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외로움
아버지, 산옥입니다. 올해 여름은 가끔 더웠고 장마에 비도 거의 내리지 않는 채 끝나가고 있습니다. 창을 열고 잠이 들었고 이른 새벽 찬기운에 잔기침을 하다 완전히 잠이 깨었습니다. 닫으러 간 열린 창문 앞에서 계절이 바뀌고 있고 그로 인해 이미 다른 새벽 공기의 향을 한참 동안 맡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시간의 흐름과 변화 속에 존재합니다. 계절이 바뀔 때, 해가 지고 뜰 때, 낮에 눈이 녹을 때, 새벽 창에 서리가 어릴 때 당신은 바로 옆에 서 있습니다. 아버지는 제게 불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외로움을 남겨주었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그 무엇도 하지 않지만 이러나저러나 외롭긴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밖에 거의 나가지 않고 집에서 머물며 계속 책을 읽었습니다. 끼니도 거르고 볼일도 보지 않고 오로지 독서에만 집중하려 애를 써봐도 인간은 본디 거추장스럽게 꼭 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고 그것은 반드시 수행해야 다음이 있습니다. 성가시고도 중요한, 하찮은 많은 것 속에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책을 읽는 이유는 버리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아시지 않습니까? 버리기 위해선 무언갈 해야 한다는 것을요. 실제로 삶 속에 유의미한 것들 중 그 무엇 하나 변변찮은 제가 스스로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의식될 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있긴 어렵습니다. 방을 청소하고, 부엌을 정리하고, 평상을 쓸고 닦은 후 빨래를 해보았습니다. 어느 정도 차분해진 마음으로 남은 것은 독서뿐. 책을 들고 눈으로 글자를 훑으며 버리고 버려도 이상스럽게 계속해서 쌓여가는 생각과 판단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어서 하다 하다 며칠 전엔 나흘 동안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산 것인지 죽은 것인지 모르게 보낸 뜨겁고 끈적한 시간들로 몸의 살은 빠져나갔고 어느 정도 머릿속도 비워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이렇게 죽는다면, 이렇게 외롭게 죽어간다면, 그렇다면 아버지의 삶과 죽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첫눈이 내릴 즈음 당신은 어김없이 사라지고 긴 겨울을 홀로 지냈던 배고픔의 기억을 떠올립니다. 고통스러운 한 계절이 지나고 돌아온 아버지는 산에 가서 도인을 만났다면서 돌을 주머니에서 꺼내 보여주거나 여관에 몇 달을 머물며 지냈다고 달방여관 302호의 열쇠를 꺼내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쇠약해 보이는 얼굴에서 빛나던 날것 그대로의 눈빛과 마음속에 켜켜이 쌓아두었던 먼지 더미를 털어낸 듯 홀가분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 원망이나 미움 같은 것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오히려 저도 그렇게 되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몇 년간의 겨울을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하며 누구와 보내셨나요? 발은 땅을 딛고 있지만 머리는 이 땅을 벗어난 아버지의 인생의 마지막 부분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제가 산속에서 홀로 보내는 어른의 시간들, 다시는 세상으로 내려가지 않겠다는 이 마음이 당신을 잡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이해하는 것은 제 생애를 걸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수많은 의문과 외로움, 원망이나 미움 같은 그것을 마음에서 내려놓을 때 비로소 '우리'가 왜 왔으며 혹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므로.
무언가 한 가지, 단 한 가지를 지니고 지키며 사는 사람들은 외롭지만 자유롭습니다. 지킨다는 마음 없이 그것을 지키며 충실히 현재를 살아가다 생기는 것,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없는 빛, 색채입니다. 그들이 세상에 내보이는 엷은 빛은 마음속 심지에 붙은 불꽃에서 기인한 것으로 반드시, 반드시, 반드시 완벽하게 홀로여야 스스로 알아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무리에 속해 있으며 어우러져 살게 마련인 가운데 완벽하게 홀로 된 끝점에서 자신의 불꽃을 볼 수 있도록 설계된 이 루틴은 아무나 쉽게 알아챌 수 없도록 조치된(한?) 진의를 알 수 없는 어이없는 눈가림입니다. 어느 사람은 그것을 보고자 스스로의 삶을 변형시키고 왜곡시키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본의 아니게 경험하게 되는 힘겨운 상황 끝에 보게 되기도 합니다. 불꽃을 찾아 나선 자와 맞이한 자 사이의 차이는 없습니다, 올 것이 오는 것일 뿐.
자신의 불꽃을 자각하는 순간 삶은 이제까지 보여줬던 단순한 프레임을 벗어나 보다 섬세하고 다양하며 복잡한 덩어리의 실체를 슬며시 내보입니다. 분명 이것은 끝점이 아닌 시작점이며 지금까지 착각에 가까운 자각에 기대어 보아 온 현상들에 집착하거나 머물지 않게 될 것을 예견하는 순간입니다.
아버지도 아시겠지만, 제 삶의 어느 한 구간을 형상화하자면 응달의 마루 밑에 거적 하나를 뒤집어쓰고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별 강요도 없이 아버지가 부드럽게 내민 손을 잡고 기어 나와 보게 된 또 다른 '세계'는 상상과는 다른 오히려 현실적인 모습으로 차갑고 무관심한 온통 회색의 것이었습니다. 제가 본디 마루 밑에 있었던 것인지, 마루 밑에 기어 들어간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마루 밑에 머물렀지만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마저도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곳이 마루 밑이라는 것을 인식한 후 아버지를 만난 것인지, 아버지를 만난 후 마루 밑을 인식한 것인지도 역시 모호합니다. 마루 밑에 있었던 것과 아버지를 만난 것과 마루 밑에서 나온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 사실들은 서로 아무 연관이 없고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세 개의 우연한 인연이 저절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제가 경험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일대(一大)의 서사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불현듯 스스로 강렬한 의지가 생기고, 평소 알고 지내던 이가 귀인이 되어 도우며, 자기 내면의 또 다른 어떤 '존재'가 이미 예상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리드해 나아간다는 것, 마지막으로 순식간에 모든 상황의 방향이 바뀌었거나 전혀 다른 기반의 현재에 착지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변화가 퇴화일 수도 있고, 진화일 수도 있지만 그 가치와 결과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은 아버지를 향해 기인이라거나 허언증이 있었다거나 허풍쟁이였다고 회고했지만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불꽃을 순전한 의지로 결국 확인하였고, 그것에 관해 누군가의 이해를 바라지 않았을 뿐입니다.
곧 남겨짐의 의미가 덧입혀진 첫눈이 내릴 테지요. 버림받지 않았으나 버려진 느낌이 되어 산중서신을 올립니다.
보고 싶어요. 진심으로.