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고진이의 아들
내가 살고 있는 산을 내려가면 마을이 있다. 부채 모양으로 펼쳐진 형상인데 이 마을 사람들은 농사를 짓는다. 과수원과 밭농사, 혹은 논농사를 짓는다. 수대에 걸쳐 살아온 사람이고 외부에서 유입된 가구수는 몇 되지 않는다. 마을 초입은 논으로 시작된다. 왼편으로 작은 길이 나 있는데 그 길을 따라가면 부채의 오른쪽 모서리 부분에 해당하는 집이 한채 있다. 그 집에는 조부모와 사는 사내아이가 있다. 그 아이는 일곱 살이다. 내가 살고 있는 산중의 집에 가장 가까운, 인가의 말단부에 그 아이의 할아버지 소유의 과수원이 있다. 거의 사과나무이고 약간의 배나무가 심어진 과수원이다. 그 아이는 할아버지를 따라 곧잘 산에 오른다. 일하는 할아버지를 두고 가끔 내 집, 평상에서 놀다 간다.
내가 그 아이를 처음 만나 너를 소개해보라 했을 때, 자신을 '백자고진이의 아들'이라 소개했다. 내가 아는 단어 중에 '백자고진이'이란 단어가 있던가?
"백자고진이가 뭐야?"
"백자고진이는 그냥 백자고진이이예요. 그걸 어떻게 설명해요."
"백자고진이 아들이란 말은 어디서 배운 거야?"
"배운 게 아니고 그냥 알고 있는 거예요. 나는 백자고진이의 아들이에요."
"그렇구나. 그럼 너의 이름은?"
"장기백이에요. 할아버지가 지어주셨어요."
이렇게 백자고진이의 아들, 장기백은 내 몇 안 되는 친구가 되었다.
장기백을 처음 만난 후 나는 계속해서 '백자고진이'란 단어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백작, 소공자 같은 신분을 나타낸 말 같기도 했다. 아이가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을 무렵, 자신의 아이를 노부모님께 맡기며 꼭 안은채 귓속말로 들려주었으리라. "기백아, 장기백, 너는 백자고진이의 아들이야." 이 말을 남긴 채 장기백의 아버지는 타지로 떠난다는 그런 상상.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타당하고 멋진 상상이었다.
장기백의 할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이 장 씨라 불렀다. 장 씨 할아버지는 말수가 극도로 적고, 표정도 많지 않았으며, 걸음조차 희미한 연기 같았다. 가능한 한 존재감을 세상에 드러내거나 남기지 않겠다고 작정을 한 듯 보였다. 그렇게 내향적인 사람이 손주의 이름은 그 이름도 찬란한 기백이라 지어주었다니! 그 이름을 참 잘도 지어주었지 않은가! 장기백은 일곱 살이지만 세상을 향해 당당하고 두려움이 없었다. 산골에 맡겨져 자라는 사내아이 치고 아는 것이 많았는데 한글을 일찍 깨쳐 일찍부터 다독을 한 결과였다.
장기백은 생각이 많고 사색을 즐겼다. 간혹 너무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했는데 끝내 어쩌지 못한 속내를 내게 쏟아 놓곤 했다.
"저는 요즘 사람들의 의도가 보여요. 할머니와 시장에 갔을 때 만나는 많은 어른들과 지나쳐 가는 많은 사람들의 행동이나 대화에서 의도가 읽혀요. 우리 집에 마실 온 빨간 지붕 할머니도 그렇고 우리 할아버지와 가장 친한 길 씨 할아버지에게서도 보여요. 그것을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만 모르는 것 같아요. 의도는 속마음과 같아서 정말 보고 싶지 않지만 나도 모르게 알아채는 거죠. 덜 싱싱한 고등어를 몰래 팔려는 읍내 시장 아줌마, 화투에서 절대 지고 싶지 않은 빨간 지붕 할머니, 연장을 빌려가 되돌려 주지 않는 길 씨 할아버지. 얼마 전엔 너무 화가 나서 할머니에게 빨간 지붕 할머니와 화투 치지 마시라고 했어요. 그렇게 지기 싫은 사람은 내기 같은 것을 하면 안 되잖아요. 우리 할머니가 이기기라도 하면 심술을 부려요. 우기고, 의심하고, 끝없이 투덜대요. 우리 할머니가 일부러 져주기도 하는데 그것도 눈치 못 채는 바보라니까요. 빨간 지붕 할머니가 잘해서 이긴 줄 알고 신나 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모르는 건가,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길 씨 할아버지는 고장 난 연장을 우리 할아버지의 연장과 바꾸어 돌려주곤 해요. 정신없이 웃으며 수다스럽게 우리 할아버지 혼을 쏙 빼놓고는 자신이 가지고 싶은걸 슬쩍 가져가기도 해요."
"장기백, 다른 사람의 의도를 본다는 것은 어쩌면 불편한 눈을 한 개 더 달고 있는 것과 같겠다. 나는 불편한 귀 한 개를 더 달고 있는 사람인데. 그래서 너는 내 벗이 되었나 보다. 기백이는 다른 사람의 의도를 읽음으로 저절로 너를 지키는 법을 배우게 될 거야. 좀 더 자라서 더 많은 사람들과 더 많은 경험을 쌓다 보면 너는 보다 멋진 장기백이 되는 거지."
"귀를 한 개 더 달고 있어요?"
"응. 나도 너처럼 어렸을 때부터 남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곤 했어. 일종의 기운 같은 것인데 그것이 지닌 의미를 알아챌 수 있었어. 그래서 간혹 어떤 곳에 갔을 때 납처럼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하고, 어떤 물건을 소유하게 되었을 때 가슴이 아픈가 하면, 처음 만난 사람인데 몇 천년 전에 만났었던 것처럼 반갑기도 했고, 뒷간에 바람이 지나도 그 바람에 밤새 울기도 했었어. 그래서 나는 이곳에 사는 거야, 산속에서. 장기백, 기백아, 세상에는 많은 의도를 지닌 채 사람들이 살아가는 게 당연해. 그건 태어나면서부터 어깨에 둘러진 짐 같은 거야. 평생 내려놓을 수 없는 짐 같은 거지. 의도 중에 선한 의도에 더 집중을 해봐. 원래 꼴 보기 싫은 게 눈에 잘 띄는 법이지. 하지만 보다 선한 의도에, 맑은 의도에, 의도 없는 의도에 마음을 써봐. 너의 불편한 눈은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너에게 생긴 것일 거야. 나는 나이가 이렇게 많이 먹었어도 아직 불편한 귀를 잘 사용하지 못하고 있어. 마음과 정확히 이어진 귀니까, 내 마음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을 듣게 돼. 기백이 너의 눈도 너의 마음과 단단히 이어진 눈일 거야. 곱고 예쁘고, 향기로운 것에 마음을 두렴. 너는 그것을 많은 사람에게서 보게 될 거야."
"백자고진이의 아들이니까!"
"그렇지, 장기백은 백자고진이의 아들이니까!"
장기백에게 물을 한잔 먹인다. 나의 벗은 파란색 운동화에 멜빵바지를 입고 평상에 앉아 몸을 좌우로 흔든다. 이 작은 몸에서 싹트고 있는 소중하고 연약한 기운을 느낀다. 이 작은 나의 벗이 지키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의도가 읽히지 않는 사람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저씨예요. 세 사람이나 있으니까 괜찮아요."
"나도 장기백이 좋아. 가끔 내 평상에 앉았다 가는 사람들 중 장기백이 제일 좋아."
리어카를 끌며 장 씨가 손주를 불렀다.
"기백아!"
나의 벗 장기백은 밝은 표정으로 산토끼처럼 깡총거리며 뛰어갔다. 살짝 뒤를 돌아보며 귀엽고 통통한 작은 손을 활짝 펴 흔든다.
"바이 바이"
"장기백, 또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