하다. 적어도 하나 정도는 나누어 들어줄 수 있다. 무가 든 봉지를 건네받는다. 어머니를 위해서가 아니다. 단지 난 친절할 뿐이다. 무겁다. 무겁다는 생각에 어머니에 대한 이상한 기분이 사그라진다. 걸으면 걸을수록 봉지가 무거워진다. 이젠 온통 머릿속에 힘들다, 무겁다는 생각뿐이다. 이게 더 낫다. 티 나지 않게 무겁지 않은 체하며 걷는다. 나는 친절하고 괜찮은, 진짜 괜찮은 장기백이다. 어머니는 코스모스를 왼손으로 훑으며 오른손으로 라면이 든 봉지를 들고 나와는 거리를 두고 걷는다. 무언가 생각에 잠겨있다. 적어도 이 세계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가볍고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이 다행이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한다. 어머니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춘다. 봉지가 무겁다. 무가 점점 무거워지더니 납덩이로 변한다. 손이 끊어질 것 같다. 다른 손으로 바꾸어 들어도 점점 버티는 시간이 짧아진다. 조금만 가면 된다. 잠깐만. 멈추어 봉지를 묶고 안아본다. 저만치 앞으로 가있는 어머니에게로 뛰어간다. 길쭉하고 무거운 무를 안고 어머니와 집에 들어간다. 어머니가 방긋 웃으며 땀이 묻는 내 정수리를 쓰다듬는다. 나는 정말 괜찮은 장기백이다.

하룻밤을 더 잔 후 어머니는 이른 새벽 '아무도 모르게' 이 마을을 떠났다. 그 며칠 후 아버지도 이곳을 떠났다 .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평소보다 더 말수가 적어졌고, 나는 책을 읽는 시간이 많아졌다. 입학한다면 어떤 생활을 하게 될까, 궁금하다.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어른들의 생활은 어떤 것일까 참 궁금하다. 그 안에서도 새로운 것이 있을까? 새로울 것이 없는 세상이 견딜 수 없는 인간도 있을 텐데, 그들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게 될까? 책에서는 아주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꼭 바람직하거나 도덕적이지 않은 순간도 있다. 어른은 대부분의 성(性)적인 것으로 바람직하다, 도덕적이지 않다 판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방면으로 취약한 것인가, 아니면 그것이 그렇게 치명적인 것인가? 취약하거나 치명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것으로 왜 그리 격정적이며 암울한가? 책과는 다른 세상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에서 엿볼 수 있는 것 이외에 별것이 더 없을 수도 있다. 결국 책도 특이하거나 평범한 인간이 적어놓은 기록일 뿐이다. 그래서 국어대사전이 좋다. 국어로 된 모든 말을 있는 그대로 만난다. 차별도 없고, 가능한 한 많은 것을 같은 수준의 언어로 풀어놓았다.

어머니가 나를 보고 싶어 하지 않으면 어머니에게 복수할 기회 따윈 없다. 보고 싶어 하지 않아 슬플 것인지, 복수할 기회가 없어 억울할 것인지, 슬픈 게 나을지 억울한 게 나을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어머니가 좋아한다는 코스모스, 나도 좋아한다. 코스모스는 웃는 얼굴을 갖고 있다. 코스모스라는 단어도 참 좋다. 코스모스는 어떻게 코스모스라는 이름을 얻었을까? Cosmos는 우주적이며 질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고 또한 철학적이고 수학적인 의미다. 어머니의 기억으로 나는 이제 코스모스에 대한 호감을 0으로 내린다. 0은 기본을 의미하고 감정의 초기 상태를 의미한다. 기회를 의미하고 끝이자 시작을 알리는 숫자다. 가을, 길가의 코스모스를 볼 때마다 나는 0을 떠올릴 것이다. 내 뜨거운 모든 감정의 초기화를 위해 널 찾을 것이고, 넌 바람에 가느다란 줄기를 흔들며 나를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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